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일본 산업혁명유산 시설에 동원된 한국의 피해자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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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심포지엄 요지]

일본 산업혁명유산 시설에 동원된
한국의 피해자 증언

김승은 학예실장

지난 9월 18일, 일본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가 주최한 “산업유산정보센터를 묻다-7.22 유네스코 결정이란?”이라는 심포지엄이 열렸다. 제목에 나오는 “7.22 결정문”이란 제44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일본 정부가 ‘메이지 일본 산업 혁명 유산’에 관한 권고를 ‘완전히 이행하지 않은 것은 지극히 유감’이라며 채택한 결정문을 말한다. 이 결정에 앞서 유네스코와 이코모스(ICOMOS)는 일본의 산업유산정보센터를 시찰하였다.
그리고 ‘의사에 반해 동원되어 강제로 노역한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한 해설이 충분하지 않다’,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적절한 전시가 없다’, ‘전체 역사에 관한 해설에 있어서도 비슷한 역사를 가진 다른 산업유산과 비교해 볼 때 강제 노역과 군사 목적으로 사용됐다는 사실이 충분히 설명된 국제적 모범 사례에 미치지 못 하고 있다’, ‘(한·일 간에) 향후 대화가 중요하며 추구되어야 한다’라고 결론지었다. 일본 정부는 그 동안 ‘약속한 조치를 포함해 성실히 이행해 왔다’고 했지만 유네스코는 이를 정면으로 비판하였다.
따라서 이번 심포지엄은 산업유산정보센터의 전시를 유네스코 결정에 따라 개선하라고 촉구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온라인으로 진행된 이 심포지엄에서는 유네스코 결정문의 채택 배경과 의의, 산업유산정보센터의 문제점 등을 주제로 4개의 발표가 있었다. 그 가운데 김승은 학예실장이 발표한 ‘일본 산업혁명유산시설에 동원된 한국의 피해자 증언’을 요약해 소개한다. 이 발표문은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특별전을 위해 일본의 산업유산 시설에 동원된 피해자 구술 기록의 조사와 공개 과정에서 파악한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기록의 현황과 문제점, 피해자 증언이 밝힌 산업유산 속 강제동원의 실상을 다루고 있다.

1. 피해자의 ‘목소리’전을 개최하다

서울 용산의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는 특별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가 그것이다. 제44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개최일에 맞춰 개막한 이번 전시는 일본의 산업유산정보센터 전시의 문제점을 알리고, 강제동원·강제노동 부정론에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기획되었다. 이번 전시의 특징은 강제동원 피해자의 생생한 증언 영상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연구소가 수집해 온 강제동원 피해자 증언과 함께 한국 정부가 수집 생산한 증언영상을 최초로 공개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전시 기획의 출발은 20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의 산업혁명유산 등재 당시에도 한일 시민사회와 생존 피해자들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이 “피해자의 목소리가 사라진, 역사 왜곡의 현장”이라는 점을 가장 크게 비판하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식민지배로 인한 노무동원의 ‘강제성’을 부인하였다. 그리고 산업유산 등재 후 이러한 입장은 더욱 강화되었다. 2017년 12월에 개설된 ‘THE TRUTH OF GUNKANJIMA 軍艦島の眞實(군함도의 진실)-朝鮮人徵用工の檢證(조선인징용공의 검증)’ 웹사이트는 강제동원·강제노동을 부정하는 논리를 더 노골적으로 전파․유통시키고 있다. 이 사이트의 운영주체는 산업유산정보센터의 운영을 맡고 있는 산업유산국민회의이다. 산업유산의 “전체 역사”를 해설하는 전략을 마련하고 국내외 홍보와 교육을 담당하는 단체가 오히려 조선인 강제노동 문제를 ‘검증’하겠다며 강제동원의 역사를 부정하는 주장을 전파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호응하는 한국의 <반일종족주의>의 출간(2019) 또한 한국과 일본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연구자’로 자칭하는 이 책의 저자들은 피해자들이 직접 겪은 피해 사실에 ‘합리적 의심’을 제기하고 피해자의 증언을 ‘거짓말일 가능성이 큰 주장’이라고 일축하였다. ‘길거리 무단
납치와 같은 강제동원은 없었다’, ‘작업 배치상의 민족차별, 임금차별은 없었다’, ‘숙련도와 능력의 차이만 있었다’, ‘임금을 전혀 받지 못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라는 주장도 펼쳤다. ‘강제동원·강제노동이라는 신화’는 “1965년 이후 총련계 학자들이 만들어낸 엉터리 학설”이고 이 잘못된 통념을 그대로 반복한 거짓 연구들이 거짓 재판(2018년 일본제철 징용공 대법원 판결)까지 나오게 만들었다는 궤변으로 피해자들을 또다시 모욕하고 새로운 가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2. 한국의 피해자 증언자료를 조사하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2019년 12월 13일 <한일뉴라이트 역사부정을 검증한다>라는 주제로 한일공동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필자는 이 심포지엄에서 강제동원 부정론에 대한 대응으로 한국의 강제동원 피해자 증언을 종합적으로 분석하는 시도를 하였다.
1 국가의 과거청산 작업을 통해 ‘공식화’된 피해자의 ‘증언’이 강제동원의 ‘진상’을 어떻게 복원하고 있는지를 밝히기 위해서였다. 분석대상은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자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포함, 이하 ‘강제동원위원회’)가 수집·공개한 증언자료들이다.


1 김승은, 「피해자의 증언은 무엇을 ‘증언’하는가」, <한일뉴라이트 역사부정을 검증한다> 한일공동심포지엄 발표문, 2019

 

 

2004~2015년까지 활동한 강제동원위원회는 3차에 걸쳐 피해신고 228,126건을 접수하였고, 실제 조사 완료된 226,583건 가운데 218,639건의 피해자 인정 판정을 하였다. 그 가운데 약 68.13%(148,961건)가 노무동원 피해자이다. 그러나 “강제동원 피해 사실만 인정될 뿐 동원 유형이나 일시, 장소가 전혀 확인되지 않는 경우도 많고, 관련 자료의 부족으로 피해 판정이 불가능한 경우도 6,000여 건이 넘었다.” 2 그중에 노무 피해 신고자 5,213명이 판정불능을 받았다는 것은 노무동원 피해를 입증할 관련 기록이 얼마나 부족했는지를 보여준다. “피해조사가 완료된 노무자약 15만 건 중 ‘작업장 등이 확인되지 않은 채 처리된 경우’가 78,000건(52%)이나 되었기 때문에 피해 조사를 상호 보완하는 진상조사가 반드시 수행되어야” 했다.3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피해 당사자와 관련자의 증언은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강제동원위원회는 강제동원의 다양한 역사상을 확인하기에는 부족한 기록의 부재를 메우고, 기록 이상의 가치를 가진 자료로서 피해당사자의 증언을 매우 중요하게 취급하였다. 4 강제동원위원회는 강제동원 피해자 중에 생존피해자로 인정받은 43,712명을 대상으로 구술 채록을 진행하였다. 강제동원위원회 설립 초기 3년에 집중적으로 생산된 생존자 구술은 총 2,021건이다. 5 생존피해자의 4.6%에 그친 미미한 성과지만 단일 주제로서 방대한 수집 분량임에는 틀림없다. 그 가운데 219건의 증언을 선별하여 노무동원 9권, 병력동원 4권, 여성동원 2권, 국내동원 1권 등 16권의 구술기록집을 발간하였다.6
구술기록집에 실린 노무동원 피해자는 모두 110명이다. 이들의 동원 시기는 1942년(20명), 1943년(37명), 1944년(31명), 1945년(10명)에 집중되어 있다. 1942년부터 국외 동원자 수가 증가하여 1944년 급증하는 추이와 다르지 않다. 동원 당시 나이는 10대(만13세~19세) 66명, 20대(만20세~29세) 42명이고, 30대(만32세)도 2명이 있었다. 이들의 증언은 다양한 강제동원의 역사상을 보여주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강제동원’ 하면 연상되는 ‘인간사냥’, ‘노예’, ‘감옥살이’ 등의 체험과 기억은 보편적이고 광범위하였다. 피해자들은 자신의 처지를 ‘노예’ ‘죄인’ ‘개돼지’ ‘우물안에 갇힌 고기’ ‘감옥에 갇힌 죄수’라고 표현했고, 그들에게 강제동원이란 가라면 가야 하는 거부할 수 없는 형벌 같은 것이었다.


2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자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위원회 활동 결과보고서>, 2016, 182쪽
3 <위원회 활동 결과보고서>, 2016, 185쪽
4 피해자의 구술기록은 생산부터 철저한 기획을 바탕으로 하였고, 관리와 활용의 편의성, 조사업무에 활용할 수 있는 디지털아카이브 구축, 구술기록집 출판과 영상제작물 등의 활용까지도 염두에 두고 구술자료를 생산 수집했다고 한다(권미현, 「강제동원 구술자료의 관리와 활용」, <기록학연구> 16, 2007, 308쪽).
5 <위원회 활동 결과보고서>, 2016, 441쪽
6 <위원회 활동 결과보고서>, 2016, 442쪽

 

3. 피해자의 증언을 통해 강제동원의 진상을 분석하다

구술기록집으로 공개된 증언기록 가운데 일본의 산업혁명유산 관련 증언은 12건이다. 그 외에 강제동원위원회의 진상규명 조사보고서에도 일부의 증언 15건이 소개되었다.7 12명의 피해자는 동원 당시 10대가 6명, 20대가 6명이었다. 동원경위를 보면 일본에서 현원징용된 경우(배한섭, 17세, 1943.4, 미쓰비시 나가사키조선소/손중구, 20세, 1943.4, 미쓰이 미이케탄광)를 제외하고는 구장이나 면장, 순사가 지목하면 그대로 동원되었다고 회고하였다. 지역마다 할당된 인원을 모집할 때는 강제력을 동반하였다.(임원재, 20세, 1942.3, 미쓰비시 나가사키조선소/김치룡, 24세, 1943.8, 사할린→다카시마탄광/정복수, 16세, 1943, 사할린→다카시마탄광) 김종술(19세, 1944.2, 나가사키조선소)은 9살에 양자로 간 신세로 생계를 위한 다른 선택지가 없는 상태에서 일찍 돈을 벌기 위해 모집에 응하였다. 집안의 보호나 후원을 받지 못하는 고아나 편부모의 자제들이 이런 식으로 동원에 응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미 도일(渡日) 경험이 있던 문갑진(23세, 1941.10, 사할린→하시마탄광)은 일본을 ‘동경’해서 대구직업소개소 광고를 보고 모집에 응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일본에 미쳤어도 사할린 지하탄광에 탄 캐는 일인 줄 알았으면 안갔을 것’이라고 후회하였다.
동원을 위해 회유가 통하지 않으면 협박이 이어졌다. 어린 이천구(16세, 1942.9, 야하타제철소)도 순사, 면서기가 ‘징용에 징발되었으니까 며칠까지 면사무소로 오라’고 해서 동원되었다. 도망가면 부모들이 고통을 당하니까 거부할 수 없었다. 마을에서 15명이 출발해 부산에 도착하니 도별로 모은 인원이 3,000명이었다. 이들이 1942년 9월 도착한 곳은 일본제철주식회사 야하타제철소였다.
노골적인 회유와 협박으로도 노무동원의 할당량을 채우지 못했을 때는 극단적 방법(납치)이 동원되었다. 아버지 심부름 가던 길에 손용암(16세, 1943.11, 사할린→다카시마탄광)은 속초역 앞에서 경찰에 연행되어 끌려갔다.
면이나 군 단위로 징집되어 적게는 20명, 많게는 200명이 같은 곳으로 연행되는 경우도 많았다. 대규모 작업장이 대부분인 일본 산업유산 시설들에 동원된 조선인들은 대부분 일본어가 능통하지 못했기 때문에 눈치껏 알아서 일을 해야 했다. 기술훈련은 없어도 작업장 내 규율 확립을 위한 군사훈련은 있었다.
노동시간은 주로 8시간~12시간, 주야 2교대, 탄광의 경우는 3교대였다. 매일 정해진 채탄량, 7 이들 증언이 실린 구술기록집은 <똑딱선 타고 오다가 바다귀신 될 뻔했네>(2006), <지독한 이별, 사할린 이중징용 진상조사 구술기록>(2007) <내 몸에 새겨진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강제동원 피해자의 원폭체험>(2008) 등이다. 피해자 증언 조사가 실린 보
고서는 <히로시마 나가사키 조선인 원폭피해 진상조사>(2011), <사망기록을 통해 본 하시마 탄광 강제동원 조선인 사망자 피해실태 기초조사>(2012) 등이다.

 

작업량을 채우지 않으면 급료가 깎이거나, 갱 안에서 나올 수 없었다. 숙소는 감시가 없더라도 외부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고, 용돈 정도의 급여가 지급되었지만 외출할 정도의 여유는 없었다. 그래도 외출을 한다면 먹을거리를 찾는 것이 일이었다.
사할린에서 전환배치된 김치용, 손용암, 정복수, 문갑진, 황의학(21세, 1942.8, 사할린→하시마탄광)은 식량사정이 더 열악했던 다카시마, 하시마의 생활을 지옥 같은 괴로움으로 기억하였다. “사할린에서는 죄인 취급하더니, 나가사키에서는 개돼지 취급했다.”는 말 한마디가 그들의 고통을 대변하였다.
탈출의 가장 큰 동기는 배고픔이었다. 이천구는 1943년 배가 고파 식당에서 밥을 훔쳐 먹고 탈출해 근처 공장 잡부로 몸을 숨겼다. 청년 노동자가 부족했기 때문에 도주한 노동자들이 숨어들 작업장은 늘 주변에 있었다. 다시 잡혀 오거나 도망치는 일이 반복되고 있었고, 어디선가는 죽고 다치는 일이 반복되었다.
산 자의 증언과 마찬가지로 죽은 자의 기록(사망기록) 또한 강제동원의 실태를 밝히고 있다. <사망기록을 통해 본 하시마 탄광 강제동원 조선인 사망자 피해실태 기초조사>에 의하면 강제동원된 조선인이 하시마에서 사망에 이른 1차 원인은 ‘강제동원’이며 2차 원인은 ‘열악한 노동환경’ 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조사보고서에 실린 15명의 생존자 증언은 이러한 사망실태를 뒷받침하고 있다. 다수의 생존자는 하시마탄광에서 살벌한 감시와 잦은 구타를 증언하였다. 또한 탄광의 굴이 자주 무너져 죽거나 다치는 사람이 많았다는 증언도 반복된다. 섬이기 때문에 탈출이 어려웠으나 도망을 시도했고 대부분 잡혀와 모진 고문을 당했다는 회고는 왜 하시마가 지옥섬, 감옥섬이라고 불렸는지를 증언하고 있다.

4. 다시 피해자 기록을 조사하다

12명의 증언은 일본의 산업유산과 관련한 다양한 강제동원 피해를 이야기해 주고 있다. 하지만 강제동원위원회는 15만 건의 노무동원 피해조사와, 4만 3천여 명의 생존자 진술청취, 그 가운데 2천여 건의 구술기록을 수집 생산한 바 있다. 훨씬 많은 일본 산업유산에 동원된 피해자의 증언기록이 아직 공개되지 않았을 뿐이다. 고령의 피해자가 급격하게 사망하고 있는 지금 구술자료의 ‘기록화’ ‘역사화’는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8 그렇다면 일본 산업유산 관련 피해신고자의 전모는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구술기록집으로 공개된 증언 219건 외에 2천여건의 증언기록은 현재 어디에 보관중이며, 왜 공개되지 않고 있을까. 연구소는 전시에 공개할 증언영상 등의 기록물을 확보하기 위해 먼저 피해자 기록물의 소장 현황 파악에 나섰다.


8 한국정부가 43,712명의 생존 피해자에 대한 지원을 시작한 지 10여 년이 지난 올해 1월, 생존자는 5%수준인 2,400여 명으로 급감한 사실이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의 정보공개청구로 알려졌다(“시간이 없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 생존자 급감…1년만에 740명 별세, <News1> 2021.3.3.).

 

2015년, 일본의 산업유산 등재 당시 관련 시설에 동원된 피해자에 대해 많은 관심이 쏠렸다. 그러나 피해실상을 밝혀 줄 강제동원위원회는 그해 연말에 활동을 종료하였다. 위원회 종료와 함께 강제동원 피해조사와 진상조사 관련 기록물들은 일반에 공개되지 않고 그대로 3개 기관으로 흩어져 버렸다. 피해신고 조사기록철·명부 등 문서기록물과 동영상 등의 시청각자료는 국가기록원에, 박물기록은 부산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 이관되었다.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 지원단은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에 대한 위로금 지급 업무를 위해 위원회의 피해진상관리시스템과 같은 디지털아카이브에 등록된 데이터형태의 기록들을 이관받아 업무에 활용하고 있다.9자료의 분산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현재 관련 자료는 모두 비공개이다. 10 또한 3개 기관별 기록물 관리시스템이 다르기 때문에 피해자 정보의 통합 검색 또한 불가능하다. 사실상 산업혁명유산 관련 피해신고자 파악은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이다. 그래서 이번 전시회는 산업유산 관련 피해자 파악과 관련 자료 공개의 단초를 열기 위한 시도이기도 했다. 이번 전시에 공개된 피해자 증언은 한국 강제동원 피해자 증언자료(영상·음성)의 분포와 소장 현황을 그대로 반영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첫 번째로 활용한 자료군은 민족문제연구소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유족단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가 소장한 증언자료이다. 연구소가 강제동원 진상규명 활동을 하면서 수집한 것이다. 김규수, 주석봉, 최영배 씨는 일본제철을 상대로 한 한국소송의 원고들이다. 연구소는 소장과 원고진술서 작성을 위해 이들을 심층 면담했다. 김성수, 김한수, 배한섭 씨 역시 미쓰비시중공업를 상대로 제기한 한국소송의 원고이다. 이번 전시에는 강제동원위원회에서 수집한 증언영상을 활용하였지만, 연구소가 소송 관계로 교류한 분들께 이용 동의서를 직접 받아 국가기록원이 소장한 구술영상을 공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최장섭 씨는 메이지산업혁명유산 등재 후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의 정보 제공으로 2016년 인터뷰를 진행했다. 두 번째로 활용한 자료군은 강제동원위원회가 수집한 피해조사 관련 증언자료이다. 모두 7건인데, 강제동원위원회 구술기록집에 공개된 김성수, 김한수, 배한섭, 이천구, 정복수 씨와 <
사망기록을 통해 본 하시마 탄광 강제동원 조선인 사망자 피해실태 기초조사>에 소개된 이정옥 씨11, 그 외에 증언이 공개되지 않은 피해자 손중구 씨이다.12


9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지원과의 주요 업무는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에 대한 위로금 등 지급 심사,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및 일제강제동원역사관 운영 지원·관리, 일제강제동원 관련 피해 진상 조사·연구, 관련 기록물 수집, 국외 추도사업 지원 등이다.
10 피해 당사자나 유족이 직접 열람신청을 하는 경우 피해신고 조사기록의 사본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국가기록원이 원래 소장하고 있던 강제동원 피해자 명부와 위원회에서 이관 받은 추가 수집 명부는 현재 데이터베이스화가 진행중이며 목록과 사본을 제공하고 있다.

11 이정옥 씨(1926년생)는 1942년 봄 일본인 형사 2명에게 붙잡혀 17세에 하시마탄광으로 강제연행되었다. ‘숙소와 여건은 모두 개, 돼지 같은 생활’이었고, ‘생활 자체가 모두 비인간적이었다’, 혹독한 구타에 시달렸고, ‘적은 액수의 돈을 받은 것 같은데, 배가 고파서 주로 먹을 것을 사먹는데 썼다,’ ‘굴이 무너져 죽은 사람이 많고, 죽으면 발굴되지 않았다,’ ‘고향에 돌아오니 부친이 돌아가시고, 죽으로 연명하고 있었다’ 등 피해사실 진술이 매우 구체적이다.

12 손중구 씨(1923년생)는 1943년 4월 삼형제 중 1명은 징용을 가야 한다는 경찰의 지목으로 미이케탄광으로 동원되었다. 채탄작업과 갱이 무너지지 않게 나무로 받치는 일을 하였다. 당시 조선인 노무자가 수백 명이었고, 100명 씩 대대, 25명씩 소대로 편성했다. 사고로 다리를 절단하게 된 동료도 있었다. 월급은 조금 받았으나 충분히 쓸 정도는 아니었다, 인근 연합군포로수용소가 있었는데, 포로들이 몇 명씩 죽어나갔다고 증언했다.

 

 

15여 년 전 피해신고서에 남은 옛 주소지로 편지를 보내거나 전화연락이 겨우 닿은 분들께 이용 동의서를 받은 덕분에 피해조사기록철과 증언영상을 국가기록원으로부터 제공받을 수 있었다.13 세 번째로 활용한 자료군은 올해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과 연구소가 진행한 구술채록사업으로 수집한 4명의 증언이다. 손용암 씨는 2006년 강제동원위원회 구술기록도 남겼으나, 2021년 다시 한번 구술채록을 할 수 있었고, 다른 3명은 미이케탄광 등에 동원된 피해자였다. 네 번째, 일본 나가사키의 오카마사하루기념 나가사키평화자료관이 제공한 자료이다. 하시마 강제동원의 진상을 알린 서정우 씨의 다큐멘터리14와 증언 영상은 일본 시민단체의 도움이 없었다면 한국의 관람객들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중국인 강제연행의 진상을 조사하는 모임의 재판지원 활동 영상도 산업유산 시설에서 잊혀서는 안 되는 과거를 증언하고 있었다.
이렇게 4개의 루트로 피해자 증언 영상과 관련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번 전시회에 소개된 증언영상의 피해자 기본 정보와 강제동원 관련 이력은 다음과 같다.15

 

 


13 유일하게 우편으로 회신을 해 주신 분은 하시마탄광으로 동원된 김선옥(金先玉) 씨 유족이었다. 그러나 김선옥 씨는 아쉽게도 국가기록원에 보관중인 구술기록이 없었고, 유족이 보내주신 피해신고 당시 제출된 증빙자료와 사진 등은 현재 전시중이다. 김선옥 씨(1923년생)는 1941년 3월 하시마로 동원되어 입시피폭 당한 피해자로, 1997년 5월 김순길 씨와 현지 방문하여 강제노동의 실태를 증언한 기사가 일본 언론에 보도되었다. 김순길 씨가 주도한 징용공동지회에서 함께 활동했고 관련기록을 피해신고
당시 제출하였다. 이러한 활동에 힘입어 2005년 강제동원위원회 피해신고 당시 상세한 진술청취보고서를 남길 수 있었고, 그 피해사실은 「死亡記録から見た端島炭坑強制動員朝鮮人死亡者被害実態基礎調査」에 실려 있다. 그리고 나가사키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에서 발간한 <軍艦島に耳を澄ませば>에 1995년 5월 채록된 그의 증언이 실려 있다.
14 현재 다큐멘터리 영상의 원본은 영상자료의 영구 보존을 위해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이 기증받아 보존중이다. 일본 측 기증단체가 이번 전시에 자료 제공에 동의를 해 주셨고, 기증자의 의사에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이 자료를 협조해 주었다.
15 이번 전시회에서 소개된 증언 영상 가운데 일본 측에서 제공받은 증언자료를 제외하고 한국의 피해자 현황을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5.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록하고 기억하다

2021년 봄 신규로 수집한 피해자 증언은 모두 4건이다. 이들의 목소리를 중심으로 메이지산업혁명유산 관련 시설 속 강제동원의 실상을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1) 손용암(2006, 2021년 증언, 1928년생 강원도 고성군)
피해자 손용암은 올해 94세이다. 중학교 입학을 준비하던 중 아버지 심부름으로 배에 쓰는 밧줄을 사러 속초에 갔다가 사복형사에 붙잡혀 1943년 16세에 사할린탄광으로 강제동원 되었다. 1944년 8월 다카시마타광으로 배치되었다가 1945년 9월 귀국했다. 손용암 씨는 2006년 최초 증언으로부터 15년이나 경과했지만 자신에게 가장 뚜렷한 상처, 깊은 인상을 남긴 부분을 정확하게 묘사했다. 손용암 씨는 느닷없이 끌려간 것을 가장 억울해했다. ‘납치’라는 폭력적 방식도 충격적이지만, 탄광에 끌려가지 않았더라면 계속 공부했을 텐데 하는 속상함이 더 깊었다. 2년 간의 고생 끝에 빈손으로 귀환한 강제동원의 고통은 자식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자기가 겪은 일에 대해 ‘팔자’, ‘운명’과 같이 체념 섞인 표현을 많이 썼지만, 자신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의지는 여전했다.

2) 류기동(2021년 증언, 1918년생 충남 공주군)
류기동 씨는 마을의 조선인 순사가 지목해 그길로 동원되었다. 1943년 4월 미쓰이 미이케탄광에 동원되어 1945년 9월에 귀국했다. 미쓰이 미이케광업소는 1940년 6월부터 조선인 노무자 대량 이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16 피해자 류기동은 ‘관알선’이 본격적으로 시행된 1942년 4월 공주군에서 미이케탄광에 연행되었다. 당시 공주, 수원, 황해도에서 동원된 조선인 100명씩 묶어 대대(大隊), 25명씩 나누어 소대(小隊)로 편성하였다. 류기동은 공주대(公州隊)였고, 함께 온 이들은 수원대(水原隊), 황해도대(黃海道隊)로 불렸으며, 일본에 도착해서 1달간 훈련을 받은 후 채탄 현장에 투입되었다. 류기동 씨는 전형적인 몰락한 소작농으로 남의 집 살이로 생활하는 극빈층이었다. ‘관알선’으로 미이케탄광에 대규모로 동원된 첫 사례로 추정되는데, 당시 조선인 순사가 자신을 지목해 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언급했다. 초기에 월급을 받아 집에 부쳤다고 하는데, 이는 조선인 동원률을 높이는 선전효과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정” “삼지 탄광” 외에 정확한 탄광명이나 지명 등을 기억하지 못했다. 학교를 못 다녀 일본어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944년 미에케탄광에서 사고·사망률이 급격하게 증가하는데, 이를 반증하듯 다양한 사고·사망사건에 대한 기억이 선명했으며, 특히 공습의 공포를 강조했다. 황해도 출신들이 일본인들에게 보복 행위를 했다는 사실도 증언했다.

3) 손성춘(2021년 증언, 1928년생 전북 진안군)
손성춘 씨는 부모가 일찍 돌아가신 후 머슴살이를 하던 극빈층이었다. 구장이 뽕나무 모종 심으러 가자는 말로 속여 1945년 미이케제련소로 징용 당했다. 손성춘 씨는 인근 마을에서 45명이 함께 동원되었는데, 기차의 경비가 삼엄했지만 청장년들은 중간에 달리는 기차에서도 탈출을 감행했다. 1945년 징용에 대한 조선인들의 저항이 얼마나 빈번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어린나이에 동원된 손성춘 씨는 엄격한 감시와 통제된 일상 속에서 강제노동에 종사했다. 대체로 노무‘공출’이 부모가 없는 고아나 무직자, 극빈자, 연소자 등을 대상으로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동원 사례이다. 17 나이어린 철부지라 도망이나 저항을 생각하지도 못했지만 그가 목격한 실상은 도주의 일상화, 집단적 강제동원의 파탄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4) 이영주(2021년 증언, 1929년생 전북 진안군)
이영주 씨는 1944년 신의주 모래채취에 1년간 동원되었다. 동원기간이 끝나 고향으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구장에게 적발되어 1945년 초 미이케제련소로 동원되었다. 이웃마을 손성춘 씨와 함께 동원되었다. 국내동원에서 너무나 혹독한 강제노동에 시달려 건강이 매우 안 좋은 상태로 일본에 끌려갔기 때문에 신체검사에서 분류되어 비교적 쉬운 작업공정에 배치되었다. 이영주씨 역시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했고, 남의 집 살이 하는 극빈층이었다. 1945년 초 국내동원을 마치고 고향으로 오는 길에 “조선인을 모집하여 일본으로 싹 데려간다는 소식”을 듣고 피신했지만 구장의 야습(夜襲)에 걸려 그 길로 다시 끌려갔다. 인근 마을의 손성춘 등 복수의 동행자와 함께 오무타시로 동원되었으나 도착 후 흩어졌다고 한다. 이영주 씨는 당시 상황을 ‘내 맘에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자유를 주면 다 도망가게 되어 있었다고 했다. “자유가 없는”, “가둬서 일하는 신세였다”는 표현에서 강제동원, 강제노동의 의미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해방 후 중국인 포로들의 보복행위를 목격했는데, 오히려 중국인에게 동정심, 동질감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이후 일본인에게는 그들의 재보복을 두려워 할 만큼 공포감이 깊었다. 초고령 피해자들의 증언을 청취하면서 피해자의 증언이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강제동원 현장으로, 생생한 역사의 공간으로 이끄는 힘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식민지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는 이 피해자의 육성을 영상과 함께 직접 들을 수 있다. 피해자의 증언이야말로 강제동원․강제노동의 역사를 밝히는 핵심적인 자료이며, 산업유산정보센터는 이런 피해자의 증언에 제대로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연구소는 앞으로 일제강제동원 피해자지원재단과 함께 강제동원 피해생존자 구술채록 사업을 이어갈 예정이다. 그리고 한국정부가 생산한 구술기록의 공개와 활용을 촉구해 나갈 것이다.


17 「노무동원실시계획에 의한 조선인 노무자의 내지 이입에 관한 건(1942년 4월 21일부 社秘 26호, 각 부윤 군수 경찰서장 앞, 내무경찰부장 통첩)」에 의하면 노무‘공출’의 순위를 정해 놓았는데, 무직자, 나이가 적은 자, 독신자, 부양가족이 적은 자 순으로 우선 공출하도록 했다(경상남도 노무과, <노무관계법령집>, 경상남도 광공부鑛工部 노무과, 19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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