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의 히,스토리] 오염된 애국가
국민의힘 대선 예비후보인 최재형 전 감사원장은 지난 4일 대선 출마 기자회견 때 애국가를 불러 화제가 됐다. 뒤이어 그의 집안사람들이 가족 모임 때 애국가 4절까지 합창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있었다. ‘전체주의적이다’라는 소감들이 나오자, 그 집안 며느리들이 가족 성명을 발표하는 진풍경도 나왔다.
가족 모임에서 애국가가 합창되는 것 자체가 비난받을 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태극기 집회에서도 나타났듯이 극우세력이 국민통합의 상징물을 앞세우며 대중에게 어필하는 일이 잦아지다 보니, 애국가 같은 상징물에 대해서도 부정적 인상이 조장될 여지가 생기게 된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상징물을 둘러싼 문제점이 그 뿐만은 아니다. 애국가와 관련해서는 ‘오염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태극기보다 애국가의 문제점이 더 근본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래된 논쟁
애국가 작곡가인 안익태의 친일 행적은 잘 알려져 있다. 일왕(천황)을 찬미하는 ‘환상곡 에텐라쿠’, 사쿠라·후지산·사무라이와 더불어 일왕과 ‘일본해’를 찬미하는 ‘일본 축전곡’, 일본 괴뢰국인 만주국의 10주년을 경축하는 ‘만주 환상곡’ 등을 짓거나 지휘했다.
그는 한국에 관한 음악도 만들었다. 그런데 일왕을 찬미하는 ‘환상곡 에텐라쿠’를 발표한 1938년 그 해에 한국에 대한 사랑을 표시하는 ‘코리아 환상곡’도 초연했다. 이는 그의 의식 속에서 일본에 대한 감정과 한국에 대한 감정이 비슷한 시기에 혼재돼 있었을 가능성을 드러낸다. 그런 감정으로 일왕 찬미곡도 짓고 한국 찬양곡도 지었던 것이다.
게다가 ‘코리아 환상곡’과 ‘만주 환상곡’의 피날레 부분이 비슷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2007년 <내일을 여는 역사> 제27호에 실린 ‘다시 보는 안익태 – 애국가의 작곡가는 애국자였나’에서 음악학자 송병욱은 “(두 곡이) 주요 합창 선율 두 개를 공유하고 있다”며 “전자에서는 그 선율들이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주장하던 대동아공영과 신질서를 찬미하는 가사를 위해, 후자에서는 해방된 한국과 산천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가사를 위해 사용”됐다고 분석했다.
애국가의 오염 상태는 지난 11일 <안민석 TV>를 통해 생중계된 국회 공청회에서도 다시 한 번 강조됐다. 문재인 정부의 마지막 광복절에 즈음해 개최된 이 공청회에서는 작사가 쪽의 문제점이 집중적으로 조명됐다.
애국가 작사가는 공식적으로 ‘미상’이다. 누가 작곡했는지 확정돼 있지 않다. 애국가 작사가 논쟁의 대체적인 상황과 관련해 올해 3월 <기독교 사상> 제747호에 실린 김도훈 한국교원대 연구교수의 논문 ‘애국가 가사의 변천과 작사자 논쟁’은 “애국가 작사자가 누구인가 하는 논쟁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것은 지금으로부터 66년 전의 일”이라고 한 뒤 1955년 이후의 논쟁 실태를 이렇게 정리했다.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도 이 논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논쟁이 재생산되는 이유는 작사자를 입증할 만한 결정적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작사자 논쟁은 자료보다는 주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증언과 진술, 전언(傳言)이나 전문(傳聞)을 중심으로 반복적으로 되풀이되고 있다.
2015년 <근대 서지> 제11호에 실린 박대헌 완주책박물관장의 논문 “SBS TV 그것이 알고 싶다 ‘애국가 작사 미스터리’의 논쟁에 대한 고찰”은 2014년 7월 12일 방송된 작사가 논쟁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그동안 애국가 작사자 리스트에는 윤치호, 안창호, 김인식, 최병헌, 민영환 등이 이름을 올렸다”고 정리한다.
안창호냐 윤치호냐, 참 고약한 문제
이 후보들 중에 가장 유력한 인물은 둘이다. 11일 국회 공청회 첫 번째 발제자로 나선 임진택 애국가바로잡기국민운동 상임대표는 “지금 우리 애국가에 얽혀 있는 작사자 문제는 만고의 애국자 안창호 선생이냐 친일민족반역자 윤치호냐 하는 난처한, 고약한 문제입니다”라고 말했다.
안창호(1878~1938년)와 함께 유력 후보로 거론되는 윤치호는 1866년 출생해 조선국과 대한제국의 고위직을 역임한 뒤 1911년 일본 남작이 됐다. 그 뒤 총독부 어용기관들과 합세해 한국인 청년들의 전쟁 참여를 독려하고 전쟁 수행을 위해 금전을 납부했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에 따르면, 1941년 9월 ‘임전대책 대(大)연설회’ 때 일왕이 한국인과 일본인을 하나로 바라봐주고 똑같이 어질게 대해주는 일시동인(一視同仁)을 실천하고 있다면서 이렇게 연설했다.
천황폐하의 ‘일시동인’이라 하신 성의를 봉대하여 내선일체를 주장하시는 미나미 총독은 우리 반도의 아버지라고, 우리 민족의 경애를 받고 계십니다. 미나미 총독이 총을 메고 나서라거든 총을 메고 나섭시다. 곡괭이를 메고 나서라거든 곡괭이를 메고 나섭시다. 일언이폐지하고 우리 반도 민중도 내지동포와 같이 나라를 위하여 살고 나라를 위하여 죽자고 각오합시다.
조선총독을 반도의 아버지로 부르고, 내지동포인 일본인들과 함께 나라를 위해 살고 죽자고 외쳤던 윤치호다. 그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자의 유력 후보다. 서글픈 것은 물적 자료로만 본다면, 안창호 쪽보다 윤치호 쪽이 더 유력하다는 점이다. 임진택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윤치호 작사설 측은 물적 증거가 있음을 앞세웠고, 안창호 작사설 측은 주로 전문증거를 앞세워 주장을 해왔습니다. 윤치호 작사설이 득세하게 된 것도 바로 물적 증거가 존재한다는 이유였죠.
안창호 작사설을 뒷받침하는 것은 주로 ‘누구한테서 들었다’는 내용이다. 발제에 앞서 환영사를 한 안민석 의원도 그런 전문증거 중 하나를 소개했다. 그는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따님 안수산나씨를 LA에 가서 6년 전에 만났습니다”라며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따님인 안수산나씨는, 물론 재작년에 작고하셨습니다만, ‘어릴 때 애국가를 아버지가 직접 지었다고 나한테 말씀하셨다. 집안 어른들한테도 우리 아버지가 지은 거라고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고 말했습니다”라고 소개했다.
이 외에도 ‘할아버지 비서관인 구익균으로부터 할아버지가 애국가를 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안창호 외손자 필립 안커디의 전문 증언, ‘미국에서 돌아온 안창호가 학교 조회시간마다 애국가를 부르고 있다’는 1907년 3월 20일자 <대한매일신보> 기사 등이 안창호 작사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확실한 증거는 아니다. 애국가를 불렀다고 했지, 작사했다고는 하지 않았다.
반면, 윤치호설은 문서 자료의 뒷받침을 받고 있다. 그가 친필로 썼다는 애국가 가사지가 있다는 점, 그가 ‘역술’했다는 <찬미가> 노래집에 애국가가 포함돼 있다는 점이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자료들에 대해서도 합리적 비판이 제기된다.
1955년에 윤치호 유족은 1907년에 쓰였다는 애국가 가사지를 제시했다가 최남선·주요한 등이 그 당시 애국가에는 ‘충성을 다하여’란 문구가 없었다고 이의를 제기하자 ‘1907년이 아니라 1945년에 쓴 것’이라고 입장을 번복했다.
애국가 가사 속의 ‘님군(임금)을 섬기며’가 ‘충성을 다하여’로 바뀌는 과정은 조선왕정이 무너진 뒤 한국인들이 민주공화국을 추구하며 3·1운동을 일으키는 과정을 반영한다. 1907년에 윤치호가 친필로 썼다는 가사지에 ‘충성을 다하여’가 있었다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 어색하다. 유족들이 입장을 번복한 것도 문제이지만, 정말로 윤치호의 친필이 맞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된다고 박대헌 논문은 소개한다.
또 윤치호가 역술했다는 노래집에 애국가가 포함된 것에 대해서도 반론이 제기된다. 임진택은 “윤치호 작사설 측에서는 역술이란 게 번역과 저술을 포괄하는 단어라고 강변을 합니다”라며 “하지만 역술은 ‘번역하여 기술한다’는 의미의 단일어이지 ‘번역도 하고 저술도 한다’는 복합어가 아닙니다”라고 강조했다. 자신의 저작물을 번역물과 함께 섞어 ‘역술’로 묶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으므로 ‘윤치호 역술 애국가’를 윤치호 작사설의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억지스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오염된 애국가
그래서 이 문제는 오리무중 상태다. 이 때문에, 1955년에 이 문제의 심사를 맡은 정부 당국도 모호한 입장으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해 7월 30일자 <경향신문> 기사 ‘확증 없이 무(無)결론’은 이렇게 보도했다.
애국가 작사자 규명으로 104일간을 소비하여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조사하여온 바 있는데, 28일 제3차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의 최종 회합에서 격론 끝에 ‘윤씨가 작사자로 가장 유력하다’는 결정으로써 애국가 작사자를 밝히지 못한 채 애매한 결론을 내리고 동 조사위원회는 해체되고 말았다.
‘윤치호가 가장 유력하지만 확정할 수 없다’가 결론이었다. 그래서 애국가 악보에 작사자 이름이 나오지 않게 된 것이다. 작사자 논쟁이 66년째 계속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논쟁이 장기화되는 것도 문제이지만, 이 사안이 친일파로 인한 애국가 오염을 반영한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심각하다. 윤치호설이 맞다면 작곡가뿐 아니라 작사가마저 친일파라는 말이 되어, 이제껏 열심히 애국가를 불러온 우리 국민들의 모양새가 이상해진다.
안창호설이 맞다 해도, 문제가 남는다. 친일파 유족들이 독립운동가 안창호를 밀어내고 자신들의 조상을 ‘가장 유력한 작사가 후보’로 만들었다면, 이는 독립운동에 대한 중대한 모독이다. 그리고 안창호가 진짜 작사가라고 해도, 안익태의 영혼이 애국가에 들어감으로써 생긴 문제점은 여전히 치유되지 않는다.
이런 현실은, 애국가의 위상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다. 공청회에 함께한 김원웅 광복회장은 “표절과 친일이 드러난 안익태의 애국가는 이미 생명력을 상실했습니다”라고 탄식했다.
<2021-08-15>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애국자 안창호와 친일파 윤치호, 애국가 작사가는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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