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의 히,스토리: 라이벌 열전] 이범석 vs. 박마리아
해방 직후의 한국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했지만 그 뒤 상당히 많이 잊힌 인물이 있다. 1948년 8월 정부수립 때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이었던 이범석(李範奭, 1900~1972년)이 바로 그다. 참고로 1983년 10월 9일 미얀마 아웅 산 묘소 폭발 참사로 희생된 외무부 장관 이범석(李範錫)은 다른 사람이다.
대한제국 종결 10년 전에 태어난 이범석은 지난 8월 15일 전 국민의 환영을 받으며 사후에나마 ‘장군의 귀환’을 이룬 독립투사 홍범도(1868~1943년)의 동지였다. 봉오동 전투와 더불어 홍범도가 참여한 또 다른 대첩인 청산리대첩 때 이범석도 함께했다.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김좌진과 홍범도가 백두산 인근의 만주 땅에서 거둔 청산리대첩 당시, 만 20세의 이범석은 이 대첩의 일부인 천보산 전투를 이끌었다. 이범석의 활약상에 관해 장세윤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의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영웅 홍범도의 독립전쟁>은 이렇게 기술한다.
홍범도 부대원의 일부와 이범석이 이끄는 1개 중대는 10월 24일 저녁 8시와 9시경 두 차례 그리고 25일 새벽 한 차례 천보산 서남쪽을 지나다가 은동광(銀銅鑛)을 지키고 있던 일본군 1개 중대를 습격하였다. 이 가운데 24일의 전투는 이범석 등 군정서 부대가 수행한 전투였다. 그리고 25일 새벽의 전투는 식량을 구하러 간 소수의 홍범도 부대원들이 적을 습격하여 벌어진 전투였다.
이범석은 김원봉(1898~1958)과도 인연이 있었다. 한국광복군 하에서 김원봉은 부사령 겸 제1지대장이고 이범석은 제2지대장이었다. 이범석은 김원봉이 주목한 인물 중 하나였다. 김원봉은 이범석이 미국전략정보국(OSS) 등의 지원을 받아 해방 뒤 최고 지도자 반열에 오를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한상도 건국대 교수가 쓴 <대륙에 남긴 꿈: 김원봉의 항일 역정과 삶>은 “당시 미군 측 정보 자료에는 김원봉이 ‘일제 패망 후 OSS가 한국 문제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이범석을 전후(戰後) 한국인의 우두머리로 추대하려 한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고 파악했다”라고 서술한다.
거물이 됐지만
김원봉의 예견은 어느 정도 적중했다. 45세에 해방을 맞이한 이범석은 승승장구하면서 대통령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도달했다. 그런데 그는 결국 좌절했다. 이승만에게 두려움을 줄 정도로 막강해졌던 그는 그 뒤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 갔다. 전두환 정권 때의 이범석과 그를 구분할 수 있는 한국인들도 지금은 많지 않다.
이범석은 독립운동가 출신치고는 비교적 이례적으로 미군정과 이승만의 호응을 받았다. 이들이 그를 필요로 한 이유는 군대를 통솔한 경력이 있다는 점 외에도 더 있었다.
김원봉과 달리 우파 성향을 갖고 있었다는 점, 미군정의 후원을 받아 1946년 10월 결성한 민족청년단(족청)이 100만 이상의 회원을 보유한 사실에서 나타나듯이 조직을 결성하고 이끄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점 등이 이범석의 강점이었다. 정부수립에 앞서 1948년 8월 4일 구성된 초대 내각에서 그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이 된 데는 그런 요인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
김원봉의 예견대로 이범석은 거물이 됐지만, 이범석은 얼마 뒤 한계에 봉착했다. 이범석을 도운 요인들이 어느 순간부터 도리어 족쇄가 된 것이다. 미국은 불가피하게 그를 이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극도로 경계했다. 일반적인 보수가 아니라 극우 성향까지 띤 그가 자신이 보유한 군사 역량을 위험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약간 다른 이유에서 이범석을 경계했다. 자신을 도와 극우 청년조직을 육성하는 모습을 지켜본 이승만은 이범석이 그 능력을 바탕으로 자신까지 위협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2003년에 <역사와 사회> 제31집에 수록된 정치학자 박영실의 논문 ‘해방 이후 이범석의 사상과 정치활동’은 “이 나라에 대통령이 둘이다. 실제적인 대통령은 이범석이다”이라는 풍문이 한국전쟁 이전에 존재했다고 소개한다. 이랬으니 이승만은 한편으론 이용하면서 한편으론 견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기집권을 위한 1952년 발췌 개헌 때, 이승만은 불법적인 이 개헌을 관철할 목적으로 이범석을 내무부 장관으로 기용했다. 이범석이 경찰력을 동원해 국회를 무력화하고 개헌안을 통과시키자, 이승만은 이범석에게 책임을 돌리며 그를 토사구팽했다. ‘사냥개’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항상 경계했던 것이다.
이범석은 그해 8월 5일 대통령 선거 때 이승만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해 놓고도 이승만의 버림을 받아 낙선했다. 이승만과 경찰의 지원을 받은 부통령 후보는 자유당 후보 이범석이 아니라 무소속 함태영이었다. 자신에 대한 이승만의 견제 심리를 이범석이 절감하지 못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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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이범석에 대한 이승만의 견제는 더 거세지고, 이범석은 자유당에서 밀려 나갔다. 이범석을 따랐던 족청계(민족청년단계) 역시 정치적으로 무력해져 갔다. 이승만 정권하에서 족청과 이범석은 더 이상 빛을 보기 힘들게 됐다.
박마리아·이기붕 부부의 집요한 공격
미국과 이승만이 이범석의 힘을 뺄 때 앞장섰던 이들이 있다. 그중의 대표는 이승만 최측근 그룹의 이기붕이었다. 이범석에 대한 이기붕의 경쟁심은 이범석이 1956년 대선을 앞둔 1955년 11월 17일 경무대를 찾아가 이승만을 만나고 돌아간 뒤에 이기붕 측근들이 보인 반응에서도 나타난다.
이범석의 경무대 방문이 이승만과의 재결합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인가 하는 설왕설래가 오가는 상황에서, 자신있게 ‘아니오’라는 대답을 내놓은 이들이 바로 이기붕 측근들이었다. 1955년 11월 21일 자 <조선일보> 1면은 “자유당 주류파와 이기붕 씨 측근들은 이범석 씨의 정계 재등장은 있을 수 없다고 자신 있는 어조로 일소에 부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이범석에 대한 이기붕의 견제는 ‘부부 동반’의 양태를 띠었다. 이범석의 부인인 독립운동가 김마리아(1903~1970)와 이기붕의 부인인 친일파 박마리아(1906~1960)도 관련돼 있었다. 이 중에서 박마리아는 김마리아와 대립할 뿐 아니라 김마리아의 남편과도 직접 충돌했다. 이범석을 자유당에서 밀어내기 위해 남편 이기붕 못지않게 앞장을 섰던 것이다.
강릉에서 태어나 어릴 때 아버지를 잃은 박마리아는 가사 도우미로 일하는 어머니와 함께 가난에 시달렸다. 그러던 중 기독교인들의 도움으로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중학교 수준)와 이화여자전문학교(고교 수준)을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학사 및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의사 원용덕(1908~1968)과의 연인관계를 청산한 그는 미국 유학 중에 만난 이기붕을 배우자로 선택했다.
학위를 받고 돌아온 그는 친일파로 변신했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에 따르면, 1941년 12월 19일 자 <매일신보>에 ‘내가 본 미국 여성’이란 글을 실어, “충군애국이란 그들에게는 이해키 어려운 문구”이며 “어느 날인가 그들의 빳빳한 개인주의, 이기주의, 자존심은 머리를 굽힐 날이 단연코 있을 줄 압니다”며 미국의 몰락을 예언했다. 그는 일왕(천황)의 황은에 보답하기 위해 징병에 응하자며 대중을 선동했다.
미국 유학 경력을 이용해 ‘반미투사’로 활약했던 그는 1945년 8월 15일 이후에는 동일한 경력을 이용해 친미파로 변신했다. 남편이 미국에서 이승만을 보좌한 적이 있다는 점, 미국에서 영어 실력을 쌓았다는 점 등을 바탕으로 이승만 부인인 프란체스카 도너 리와 친분을 쌓고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서 힘을 축적해갔다. 의사에서 만주국 군의관을 거쳐 대한민국 장교로 변신한 친일파 원용덕과의 옛정을 발판으로 군부에 대해서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던 박마리아는 이범석과는 정치적 공존이 힘들었다. 이범석은 독자적 기반과 실력이 있었던 반면, 박마리아는 이승만 부부와의 친분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박마리아 같은 가신그룹은 이범석 같은 테크노크라트 그룹과 거리를 둬야 했지만, 권력욕이 강한 박마리아는 가신그룹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이상의 권력을 추구했다. 그러다 보니 이범석이 눈엣가시처럼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이 둘의 공존은 힘들었다.
박마리아는 남편을 돕는 차원에 그치지 않고, 남편과 함께 이범석 밀어내기에 앞장섰다. 민족청년단(족청) 충북지부 부단장을 지낸 신형식은 1983년 4월 15일 자 <중앙일보> ‘자유당과 내각 (34)’과의 인터뷰에서, 족청에 대한 탄압 양상을 “자유당 내 비족청계와 야당뿐 아니라 백성욱·윤치영·박마리아 등 이 박사 측근들도 가세해 있었다”고 설명한 뒤, 박마리아가 신형식 자신의 신변을 위협하는 일도 있었다고 진술했다.
신형식은 “뒤에 들으니, 나와 대립해 있던 충북 출신의 이충○ 의원이 이기붕 부인 박마리아에게 ‘신(형식)은 빨갱이’라고 얘기했고, 그 말이 프란체스카 여사한테도 전달되었다는 얘기들도 나돌았다”고 말한다. 박마리아가 프란체스카를 이용해 이승만과 이범석 그룹의 사이에 이간을 붙인 것이다.
박마리아의 대단함은 다른 데도 있었다. 그의 탐욕은 권력뿐 아니라 재물까지도 지향했다. 남편과 함께 정치활동에 여념이 없었을 그 시기에 재산 불리기에도 치중했다.
1962년 5월 2일 자 <경향신문> 기사 ‘이기붕 씨 일가의 최후’는 박마리아 집에 들어온 뇌물이나 선물과 관련해 “박마리아 씨는 성격이 세밀하고 꼼꼼해서 이러한 물건을 간수하는 데 빈틈없는 배려를 했다”며 이 집안 창고에 관해 “보통 사람이 도저히 손댈 수 없게 이중으로 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보통 사람이 도저히 손댈 수 없게 만든 그의 창고는 4월혁명 때 털렸다. 시위대는 이 집에서 은그릇·구슬방석·금십자가·목걸이·녹용 등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목격했다.
그의 재산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1960년 8월 21일 자 <동아일보> ‘이승만·이기붕 재산 대체로 판명’에 따르면, 그는 이기붕과 별도로 차명 부동산까지 갖고 있었다. 일례로, 서울시 종로구 세종로와 서대문구 북아현동에 김영운 명의의 대지 및 건물이 있었다.
미국과 이승만뿐 아니라, 이처럼 권력욕과 재산욕이 많은 박마리아와 그의 남편 이기붕도 이범석의 몰락을 부추겼다. 이범석이 감당해야 할 무게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공격을 받고 서서히 몰락해가던 이범석은 이승만 정권이 몰락한 1960년에 부활 조짐을 보였다. 4·19 직후 참의원에 당선되면서 재기의 조짐을 보인 것이다.
하지만 이듬해 5월 16일 선글라스 낀 친일 장군의 출현과 함께 그는 다시 움츠려들었다. 1963년에 국민의당을 창당하는 등의 안간힘을 써봤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러다가 1972년에 세상을 떠났다.
한때 홍범도의 동지였던 이범석은 여느 독립투사들과 달리 해방 뒤에도 승승장구했다. 그것은 그가 미군정 및 이승만 정권에 협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립투사 출신이라는 점, 극우 성향을 갖고 있다는 점과 더불어 조직 능력이 너무 출중하다는 점 때문에 미국과 이승만의 견제를 받더니 급기야 박마리아·이기붕 커플의 집요한 공격까지 받아 자유당 정권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김종성(qqqkim2000)
<2021-09-04>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이 나라에 대통령이 둘” 그 하나는 쫓겨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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