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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시론] 광복 이후 사과한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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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행적을 남긴 문화예술계 인사들 중 광복 이후에 사과한 사람이 없었다. 일본은 지금 모든 고등학생에게 독도를 되찾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부끄러운 과거사를 들춰보면서 바짝 긴장해야 한다. 이런 마음으로 8·15 광복절을 맞도록 하자.

이승하 | 시인·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일본은 방위백서에 죽도(독도)가 자기네 영토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문부과학성의 검정을 통과한 고등학교 사회과 과목에 독도 영유권을 반드시 명시하도록 했다. 자국 영토를 한국이 강제로 점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반드시 되찾아야 할 독도라는 말이다. 교과서에 그렇게 적혀 있는데 아이들이 그 말을 믿지 않고 독도가 한국 영토라고 생각할까? 우리 세대에 되찾자는 왜곡된 애국심을 심어줄지도 모른다.
1950년대에 “미국을 믿지 말자. 일본은 일어선다. 소련에 속지 말고, 중국에 죽지 말자. 조선은 조심해라”라는 말이 유행을 탔던 적이 있다. 일본이 올림픽을 악착같이 개최한 이유가 다시 일어서려는 몸부림임을 알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36년 동안 식민지 지배를 받았다. 하지만 경술국치 한참 전인 1882년 제물포조약 때부터 일본의 반식민지가 되었다. 갑신정변, 을미사변, 을사늑약이 다 침략의 마수를 뻗은 일들이었다. 이름만 대한제국이었지 광산채굴권, 철도부설권, 외교권 등을 빼앗긴 상태였으니 반세기 동안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자라나는 2세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징병에 동원된 청장년들, 일본군 병영에 끌려간 여성들, 공장과 탄광에 끌려가서 죽도록 일하고 돈 한푼 못 받은 징용 인력들의 한을 잊지 말자고?

그것도 중요하지만 과거사를 살펴봐야 한다. 특히 문화예술계에서 친일에 적극적으로 나선 이들이 있었는데 그 행적을 숨기는 데 급급했다. 임종국이 1966년에 <친일문학론>을 펴내지 않았더라면 문인들의 친일 행각은 다 묻혀버렸을 것이다. 특이한 것은 임종국의 부친이 친일 부역자였다는 것이다. 천도교 지도자였는데 수차례 일본의 식민지 정책 및 침략전쟁에 동참할 것을 선동한 행적이 있었다. 임종국은 집필 중 아버지의 이러한 행적을 알게 되어 괴로워했다고 한다. 하지만 부친은 “내 이름도 넣어라. 그 책에서 내 이름이 빠지면 죽은 책이다”라고 하여 아버지 임문호의 이름이 들어가게 되었다. 반성을 하고 싶었는데 아들이 대속해주어 기뻤던 것이다. 하지만 책은 학계와 문단에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다 덮은 일을 왜 들추느냐는 분위기여서 언론에도 보도되지 않았다. 초판 1500부가 13년 동안 나갔는데 그나마 1000부는 일본에서 연구를 목적으로 구입해간 것이었다.

일제 말기에 수많은 친일 잡지가 나왔다. 1939년 1월에 창간된 <동양지광>은 통권 83호까지 나왔다. 편집 및 발행인인 박희도는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데 변절하여 적극적으로 친일 활동을 했다. 그는 3·1운동 때 2년여 옥고를 치렀고 1922년에 잡지 <신생활>을 창간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다 또다시 옥고를 치렀는데 그 이후에 그만 변절해, 국민총력조선연맹 등 친일 단체에서 활약했다. <동양지광>의 고정 필자 최린도 33인 중 한 사람이었는데 “조선총독 제1대 데라우찌 님의 시정방침에 대해서는 그 당시 무단정치니 무어니 하면서 여러 가지 비판도 있었습니다마는, 오늘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 시대의 조선의 사정으로 볼 때 대단한 성의와 선의로써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같은 글을 발표했다. 최린은 이 글에서 3·1운동을 ‘대정 8년의 사건’으로 부르는 망발을 서슴지 않고 있다.

1940년 1월에 창간된 <내선일체>는 38호까지 나왔는데 어떤 목적으로 만든 잡지인지 제호가 말해준다. 창간 목적이 내선일체의 구현 외에도 황도정신의 발양, 총후(銃後) 후원의 강화, 내선 결혼의 실천, 국어(일본어) 보급의 철저 등이었다. ‘총후’는 후방이란 뜻이니 우리가 전시에 후방에서 최선을 다하자는 말이지만 조선인과 일본인이 결혼을 많이 해 내선일체를 이루자는 주장에는 소름이 돋는다. 이 외에도 54호를 낸 <신시대>, 39호를 낸 <춘추>가 있었다. 태평양전쟁 전과 전시에 나온 <대동아> <총동원> <국민총력> <녹기>가 다 우리 조상이 만든 친일 잡지다. 평론가 최재서는 <인문평론>을 <국민문학>으로 바꿔 일본어로 펴냈다. 이 잡지의 목차를 보니 당시의 유명 문인이 거의 망라되어 있다. 그들 중 광복 이후에 사과한 사람이 없었다. 일본은 지금 모든 고등학생에게 독도를 되찾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부끄러운 과거사를 들춰보면서 바짝 긴장해야 한다. 이런 마음으로 8·15 광복절을 맞도록 하자.

<2021-08-05> 한겨레

☞기사원문: [시론] 광복 이후 사과한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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