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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경제][강효백의 신아방강역고-49] 조선총독부기관지 연재 소설 ‘무궁화’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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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이광수 ‘무정’, 꽁꽁 감춰진 이상협 ‘무궁화’
꽁꽁 숨겨둔 한국사상 두 번째 현대장편소설 ‘무궁화’ 줄거리
‘무궁화’ 저자 종일매국언론인 이상협의 화려한 스팩

강효백 경희대학교 법학대학원 교수

제국주의란 식민지에 자기나라 의식의 꽃을 심는 거다. 스페인은 중남미에 카네이션 심고 네델란드는 인도네시아에 튤립 심고 영국은 미국 동부13개주에 장미 심고 프랑스는 루이지애나와 퀘백에 백합을 심고 일본은 한국땅에 일장기와 욱일기를 닮은 자국의 신화(神花) 무궁화를 심은 거다. 진리란 이처럼 심플한 거다. 진리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아주 가까이에 있다. 진리는 맛을 알고도 그 맛을 말하지 않는 혀 같다. 진리는 실천으로 간보는 것이다.

1895년~1910년 한국이 독립국이었다는 시대인식의 치명적착오가 4천리 대한영토 참절의 상징과 주문 무궁화와 애국가를 낳았다.

참을 수 없이 낭자한 벌레들이 무궁화를 장식하고 꽃 속에 그득한 벌레 소리는 피리와 퉁소를 섞은 것 같다. 무궁화는 천박한 자질에 활기도 없어 빈 골짜기에 버려지리(不禁狼藉蟲飾腹 總總已似芋混籟 薄質消沈委空谷) <정약용(1762~1836),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다산 정약용이 무궁화의 정체를 간파한 듯한 이 시를 쓴 장소는 남양주가 아니라 유배지 강진이었다. 당시 남양주는 아열대 식물 무궁화 재배가 불가능한 지역, 구한말 이전까지 한반도에서 무궁화 재배 가능지는 차령 이남 지역이었다. 1894년 청·일전쟁 전리품으로 조선의 통치권을 획득한 일본은 자국의 신화를 통치 지역에 이식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총동원했다. 종일매국노의 대부 윤치호는 무궁화를 작명하고 국화로 부각시키고 애국가 가사 후렴으로 넣어 밤낮으로 부르게 했다.

(오른쪽)1911년 일본과 일본 식민지 한국과 대만 소학교 음악교과서 1학년 첫 번째는 노래는 히로마루(무궁화 일장기)였다. [자료=강효백 교수 제공]

천양무궁(天壤無窮, 일왕영토의 무궁한 확장)을 헌법과 교육칙어에 넣은 메이지 일왕–이토 히로부미 총리는 1894년 조선의 갑오동학 혁명을 구실로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무궁화를 형상화한 군기인 욱일기를 단 일본군은 아산만과 평양전역에서 대승 후 전리품으로 대만을 할양받고 조선의 통치권을 획득했다. 조선은 갑오경장이라는 이름의 일제식 체제로 전환(경장)됐고, 일본식 용어와 문화 문물이 조선 땅에 쇄도했다.

1896년 11월 21일 이토 히로부미를 멘토로 삼고 그와 오래 전부터 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독립신문’ 주필 윤치호(이토지코)는 무궁화를 애국가의 가사에 넣고 나라꽃으로 작업을 수행했다.

1900년 고종황제는 윤치호등 종일매국노들과 일제의 압력에 못 이겨 무궁화가 수식된 관복을 정하는 칙령을 공표했다. 그러나 1906년에 이 칙령을 취소하고 원래의 오얏꽃으로 환원했다 대한제국의 각종 공문서에 표시하는 문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얏꽃 문장이 사용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부터 소네 아라스케, 테라우치 마사타케, 하세가와 요시미치까지 야마구치 출신 5명의 조선통감과 조선총독은 자기 고향 야마구치 자생종 무궁화를 한국 땅에 관념과 실물로 이식하는데 열과 성을 다했다.

데라우치 마사다케 초대 총독은 한국이 무궁화 나라 부상(扶桑) 일본의 외연확장 무궁화 지역, 즉 근역(槿域)임을 강조하고 무궁화를 홍보하고 보급하는 데 앞장섰다. 한반도 북부에서는 재배조차 불가능한 무궁화의 한국 나라꽃의 신분세탁 과정을 통하여 무궁화 삼천리 애국가 후렴으로 주입시켜 4천리 한국민의 고유 영토관에서 만주를 분리시켜 통치하는 일제 제국주의 책략의 일환이다.


너무나 유명한 이광수의 ‘무정’, 꽁꽁 감춰진 이상협의 ‘무궁화’


 

∙<매일신보>가 총독부기관지가 된 이후로는 전력을 소설에 기울인 것은 숨기질 못할 사실이다. 이상협의 『무궁화』 등 소설을 소개하여 호평을 얻었다. – 1923년 7월 『개벽』 제37호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기관지 ‘매일신보’는 1920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되기 전까지 유일한 한국어 신문이었고, 태평양 전쟁 중 두 신문을 폐간하면서 1940년부터 또다시 유일한 한국어 신문이 되었다.

매일신보는 일제 강점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하여 조선의 모습을 범죄와 성적 문란과 무질서의 아노미적 상황으로 묘사했다. 사회면의 고발기사는 주로 여인의 일탈에 집중되었다. 문화면에는 한국인의 시공에 생소한 무궁화를 선전하고 널리 홍보했다.

1918년 매일신보는 아주 독특한 제목과 형식의 소설을 연재한다. 1918년 1월 25일부터 7월 27일까지 122회에 걸쳐 연재된 한국문학사상 두 번째 장편소설 하몽 이상협(1893~1957년)의 ‘무궁화’다. 이는 1917년 1월 1일부터 6월 4일까지 126회에 걸쳐 연재된 문학사상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인 춘원 이광수 ‘무정’의 후속작이다. 즉 ‘무정’과 ‘무궁화’는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서 연재된 한국문학사상 첫 번째와 두 번째 장편소설이다.

‘무궁화’와 ‘무정’의 작자 둘다 친일인명사전 등재인물이다. ‘무궁화’와 ‘무정’은 1남 2녀의 삼각관계를 그린 소설로 일제강점기 최고의 인기 장편소설이다. 공교롭게도 두 소설의 여주인공의 직업은 모두 기생이다. 유교적 여성상을 왜곡시켜 일본 제국주의를 위한 현모양처론에 끼워 맞추는 매일신보의 여성정책은 ‘무궁화’와 ‘무정’에서 보여지는 여성의식의 근간이 됐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않은가? ‘무정’은 너무도 유명하지만 ‘무궁화’는 소설의 존재 자체도 모른다. 왜 ‘무궁화’와 그 작자 이상협은 꽁꽁 숨겨왔던 것일까?

무궁화, 한국의 국화 격이고 국가와 국장 대통령휘장, 최고훈장 국회의원 뱃지 국회와 법원 휘장등 대한민국 국가상징 독점 지배사물 무궁화를 제목으로 한 일제강점기 소설인데 더욱더 홍보해야 하지 않을까? 소설 ‘무궁화’의 주인공과 줄거리는 무엇이며 ‘무궁화’의 작자 이상협은 도대체 누구인가?

(왼쪽) 상협, 『무궁화1』 초판, 1918년(大正)7년 3월, 200쪽, 이상협이 1917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소설 「무궁화」를 필사한 책으로 ‘아버지의 유언’, ‘옥뎡이와 진국이’, ‘사랑의 봉오리’, ‘이돈, 이소년’, ‘대담한 흉계’, ‘의외의 편지’ 순으로 총 6회가 수록됐다. 주식회사 조선상업은행(朝鮮商業銀行)에서 발행한 인찰지에 필사한 것으로 국한문혼용. 오침선장(五針線裝)함. 국한문혼용 세로쓰기 (오른쪽)이상협, 『무궁화』(2판), 박문서관, 1924년 10월 6일 매일신보 조선일보 동아일보 대형신문광고.[자료=강효백 교수 제공]

꽁꽁 숨겨둔 한국사상 두 번째 현대장편소설 ‘무궁화’ 줄거리


양보심 많은 기생 무궁화와 양반집 딸 김옥정, 그리고 사랑방 손님 심진국 등 두 여인과 한 남자의 삼각관계를 그린 무궁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김교리의 딸 옥정은 계모 홍씨의 냉대를 받지만 김교리의 자상한 교육으로 현숙한 여성으로 자란다. 어느날 김교리는 옥정과 사랑방에 기거하던 심진국을 불러 둘이 정혼한 사이였음을 알리고 세상을 뜬다. 그때부터 옥정과 심진국은 서로를 마음에 둔다. 몇해전 사립문 밖에 심어둔 무궁화 나무가 서로의 마음을 교감할 할 수 있는 장소가 된다.

계모 홍씨는 옥정을 송관수라는 불량배에게 시집보내려고 사촌동생 홍명호와 짜고 지속적으로 위협을 가한다. 어느날 밤, 옥정은 이 셋이 심진국을 해치기 위해 모의하는 것을 엿들었고 그 사실을 영리한 강아지 오월을 통해 심진국에게 알렸다. 그러자 심진국은 파혼하자는 편지를 무궁화 가지에 매달아 놓고 경성으로 도망쳤다. 심진국은 약장수를 하다가 기생 무궁화(본명: 미상)와 관계를 맺고 결혼을 전제로 동거를 시작한다.

한편 심진국을 잊지 못한 옥정은 남장을 하고 애견 오월이를 데리고 경성으로 향한다. 갖은 고생 끝에 경성에 도착한 옥정은 뒤를 쫓아오던 송관수와 홍명호를 피해 오월이를 밖에 두고 여학교로 피신한다. 옥정은 그곳에서 만난 기생 무궁화와 자매처럼 지내며 무궁화의 권유로 여학교에도 입학한다. 결국 오월이를 통해 심진국과 옥정, 무궁화가 한자리에 모이게 된다. 무궁화는 그간의 사연을 모두 듣고 사랑하는 남자 심진국을 양반집 딸 옥정에게 양보하기로 한다. 이후 심진국과 옥정은 결혼하고 일본의 와세다 대학으로 유학가고, 무궁화는 강아지 오월이를 데리고 기생 생활을 계속한다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무궁화’는 한국 유일무이한 무궁화가 제목이며 여주인공의 이름도 무궁화라는 기생이다.

최초의 소설이자 시공에 극히 생소한 무궁화를 배경으로 등장시키고 주인공 기생 이름도 무궁화다.

기생 무궁화는 자신의 남자를 양반집 규수 옥정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옥정의 애견 오월이와 함께 사는 터무니 없는 이야기는 공전의 히트를 쳤다.

전례없는 인기를 구가한 ‘무정’에서처럼 여자 둘과 한 남자로 이루어진 삼각관계가 등장하는 소설이다. 연재 도중 작가(이상협)가 병으로 연재를 거르자 독자의 문의나 항의가 있었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이상협, 『무궁화』 3판 신문관, 1936년, 『무정』과 쌍벽을 이룬 일제강점기 최고인기 장편소설[자료=강효백 교수 제공]

‘무궁화’ 저자 종일매국언론인 이상협의 화려한 스팩


이상협(1893년~1957년) 조선총독부 기관지<매일신보>발행인, <동아일보> 초대 발행인, <조선일보> 이사.[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무궁화’의 작자 이상협은 누구인가?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출간한 ‘친일인명사전’ 2권의 907~909쪽을 살펴본다.

한국 언론사상뿐만 아니라 세계언론사상 이처럼 화려한 스팩을 자랑하는 언론인이 또 있을까?

1912년(19세)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기자로 입사
1915년(22세)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사회부장
1918년(25세)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발행인겸 편집인
1920년(27세) 조선총독부 발행인가 2253호 ‘동아일보’ 초대 발행인 겸 편집인겸 편집국장겸 논설실장 겸 사회부장겸 경리부장
1924년(31세) 조선총독부 발행인가 2249호 ‘조선일보’ 이사 편집국장
1926년(33세) 친일신문 ‘시대일보’인수하여 ‘중외일보’ 창간
1933년(40세) ‘주식회사 매일신보’ 부사장, 만주국 기관지 ‘만몽일보’ 고문
1935년(42세) 조선인 최고 보도인 조선총독 표창장 수여
1938년(45세) 매일신보 자매지 ‘국민신보’ 발행인
1949년(56세)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
1954년(61세) ‘자유신문’ 부사장


25세 이상협을 매일신보 발행인, 동아일보 초대 발행인으로 만든 소설 ‘무궁화’


하몽(何夢) 이상협은 1893년 6월 11일 서울 종로구 누상동에서 계리사 이용우와 종일매국노 고영희(1)*의 누이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상협은 보성중학교를 거쳐 관립 한성법어(프랑어학교)를 수료한후 1909년 일본에 건너가 게이오 대학에서 2년간 수학하였다. 1912년 일본에서 귀국하여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입사하여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물론 그가 조선총독부 기관지에 입사한 것은 그의 외숙인 종일매국노 고영희의 배경 덕분이었다.

만 19세의 이상협은 1912년 매일신보에 일본 유명작가 와다나베 가테이(渡辺霞亭)의 ‘상부련’을 번안하여 ‘재봉춘’을 연재했는데, 이는 후일 연극으로 무대에서 상연되기도 했다. 1914년 일본 작가 쿠로이와 루이코(黑岩淚香)의 ‘사소주’를 번안해 ‘정부원’을 연재했다. 이상협은 1915년 6월 지금의 사회부장에 해당하는 매일신보의 연파주임에 선임됐다.

입사 3년만에 매일신보 사회부장으로 승진한 이상협은 1916년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쿠로이와가 번안한 『암굴왕』을 재번안하여 ‘해왕성’을 연재했다.

이상협은 일제하의 기자로 최고의 귀재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명성을 남긴 것은 1918년 1월 25일부터 7월 27일 매일신보에 ‘무궁화’를 연재하면서부터다.

‘무궁화’ 연재를 마친 다음 달 1918년 9월 매일신보 발행겸 편집인이 됐다. 약관 25세 식민지 청년이 입사 6년만에 조선총독부기관지 매일신보의 총수가 된 비결은 ‘무궁화’덕분이다.

1920년 1월 ‘동아일보’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같은해 4월 ‘동아일보’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았고 동시에 편집국장으로서 사회부장 정리부장 논설실장을 겸했다.

‘동아일보’ 1920년 4월 1일 창간호를 1면부터 8면까지 무궁화로 온통 도배했다.

간단히 말하면 이상협은 19세 어린나이로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기자로 입사하고 22세 사회부장으로 승진했다. 이후 25세 무궁화 연재로 무궁화 선전 홍보의 공을 더하여 ‘매일신보’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식민지 조선의 언론계의 패자로 군람한 데 이어 27세 ‘동아일보’ 초대 발행인겸 편집인겸 논설실장으로 올라섰다. 이렇게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는 그의 외삼촌 악질 종일 매국노 고영희의 막강한 인맥과 후원 덕분이다.

1924년 9월 ‘조선일보’ 이사와 편집국장을 지냈다. 1926년 9월 민족반역자 최남선이 발간한 ‘시대일보’를 인수하여 ‘중외일보’로 제호를 바꾸고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그리곤 1927년 2월 27일 ‘시대일보’는 “근역은 일본의 이칭”이라는 사설을 싣는다.

1929년 10월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33년 7월 조선총독부 주도로 윤치호 등으로 조직된 중앙진흥협회 이사를 맡았고 8월에 만주 신징(지금의 장춘)에서 창간된 ‘만몽일보’ 상담역(고문)에 선임됐다. 같은 해 10월 ‘매일신보’ 부사장 겸 이사에 임명되었다.

1935년 10월 조선총독부시정25주년기념 우가키 가즈시게 조선총독(2)*으로부터 최고 보도인 표창을 받았다. 표창 이유는 19년 동안 한글 신문사를 전담하면서 오직 “오직 전심전력을 다해 한 뜻으로, 때로는 언론에서 때로는 문장으로 반도 민중에게 총독정치를 철저히 이해시킴으로써 그 오해를 제거하고 내선인의 융합에 노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통치의 진상을 선명하게 밝혀줌으로써 조선 문화의 개발과 그 향상에 노력하는 등 조선통치를 위해 공헌한 공적이 실로 크다”는 것이다.

1937년 5월 조선가요협회를 개편한 조선문예회문학위원장으로 취임하고 같은 해 7월 경성군사후원연맹 위원으로 활동했다. 이 연맹은 중일전쟁 개전 이후 “일반 국민에 대한 황군 원호 철저, 응소 출동이나 개선 군인의 환송·접대 등의 활동으로 군인의 사기를 위해 조직되었다.

1937년 8월 경성군사후원연맹위원으로 봉직했다. 이 연맹은 중일전쟁 개전 이후 “일반 국민에 대한 황군 원호철저, 응소 출동이나 개선 군인의 환송·접대 등의 활동으로 후방에서 군인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조직됐다.

1938년 2월 조선지원병제도제정축하회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같은 달 조선 내 일간신문 25개사로 조직된 조선춘추 발회식에 ‘매일신보’ 대표로 주도했다. 또 같은 달 조선총독부 사회교육과에서 내선일체의 강화 철저를 도모하기 위해 3개년 사업으로 국어(일본어)보급반 민간 편찬위원을 맡았다.

1938년 12월 ‘매일신보’ 자매지 ‘국민신보’ 발행인을 맡았다. 1939년 7월 조선총독부 기관지 ‘총동원’의 편찬위원으로 활동했다.

1940년 ‘총동원’ 제2권 제6호에 기고한 “시국과 보도기관의 사명”에서 언론매체 종사자를 한 사람의 황국의 병사로 정의하고 한 개의 포탄은 적진지의 한 지점을 파괴하는데 그치는 것이지만 우리의 보도가시의 1행은 확실하게 전세계로 영향을 미치는 바가 있음을 명심하는 것이다.

해방후 1949년 2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 1954년 ‘자유신문’ 부사장을 지내다 1957년 1월 14일 사망했다.


드골치하의 프랑스였다면 이상협은 어떻게 되었을까?


1944년 8월 25일 프랑스가 나치 점령에서 해방됐다. 프랑스 사법부는 나치 부역자 6763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부역언론인이나 문인에 대한 형량이 무거웠다. 694종의 신문·잡지가 폐간·몰수됐고, 친독잡지 ‘오토’의 사주인 알베르 르쥔 등 편집인과 주필 5명이 처형됐고, 7명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받았다. 드골은 말했다. “프랑스가 다시 외세의 지배를 받더라도, 또다시 민족반역자가 나오는 일을 없을 것이다.”

한국엔 드골이 없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해체시켰고, 백범 김구는 민족반역자를 처단하고 해방된 조국의 분단을 막으려다 살해됐다. 프랑스의 드골 치하였다면 이상협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의 출세작 <무궁화>… 더 이상 할 말을 잊었다.

최악의 종일매국정치인은 이완용(초기독립파, 친러파)이 아니라 시종일관 뼈속까지 종일매국 윤치호이듯 최악의 종일매국언론인은 이광수 최남선(둘다 초기 독립파)이 아니라 시종일관 뼈속까지 종일매국 이상협이다.

자료=강효백 교수 제공]

◆◇◆◇◆◇◆◇◆◇주석

(1)*1849~1916년 정미칠적 경술국적 자작 중추원 고문 『친일인명사전2권』 151-153쪽
(2)*우가키 제6대 조선 총독, 오카야마현 출신. 경제 개발 정책을 표방하면서 한국어 시간을 축소시키는 등 문화 말살 정책의 초석을 다졌다.

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

<2021-03-11> 아주경제 

☞기사원문:[강효백의 신경세유표-48] [강효백의 新아방강역고-49] 조선총독부기관지 연재 소설 ‘무궁화’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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