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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신문] 대표적 친일 민족반역자 비석…역사의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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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송병준 선정비와 송종헌 영세불망비·팔굉일우비

팔굉일우 뜻 ‘온 천하가 한 집안’
일제 침략 전쟁 합리화 위한 포석
팔굉일우비석 양지초에 자리잡아
우리의 부끄러운 단면 생생 전달

[용인신문] 지난 2008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양지초등학교 운동장의 일부가 포함된 도시계획도로 개설공사 중 담장 앞 도로공사를 위해 학교 놀이터를 옮기는 과정에서 일제강점기 양지현감을 지낸 ‘현감 송공병준 선정비’와 그의 아들 송종헌의 장수를 바라는 ‘백작 송종헌 영세기념비’ 등 두 개의 공덕비가 발견됐다. 이어 송종헌이 글씨를 쓴 팔굉일우(八紘一宇)비가 학교 운동장에서 비슷한 시기에 발견됐다.

일진회 총재며 정미칠적 가운데 한명인 송병준(1857~1925)은 이완용과 함께 대표적인 친일 민족반역자다. 송병준은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의 조선침탈에 협력했으며, 일진회를 이끌며 고종의 퇴위와 한일합병을 적극 추진한 대표적인 친일파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 10여 일 전에 이용구와 함께 외교권을 일본에 이양할 것을 제창하는 ‘일진회선언서’를 발표했다.

1907년 6월 고종의 헤이그 밀사 파견 뒤 당시 농상공부대신으로 있으면서 고종에게 양위를 강요해 퇴위시켰으며, 1909년 2월 내부대신에서 물러나 일진회의 총재가 됐다. 노다 헤이치로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개명한 송병준은 이토히로부미를 직접 찾아가 1억 5000만엔에 조선을 팔겠다고 제안했던 인물이다. 합병 후에 일제로부터 자작(子爵)의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고, 1920년 백작이 됐다.

그 아들 송종헌(1876~1949)은 1925년에 송병준이 사망하자 백작 작위를 계승했다. 송종헌은 양지에서 태어났다. 송병준의 장남이었던 그는 일제시대 직함을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이 갖고 있다. 일본 이름은 야전종헌(野田鍾憲)이다. 일설에 자신이 행차할 때 인사 없이 빨래하던 아낙을 장총으로 사살한 것으로 전해지는 악랄한 인물이다. 당시 송종헌은 그 일로 해서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자작의 작위를 받은 자는 천황의 일가로 간주해 천황의 명령 없이는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송종헌 역시 당연하게 친일반민족 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있다.

밝은 화강암으로 제작된 송병준 선정비는 송병준이 양지현감으로 있던 신묘년(1891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송병준에게 백작 작위를 물려받은 아들 송종헌 영세기념비는 송종헌이 1927년 양지초교에 5000원을 기부하면서 그가 오래 살기를 빈다는 내용을 담아 오석(烏石) 재질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종헌은 양지초등학교의 모태가 되는 사립 추향학교 설립 과정에서 초대 교장을 역임했다. 송종헌은 1921년 6년제로 편제가 바뀌면서 부족한 교실을 짓기 위해 후원금 5000원을 기부했다.

기념비의 명칭에는 ‘영세’, ‘불망’, ‘기념’과 같은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 기념비를 세운 이들은 비석 주인공의 공을 ‘영원히’, ‘잊지 말고’, ‘기념하자’는 뜻에서 비를 세웠을 것이다. 또 비석의 주인공은 자신의 공이 ‘영원히’, ‘잊혀지지 않고’, ‘기념’될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이제 이 비석은 그들의 기대와 달리 영원히 친일파의 친일 행위를 기억하는 역사적 증거물이 됐다.

이와함께 팔굉일우(八紘一宇) 비는 송병준의 아들인 송종헌이 직접 쓴 일제 찬양 비석이다.

팔굉일우란 ‘온 천하가 한 집안’이라는 뜻으로 일제가 침략 전쟁을 합리화하기 위해 내건 제국주의 논리이자 구호다. 당시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침략을 정의, 공영, 팔굉일우 등으로 표현했다.

‘팔굉일우’는 1940년 일본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가 시정 연설에서 “황국(일본 제국)의 국시는 팔굉을 일우하는 국가의 정신에 근거한다”고 말한 데서 유래한다. 일제는 제국주의 침략을 미화하고 홍보하기 위해 1940년 일본은 물론 조선 전역에 팔굉일우비를 건립했다. 팔굉일우비는 일제의 조선 침략과 지배 그리고 조선인 착취를 증언하는 역사적 기념물이다.

송종헌은 1941년 양지초등학교 개교 30주년을 기념해 자필로 쓴 팔굉일우비석을 학교에 세우게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해방이 되자 한국인들은 팔굉일우비를 땅에 묻거나, 비석을 옮기고 석재를 다른 용도로 사용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시야와 기억 속에서 사라진 팔굉일우비가 양지초등학교에 버젓이 남아 있었다.

당시 이 돌은 목재 벤치와 나란히 놓여 있어서 시민들과 학생들이 별 생각 없이 휴식을 취하는 석재 벤치에 지나지 않았다.

2008년 양지초등학교는 친일 앞잡이 송병준과 송종헌의 기념비가 발견되자 이 소식을 용인문화원에 전했다. 용인문화원 관계자들이 비석에 관심을 가질만한 사람들과 함께 학교로 달려갔다. 현장에 도착하니 송병준 송종헌 기념비는 학교 창고에 보관 중이었다. 이들 일행은 창고 문을 여는 동안 학교 정문 옆에 있는 넓적한 돌덩어리에 걸터앉아 기다렸다. 돌의 상단에는 큰 글씨로 ‘팔굉일우(八紘一 宇)’ 글자가, 그 옆에는 작은 글씨로 ‘삼위 백작 야전종헌 근서(三位 伯爵 野田鍾憲 謹書)’란 글자가 한자로 새겨져 있었다. 돌의 측면에는 ‘개교 30년 기념 소화 16년 9월 1일 동창회 후원회 증정(開校 30年 記念 昭和 16年 9月 1日 同窓會 後援會 贈呈)’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야전종헌은 송종헌의 창씨명이다. 이 비는 소화 16년에 세워졌으니 1941년 송종헌이 쓰고 당시 양지초등학교 동창회가 후원해 건립한 팔굉일우비였다. 현장의 용인문화원 일행은 팔굉일우비를 발견하고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고 한다. 해방 후 한국 땅에서 사라진 팔굉일우 비석이 처음 발견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 2017년에는 전라남도 해남 마산초등학교에서 고인돌 상판으로 사용되고 있던 팔굉일우비를 학교 행정 직원이 점심시간에 산책 중 우연히 발견되기도 했다.

양지초등학교에서 발견된 ‘팔굉일우비’와 송병준과 송종헌의 공적비는 발견 당시 용인문화원이 양지초등학교로부터 인수받아 현재까지 문화원 창고에 보관하고 있다. 이 비석은 민족문제연구소에 두 차례 대여돼 시민에게 공개됐고, 2019년 용인문화원이 주최한 ‘용인시민 소장 문화재전 및 독립운동 100주년 기념 자료전’에 친일 자료로 공개돼 관람객들로부터 큰 관심을 끌었다.

팔굉일우비는 국내에서 3개밖에 없는 유물이고, 송병준과 송종헌은 대표적인 친일파이기에 이 비석들은 역사적 가치가 높다.

민족의 자랑스러운 유산만이 역사적 기념물이 아니다. 이들 기념물을 역사적 기념물이 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안내판을 설치해 친일파의 행적을 기록하고 이들 기념물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관람객에게 전달해야 한다. 그리고 일제 식민지 체제를 청산하고 극복하는 역사적 상징물로 활용해야 한다. 용인독립기념관이 건립되면 그곳에 전시할 계획이라고 하지만 건립이전에라도 전시를 통해 교육의 자료로 삼아야 한다.

박숙현 기자 yonginceo@naver.com

<2021-10-05> 용인신문

☞기사원문: 대표적 친일 민족반역자 비석…역사의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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