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프는 “독립운동 인정받아 토지 몰수 면해”… 아버지 최영섭은 “강제로 빼앗겨 알거지”
지난 13일 기자회견을 자처한 최재형 대선 예비후보 캠프의 김종혁 언론미디어본부장은 <오마이뉴스>가 공개를 요구한 최재형 후보 조부 최병규의 회고록 <사려와 조화>(1987년작)를 들고 나왔다. 하지만 공개한 건 원문 내용이 아니라 표지뿐이었다.
김종혁 본부장은 “유교집안에서 자란 자신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됐는지 사상적 편력을 말하면서 동시에 일제시대 자신 어떻게 살아왔는지 기록이 있다”면서 “왜 나(최병규)는 일본에 대해 적개심 갖게 됐는가. 최승현(최재형 증조부)이 장독대에 숨겨놓은 대한신문, 독립신문을 어떻게 읽게 됐는가. 왜 내가 동맹휴학을 하게 됐는가 등이 자세히 적혀 있다”라고 책 내용을 요약 정리했다.
최재형 캠프는 <사려와 조화>를 수소문 끝에 찾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원문 전문을 공개하지 않고 표지만 공개했다는 사실 때문에 최재형 후보 일가를 향한 의구심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오마이뉴스>가 조부 회고록의 공개를 요구한 핵심 이유는 최재형 증조부와 조부의 친일 행적을 밝혀보자는 게 아니다. 1938년 이후의 만주 행적을 조부 최병규가 어떻게 기록해놨는지 직접 확인해 이를 독립운동 이력으로, 독립운동가로 부를 수 있는지 검증해보자는 취지다. 하지만 최재형 캠프는 최병규가 만주로 이주한 뒤의 행적에 대해선 이번에도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았다.
후보 캠프는 현재 ‘최재형 후보가 직접 조부를 독립유공자라거나 독립운동가라고 한 적이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최재형 캠프가 운영하는 유튜브에 ‘최병규는 독립운동가’로 설명하는 영상이 링크돼 있었다는 점(17일 현재 해당 영상은 최재형TV 채널에 보이지 않는다), 정경희 국민의힘 의원이 최병규를 독립운동가라고 부르면서 지지 입장을 밝혔다는 점 등은 여전히 유권자에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검증은 여전히 필요하다.
[검증대상 ①]
최재형 캠프 “독립운동 인정받아 토지 몰수당하지 않았다”
최재형 아버지 “전답·임야를 공산당에 강제로 빼앗겨 하루아침에 알거지”
김종혁 본부장은 13일 최재형 후보의 증조부 최승현과 조부 최병규의 독립운동 이력과 월남 과정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조부와 증조부는 해방된 후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지주계급이었음에도 (북한 공산당에게) 그동안의 독립운동 경력을 인정받아 공산주의 치하에서도 토지를 몰수당하지 않았다. 반탁운동을 벌이다가 소련군이 체포를 하려고 하니까 일가족을 이끌고 월남하게 됐다.
그러나 이는 만주에서 강원도 평강으로 돌아온 과정과 해방 이후 월남 과정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관계조차 파악하지 않은 해명이다. 최재형 후보의 부친 최영섭의 회고록 <바다를 품은 백두산>에는 최재형 캠프의 해명과 180도 다른 설명이 담겼다.
필자(최영섭)의 집안에는 대대로 내려온 전답과 임야가 있었고 할아버지와 아버지 대에서 땀 흘려 모은 부동산이 많았다. 할아버지는 임야를 포함해서 약 200만 평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고, 아버지는 낙엽송 약 40만 주를 심어 놓은 임야를 가지고 있었다. 대대손손 땀 흘려 일군 전답과 임야를 공산당에게 강제로 빼앗겨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된 것이다. (최영섭 <바다를 품은 백두산> 중)
최재형 캠프는 ‘북한 공산당에 독립운동 경력을 인정받아 토지몰수를 당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정작 최재형 후보의 부친은 “전답과 임야를 공산당에게 강제로 빼앗겨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됐다”고 기록했다.
최재형 캠프가 만주로 함께 이주했다가 돌아온 것으로 설명한 증조부 최승현은 만주 여행 사실은 있을지언정 만주로 함께 이주한 사실은 없다. 만주로 이주한 이는 1938년에 만주로 먼저 간 조부 최병규와 1940년 뒤따라 만주로 간 최병규의 부인 그리고 최영섭·최응섭·최호섭 삼형제 등이다. 이들이 평강으로 돌아온 시점은 1944년 12월이었다. 최재형 캠프의 해명과 최영섭의 <바다를 품은 백두산>의 설명이 다르다.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갔다는 최병규와 그 가족이 해방되기 8개월 전에 왜 먼저 돌아왔는지는 알 수 없다. 최영섭의 회고록 <바다를 품은 백두산>에는 그 이유가 전혀 언급돼 있지 않다.
또한 ‘최병규가 반탁운동을 벌이다 소련군의 체포를 피해 일가족을 이끌고 월남했다’는 최재형 캠프의 해명 역시 부친 최영섭의 기록으로 반박 가능하다.
조부 최병규와 부친 최영섭의 월남은 1947년 2월 일이다. 북한에서 반탁운동이 벌어졌던 때는 1945년 말과 1946년 초였다. 조부 최병규와 부친 최영섭이 북한에서 은밀하게 반탁활동을 지속하다가 발각됐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당사자 중 하나인 최영섭의 회고록엔 그와 같은 언급을 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월남 이유도 전혀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소련군과 북한 공산당의 행패와 압력은 날이 갈수록 심했다. 이런 수모를 당하면서 북한에 계속 있자니 견디기가 힘들었다.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남한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최영섭 <바다를 품은 백두산> 중)
‘최병규 독립유공자 표창’ 등 <바다를 품은 백두산> 속 최영섭의 기록이 사실과 다르게 쓰여진 점을 고려했을 때, 최영섭의 증언이 실제와 다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최병규 회고록엔 왜 ‘최병규와 그 가족이 해방 전 고향으로 돌아왔는지’, ‘반탁운동으로 인한 체포 위협 때문에 월남했는지’ 기술돼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조부의 독립운동 행적에 대한 해명을 후보자 캠프에만 맡겨둘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검증대상 ②] 딱 최병규만 꼬집어 주거제한형?… 강경애-서정주 사례는 달랐다
최재형 후보 조부 최병규의 ‘1926년 춘천고보 순종 서거 상장달기 운동’과 ‘자격미달 교무주임 배척 맹휴 조직으로 인한 퇴학’에 대한 최재형 캠프의 해명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여태까지 (이와 같은 활동이) 항일운동으로 인정된 사례가 없다”라고 밝혀 <오마이뉴스>의 보도와 궤를 함께했다. 이에 대해 최재형 캠프는 “지역언론에서도 이미 인정한 사실”이라는 주장(12일)에 이어 13일에도 이런 해명을 내놨다.
최병규는 퇴학당한 후 고향에서 3년 동안 일본경찰로부터 감시를 받았다. 총을 들고 만주에 나가서 싸우지 않으면 독립운동이 아닌 건가. (…)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독립운동이다 아니다를 평가하나. 일개 시민단체에 불과한 민족문제연구소가 아니라고 하면 독립운동이 아닌 건가.
3년 주거제한형이나 금족령은 일본 당국이나 일본경찰이 취한 판결이나 조치일 수 없다는 지적에 대해 최재형 캠프는 지난 6일 “고문하라는 법이 없으니 고문이 자행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과 뭐가 다르냐”면서 요주의 인물에 대한 사찰과 감시, 행동제약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을 폈다. 맞다. 고문하라는 법이 없어도 고문을 했던 게 사실이고, 사찰과 감시, 행동제약도 있었다.
결국 일본 당국은 아버지를 퇴학 처분과 함께 강제로 고향으로 귀향시켜 평강에서의 3년 거주제한, 일명 금족령을 내렸다. (최영섭 <바다를 품은 백두산> 중)
최영섭 대령이 쓴 ‘3년 거주제한’이나 ‘금족령’이란 표현은 매우 그럴듯 하지만 실제 일제의 사찰·감시 양태와는 다르기 때문에 의혹이 제기되는 것이다. 독립유공으로 표창받은 일이 없음에도 표창 날짜까지 박아 부친을 독립유공자로 기술한 것을 고려하면 더욱 미심쩍은 대목이다.
일제는 1920년 병보석으로 석방된 김마리아와 1927년 병보석으로 석방된 박헌영 같은 요주의 인물을 사찰하거나 감시하긴 했지만, 구속 경력이 없는 인사에 대해 3년이라는 기간을 미리 정해 행동반경을 고향으로 제한하는 것과 같은 감시나 사찰은 없었다.
훗날 <인간문제> <소금> 등의 소설을 통해 식민지 여성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인물로 평가되는 강경애는 1923년 학교당국의 부당한 조치에 맞서 무려 한 달 간 맹휴를 조직하다 학교 당국에 의해 평양 숭의여학교에서 퇴학당했다. 그럼에도 이후 서울 동덕여학교로 편입하는 데 지장이 없었다. 시인 서정주는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서울 중앙고보에서 맹휴를 주도하다 퇴학당한 것은 물론 구속까지 됐음에도, 1931년 전북 고창고보에 편입해 등교하는 데 제약이 없었다.
유독 최병규에게만 일본당국이 3년간의 주거제한형이나 연금령 조치를 내렸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그래서 기자는 최영섭 회고록에 등장하는 조치는 일본당국이 내린 조치라기보다 증조부 최승현이 조부 최병규에 내린 ‘근신조치’로 해석하는 게 더 설득력 있다는 지적을 했다.
최재형 캠프는 독립운동 인정 여부와 전혀 관계 없는 지역언론 보도를 독립운동 이력의 근거로 제시한 것도 모자라 ‘민족문제연구소가 무슨 자격으로 독립운동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느냐’고 항변했다. 하지만 최재형 캠프도 독립유공자 인정 여부를 판단하는 국가보훈처와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민족문제연구소와 같은 역사연구기관·역사학자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기관·집단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검증대상 ③] 만주에서의 활동은?… “윽박이냐” 반문 말고는 정확한 설명이 없다
최재형 캠프는 13일 기자회견에서 조부 최병규의 1938년 이후 만주에서의 행적에 대해선 전혀 해명하지 못했다. <만선일보> 기사를 찾아낸 민족문제연구소의 최병규 만주 행적 추가공개를 ‘의미 없는 내용’이라고 반박하는 정도에 머물렀다.
최재형 후보의 조부가 해림가에서 조선인 거류민 대표자격으로 부촌장 맡은 건 친일파라서가 아니고 평균적으로 볼 때 꽤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던 사람이어서 대표가 된 것이다. 그러면 만주 지역에 살았던 조선인 부촌장 등은 모두 친일파인가. 그렇게 몰아가도 되나.
‘만주에서 어떤 독립운동을 했는지 밝혀야 독립운동을 했다는 주장을 수용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오마이뉴스>의 지적에 대해선 “일제에 저항해 양심적으로 살아왔던 것을 자랑스러워 한 누군가에게 독립운동 한 증거를 대라고 윽박지르는 것은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반문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조부 최병규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는지 여부가 중요한 것은 1926년의 맹휴에 대해 백번 양보해 항일독립운동으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최병규가 ‘독립운동가’로 불리기 위한 독립운동의 전문성·지속성이 확인돼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1938년 이후 만주 독립운동 사실이 인정된다면, 심지어 1930년대의 국방헌금이나 면협의원 재임, 도회의원 출마 등의 친일 의혹마저 독립운동의 현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최병규에겐 숨기거나 회피할 일이 아니게 된다. ‘국방헌금 강요 등 일제의 압박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참가했다’는 아름다운 스토리(미담)를 더욱 맛깔나게 하는 양념을 버릴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재형 캠프는 조부 최병규가 만주에서 어떤 독립운동을 했는지에 대해선 어떠한 해명도 내놓지 않았다.
최재형 후보의 부친 최영섭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역사적으로 널리 알려진 시대상황과 다른 기록을 남겼다는 점도 새삼 주목된다. 최영섭은 “만주 목단강에 위치한 해림에는 조선 땅에서 먹고 살기 힘들어 고국을 떠나온 사람들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로 붐볐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1938년 이후 만주 해림은 이미 일제가 군대를 동원해 장악한 지 오래여서 어린 최영섭의 눈에도 쉽게 보일 정도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로 붐비는 곳’은 아니었다. 당시 이곳은 독립운동가들로서는 항일무장투쟁을 벌이거나 일반인의 눈에 잘 띄지 않는 비밀활동을 할 수밖에 없는 엄혹한 지역이었다.
조부 최병규가 회고록 <사려와 조화>에서 1938년 이후 만주 해림의 상황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지, 그곳에서 어떤 독립운동을 했다고 기록해놨을지에 대한 확인 없이 검증을 멈출 순 없는 노릇이다.
김학규 기자
<2021-08-18>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검증] 최재형 일가 땅 몰수, 부친이 맞나 캠프가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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