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거 위기에 놓인 근대건축물
인천·광주 등 역사적 건물 수백곳
소유주가 철거 땐 보존 방법 없어
인천 중구 선화동 8-2(조일양조장·1939~2012년), 송월동2가 4(애경사·1912~2017년), 신포동 19-2(동방극장·1938~2015년), 신흥동1가 34-29·34-34(오쿠다정미소·1930년대 건립 추정~2020년), 만석동 47-9(신일철공소·1974~2019년)….
근대건축물이 사라지고 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기계를 이용해 소주를 생산하던 ‘조일양조장’과 첫 비누공장 ‘애경사’, ‘동방극장’은 주차장이 됐다. 일제강점기 수탈의 상징이었던 ‘오쿠다정미소’는 지난해 철거됐다. 이곳엔 오피스텔이 들어설 예정이다. 전통 방식으로 나무배를 만들던 대장장이 고 박상규 장인의 대장간 ‘신일철공소’도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인천은 근대건축물이 밀집한 도시다. 개항장이 있어 근대문물 유입이 빨라 개항기부터 산업화 시기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건축물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인천에 근대건축물이 몰려 있는 곳은 개항장과 인접한 중구와 동구다.
2019년 인천시 조사 결과를 보면 중구에 195개, 동구에 59개 등 총 254개 건축자산이 있다. 이는 인천지역 전체 492개 건축자산 중 52%를 차지하는데, 이 중 근대건축물은 중구(153개)와 동구(47개)에 200개가 몰려 있다.
1883년 개항 이후 인천을 통해 자본이 들어오면서 이 주변에 공장을 비롯한 다양한 부대시설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 건축물들은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면서 노동·역사적 의미가 더해져 가치 있는 건축자산이 되었다.
1930년대 세워진 동일방직이 대표적이다. 이곳은 군수공장으로 설립되어 일제강점기 조선 여성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한 수탈의 현장이다. 특히 국내 최초의 노조 여성지부장이 탄생한 한국 노동운동의 산실로도 평가받는다. 이 공간은 강경애의 소설 <인간문제>에 등장하는 대동방적공장의 모델이다.
1978년에는 이곳에서 여성노동자들을 탄압한 일명 ‘똥물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여성노동자들이 회사의 탄압을 피해 대피한 곳이 인천도시산업선교회다. 동일방직은 2014년 생산공장을 베트남으로 이전하면서 2017년부터 폐쇄된 채 방치돼 있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는 1961년 지어진 근대건축물이지만, 현재 재개발지구에 포함돼 철거 위기에 놓여 있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21일 ‘2021년도 꼭 지켜야 할 자연·문화유산’ 10곳을 선정하면서 인천지역의 경우 인천도시산업선교회, 미림극장, 조병창 병원 등을 꼽았다. 이희환 인천도시공공성네트워크 공동대표는 “근대건축물이 사라지면 역사도 사라지는 것”이라며 “근대건축물을 보호하지 않으면 결국 아파트만 들어선 개성 없는 도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자체는 ‘보존 대신 개발’
인천 개항장 옆 중·동구에 200개
일제의 노동수탈 상징 ‘동일방직’
여성노동자 보듬은 ‘산업선교회’
역사적 가치 높은 건축물들 밀집
시, 원도심 재생 위해 ‘개발’ 추진
대규모 아파트 단지 건축 예정
다수 건축물 철거 위기에 내몰려
인천의 대표적 근대건축물로는 일제강점기 일본 기업 공장에서 출발한 일진전기 공장도 있다. 1938년 화수동 매립지에 들어선 이 공장은 전기 관련 용품을 생산하던 도쿄시바우라(도시바) 제작소 소유였다. 태평양전쟁 종전을 1년 앞둔 1944년 군수회사로도 지정된 곳이다.
이 공장 사무동 건물은 일제강점기 당시 민간회사 사옥 건물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중구에는 후카미 도라이치 단무지 공장 직원 기숙사도 있는데, 민간이 운영하던 공장의 숙소여서 연구 가치가 높다는 게 학계 안팎의 설명이다.
장회숙 인천도시자원디자인연구소 대표는 “조선 후기 서구 열강들의 함선을 감시하기 위해 군대가 머물던 화도진지가 있던 화수동과 개항 이후 간척사업이 진행된 만석동 일대는 1900년대 초반 일본과 한국 자본이 첨예하게 부딪쳤던 곳”이라며 “대부분 기록이 사라졌지만 한국과 일본 간척회사들이 다퉜던 법원 기록 등이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장 대표는 “개항 이후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하던 공장들은 대부분 만석동 일대에 집중돼 있었다. 일제강점기부터 근대까지 노동자들의 애환이 담긴 곳”이라며 “동일방직 일대에는 다카스키 양조장을 비롯해 아직 빛을 보지 못한 근대건축물이 있는데 조사와 연구를 통해 가치를 발굴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근대건축물 보존과 개발을 놓고 시민단체와 지자체가 대립하고 있다. 시민사회단체들은 근대건축물의 보존과 조사를 요구하고 있지만, 지자체는 개발 위주의 정책을 추진 중이다. 인천시는 대규모 공장 이전 용지를 지구단위계획구역으로 지정해 개발한다는 계획을 세워둔 상태다.
인천시는 동일방직·혁진산업·동아원 등 만석동 일대 17만6331㎡ 부지는 만석지구로, 화수동 일진전기 일대 7만4169㎡ 부지는 화수지구로, 송림동 일대 24만7389㎡는 송림지구로 지정했다. 동구 일대 총 49만8000㎡ 부지에는 건축물 등을 허물고 아파트를 지을 예정이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가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도 화수·화평 재개발지구에 속해서다. 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은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철거를 막기 위해 지난 7월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존치를 위한 범시민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24일 현재 시민사회단체 대표자들은 125일째 릴레이 단식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지자체가 근대건축물 보호보다 개발을 택하는 이유는 원도심 개발과 인구유출 등 당장의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어서다. 동구는 한때 인구 18만명이 살던 인천의 중심도시였지만, 인구유출이 계속됐다. 현재 인구는 6만명에 불과하다.
이희환 공동대표는 “공장을 이전하면서 소유주는 빈 공장의 용도변경을 통해 아파트를 짓고 개발이익을 취하는 사례가 반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공동대표는 “지자체 입장에서도 원도심 재생이라는 명목으로 손쉽게 부동산 개발을 하고 인구를 유입시킬 계기를 마련하는 등 일석이조의 정책”이라며 “이런 사업이 계속되면 근대건축물이 모두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지자체가 나서 철거 위기에 놓인 건축물을 보존하는 일은 사실 쉽지 않다. 인천시도 근대건축물을 포함한 건축자산을 보호하기 위해 지난달 근대문화유산 관리 태스크포스(TF)를 구성했지만, 현재 근대건축물 대부분이 민간 소유이기 때문이다. 인천시 관계자는 “(보존 가치가 있는 근대건축물은) 대부분 민간이 소유하고 있어 철거나 훼손을 막는 데 어려움이 많다”며 “등록문화재로 지정해 비용 일부를 지원하는 등의 방안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존 쉽지 않은 민간 보유 근대건축물
인천 개항장 옆 중·동구에 200개근대건축물 대부분이 민간 소유
개발 목적 철거해도 제재 못해
지자체 지원으로 재정비해도
몇 년 지난 후에는 개발 가능해져
정부 ‘건축자산법’ 시행했지만
지자체 자산 등록 등 참여는 미미
“한정된 인력·예산에 관리 손놔
정부가 전문가 파견 등 지원해야”
민간 소유 근대건축물을 보존하는 데 장애물도 적지 않다. 특히 부지 소유자들이 개발을 위해 해당 건축물을 철거하더라도 지자체가 막을 방법이 마땅찮다.
광주시는 2002년 근대문화유산 현장조사를 통해 주요 근대건축물 100곳을 찾아냈다. 이 중 14곳을 문화재로 등록하고 11곳은 기념물 등 문화재로 지정했다. 하지만 보존 가치가 높은 상당수 건축물은 당시 조사 이후 철거됐다. 지난해까지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한 근대건축물 20곳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철거된 건물 중에는 일제강점기 지어진 회사 건물이나 개인 주택 등도 있지만 공공기관이 소유하고 있던 건축물도 상당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44년 지어진 옛 전남경찰청 민원실을 비롯해 1935년 건축된 수피아여중 특별교실, 1956년 만들어진 조선대부속고등학교 본관, 1960년대 지어진 동곡초등학교 급식동과 하남초등학교 유치원이 헐렸다.
민간이 소유한 조흥은행 충장지점(1962년), 스카우트 광주·전남연맹(1940년대), 뉴 계림극장(1953년), 현대극장(1961년), 송정극장(1960년) 등도 철거됐다. 대신 이 자리에는 아파트와 오피스텔, 상가 등이 새로 올라갔다.
대구에서는 중구 북성로와 서성로 등을 중심으로 근대건축물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대구 중구는 근대건축물 보호를 위해 2014년부터 보존 가치가 높은 1960년대 이전 건축물의 외부경관 개·보수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올해까지 건물 1채당 최대 4000만원, 총 14억원이 넘는 예산을 들여 근대건축물 35채를 재정비했다. 하지만 ‘새 옷’을 입은 건축물 중 4채가 아파트 재개발로 자취를 감췄다.
대구 중구 관계자는 “개·보수 지원 대상이 된 건축물은 건물 주인이 5년 동안 외형을 바꾸거나 팔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있다”면서 “아파트 재개발 시행사에 건물을 판 이들이 받았던 지원금(1억2800만원)은 환수조치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지자체 지원을 받아 재정비했더라도 5년이 지나 신축 아파트 부지 등 개발지역에 속할 경우 철거를 막을 방안은 없다.
대전 동구 소제동에서는 100년에 걸쳐 형성된 철도관사촌도 사라지고 있다. 철도관사촌은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고 대전역이 건설된 이후 생겨났다. 대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이 관사촌에는 관사 100여채가 있었지만, 최근 도로 개설이나 지역 개발사업 등으로 10여채가 철거됐다. 일부 건물은 카페나 식당으로 개조되면서 원형을 잃고 있다.
우수건축자산 있는 지자체는 2곳이 전부
건축자산을 지키기 위한 전국 지자체들의 노력은 미흡하다. 각 지자체는 2015년 정부의 ‘한옥 등 건축자산의 진흥에 관한 법률’(건축자산법) 시행에 따라 건축자산 진흥 시행계획을 수립한 뒤 건축자산 기초조사에 나섰다. 하지만 예산과 전문인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우수건축자산과 건축자산진흥구역 지정에 소극적인 게 현실이다.
경향신문 조사 결과 전국 17개 지자체 중 울산을 제외한 16곳이 건축자산 진흥 시행계획을 수립했다. 이들 지자체는 건축자산법 시행에 따라 건축자산 기초조사를 마쳤거나 시행 중이다. 그러나 우수건축자산과 우수공간환경을 등록한 지자체는 서울과 경기 등 2곳뿐이다. 서울은 체부동 성결교회 등 11곳을 우수건축자산으로 등록했다. 경기는 화성시 매향 쿠니사격장을 우수공간환경으로 지정했다. 다만 인천은 내년 7월까지 용역 결과를 토대로 우수건축자산을 등록한다는 계획이다.
전국에서 건축자산진흥구역을 지정한 지자체도 4곳에 불과하다. 건축자산진흥구역은 각 지자체가 근대건축물 등 건축자산이 밀집된 지역을 관리하기 위해 심의를 거쳐 지정한다. 서울이 북촌 등 9개 구역을 지정했고, 대구는 약령과 달성토성을 지정했다. 대전은 동구 이사동을 건축자산진흥구역으로 정했다. 전남은 지난해 금성관, 나주향교, 나주읍성 서성문 등이 밀집된 나주 과원동 일원을 건축자산진흥구역으로 지정해 관리에 나섰다. 인천은 중·동구 개항장 산업유산 지역과 개항기 근대건축물 밀집지역을 건축자산진흥구역으로 지정하기 위해 용역을 진행 중이다.
한 지자체 관계자는 “우수건축자산은 건축물 소유주가 신청해 심의를 거치는 과정이 필요하다”며 “건축주가 신청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건축물이어도 우수건축자산 등록이 힘들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지자체의 한정적인 예산과 인력으로는 건축자산 관리가 힘든 상황”이라며 “대부분 지자체들이 이 같은 이유로 우수건축자산과 건축자산진흥구역을 지정하는 데 큰 관심이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근대건축물 보호를 위해선 정부 예산과 전문인력 지원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근대도시건축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는 안창모 경기대 교수는 “각 지자체가 건축자산 조사를 하고 있지만 예산과 인력에 따라 조사 내용이 천차만별일 것”이라며 “지자체 예산·규모 등에 따라 전문가 확보도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안 교수는 “정부가 나서 예산을 지원하고 등록건축물 조사·관리를 할 수 있는 전문인력을 파견하는 등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삭·윤희일·강현석·백경열 기자
<2021-10-25> 경향신문
☞기사원문: ‘개발 바람’에 밀려…근대건축물이 사라진다
역사 짧은 유산들, 핫플을 넘어 ‘남길 것’의 가치 공유해야
헐리고·남고…엇갈리는 운명
‘지켜보는 눈’이 없는 근현대 유산
보편적 욕망 앞에 쉽게 허물어져
반세기 넘겨야 ‘등록문화재’ 대상
50년 안 된 건물, 평가조차 못 받아
옛 서울시청 본관 뒤편의 ‘태평홀’
등록문화재였지만 기습 철거당해
전국 ‘무명의 유산’ 처지는 더 심각
‘국가지정문화재의 소유자는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로써 해당 문화재를 관리·보호하여야 한다.’
문화재보호법 제33조는 문화재 소유자 관리의 원칙을 이같이 규정한다. ‘선량한 관리자’는 관리자의 심성을 강조하는 말이 아니다. 문화재 관리자의 의무를 엄격하게 규정하는 법적 용어다. 문화재를 자기 재산 이상으로 소중히 다뤄야 한다는 뜻이 강하다. 이는 국보나 보물 등 지정문화재 관리에 적용되는 개념이다.
지정문화재가 아닌 등록문화재의 경우 관리자 의무는 ‘원형 보존에 노력하여야 한다’는 수준으로 확 떨어진다. 지정문화재와 달리 근현대 유산의 ‘자발적 보호’에 목적을 두고, 소유자가 활용하는 것도 허용하기 때문이다. 건축물 면적의 ‘4분의 1 이상’을 바꿀 때 지방자치단체에 신고하도록 규정한 정도가 나름 세운 보존의 원칙이다.
지정문화재도, 등록문화재도 아닌 유산은 사실상 ‘무법지대’다.
국회서 제도적 공백 메우기 위해
‘예비문화재’ 선정 등 관련법 발의
소유주 관리의무 강화 추진했지만
상정 후 큰 관심 못 받고 답보 상태
등록문화재의 경우 대체로 50년 넘은 유산을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50년이 안 되면 평가조차 제대로 받을 기회를 갖지 못한다. 근대 문턱에서 일제강점을 겪은 탓에 ‘잔재’로 치부된 근대유산에 대해서는 가치 논의 자체가 금기시되곤 한다. 국가 차원에서 근현대 유산이 체계적으로 취합·관리된 적이 없기에 이 순간에도 어디에서, 어떤 유산이 사라지는지 국가도, 지자체도 알기 어렵다.
한마디로 근현대 유산은 ‘지켜보는 눈’이 없다. 낡고 작은 건물을 부수고 크고 새롭게 지어 자산을 불리려는 보편적 욕망 앞에 소유주의 선량 혹은 노력을 바라기는 쉽지 않다. 서울시는 새 청사 건설작업에 걸림돌이 된다며 서울도서관(옛 서울시청 본관) 뒤편에 있던 태평홀을 2008년 8월26일 기습적으로 철거했다. 등록문화재도 이런 대우를 받는데 전국에 흩어진 무명의 유산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전면 철거 후 개발에 익숙한 풍토에서는 문화재 제도 바깥에 수많은 근현대 유산이 방치될 수밖에 없다.
‘문지기 역할’ 수행하는 광주시
제도 울타리 밖에 있는 유산을 보호한 사례가 없지는 않다. 서울시의 이른바 ‘공평동 룰’을 들 수 있다. 종로구 재개발사업지인 공평1·2·4지구에서 조선 초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켜켜이 쌓인 건물·길 터가 발견되자, 서울시는 재개발사업에 추가 용적률을 허용하되 유적을 전면 보존하는 쪽으로 길을 텄다. 이 유적을 전시하는 곳이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이다. 일부만 옮기고 그대로 덮었던 전례들에 비하면 진일보했다.
다만 공평동 유적은 단순 건물·길 터이긴 해도 500여년 역사를 간직했다는 상징성이 강했다. 수십년 된 근현대 유산은 그만큼 관심을 불러모으기 어렵다. 이 시간의 차이를 배제하면 결국 공평동 룰에서 남는 교훈은 ‘문지기의 역할’이다. 민간 영역에서 발굴된 공적 유산을 보호하도록 개입하는 일이다. 공평동 룰에선 재개발사업자와 협의를 이끌어 낸 공공, 즉 서울시의 역할이 컸다.
문지기의 역할은 일반적으로 기대하기 어렵다. 재개발·재건축 등 정비사업을 민간사업이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공무원에게 인허가권이란 ‘무기’가 있지만, 정비사업을 규정하는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은 단순 절차법이므로 절차에 문제가 없으면 적극 활용하지 않는다.
이 같은 상황을 감안하면, 광주 전남·일신방직 부지 재개발사업은 지자체가 문지기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주목할 만한 사례다. 전남·일신방직 부지는 1930년대부터 산업유산이 누적된 곳이다. 광주시는 재개발사업에 필요한 용도 변경 승인 권한을 갖고 태스크포스(TF)를 꾸려 개입 중이다. 산업시설 수백개에 대한 평가를 진행해 철거·보존 계획을 세운 다음 사업자와 협의해 개발계획을 도출한다는 게 광주시의 구상이다.
전남·일신방직 평가 작업에 참여한 송석기 군산대 건축공학과 교수는 “개인 소유물에 대해 문화재 관련 법률만으로는 컨트롤(조정) 안 되는 부분이 있지만, 지자체가 도시계획 등에 대한 권한을 적극 활용하면 공적 측면에서 의미 있는 것들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문제를 풀어 갈 수도 있다”며 “지자체가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가 사실 상당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상향식 논의’로 보존한 세운상가
문지기가 제 역할을 하려면 전제가 필요하다. 근현대 유산의 의미와 가치가 정립되고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야 공공이 개입할 근거를 갖는다. 광주시처럼 재개발이 예고된 다음 ‘사후 개입’을 할 경우, 재산권을 내세워 절차를 재촉하는 사업자와의 분쟁 가능성이 부담이 된다. 서울시의 ‘흔적 남기기’ 사업 취소가 그런 예다. 초기 현대식 아파트 생활상을 보전한다는 취지에서 재건축 중인 개포·반포·잠실 주공아파트 1~2동씩을 남기게 했지만 호응을 얻지 못했다. 당시 지자체장의 의지는 강했지만, 가치 평가와 보존 방식에 대한 논의는 부족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송 교수는 “어떤 건축물을 적극적으로 활용할지 아니면 그냥 없앨지 혹은 일부분만 남길지 평가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우리 사회는 그런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는다”며 “미처 가치를 알기도 전에 건축물이 사라져 버리는 일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했다. 안창모 경기대 건축학과 교수는 “근대는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시대였고 건축물도 마찬가지였다”며 “결국 선택과 집중을 하기 위한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광역지자체 차원에서 ‘한옥 등 건축자산 진흥에 관한 법률’에 따라 건축자산 기초조사를 실시 중이지만, 일회성·하향식 조사로는 수많은 근현대 유산을 면밀하게 평가하기가 어렵다. 서울시가 집계한 건축자산은 한옥을 제외하고도 1083개다. 일상적으로 민간의 연구나 활동을 수렴하는 상향식 체계 필요성이 제기된다.
인천 부평구 산곡동 87번지 일대 ‘영단주택’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철거만 기다리는 경우다. 영단주택은 주택공사의 전신인 ‘조선주택영단’이 1940년대 초 700호 규모로 건립한 노동자 집단주거지다. 지금도 그 원형을 확인할 수 있다. 도미이 마사노리(富井正憲) 전 한양대 건축학과 교수에 따르면, 영단주택은 ‘근린주구론’에 입각해 주택과 ‘포켓 파크(Pocket Park·소공원)’, 관리소, 탁아소, 공동 급수시설 등을 배치한 ‘한반도 최초의 근대적 주거단지’다. 근린주구론은 공공·편의시설을 누릴 수 있는 생활권에 관한 도시계획 이론으로, 미국 도시계획가 클래런스 페리(1872~1944)가 주창했다. 이처럼 민간의 연구가 다각도로 진행됐지만 공적으로 흡수되지 못하고 영단주택은 일대 재개발사업으로 철거 직전에 이르렀다.
상향식 혹은 민관협력 논의 구조는 근현대 유산의 지평을 넓히는 평가를 가능하게 한다. 서울시는 2014년 을지로 세운상가 존치 결정을 내리고 2016년부터 도시재생사업을 실시 중이다.
‘1세대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세운상가는 1967년 건설 당시 최고의 주상복합아파트로 불린 건축유산이면서, 현재도 7000여개 사업체와 기술자 2만여명이 일하는 산업유산이기도 하다. 2014~2015년 다양한 분야의 민간 연구자·기획자가 뭉쳐 ‘도심 제조업 생태계’ ‘메이커시티(Maker City·생산자 도시)’ 등을 세운상가의 핵심 가치로 부각시켰다. 유형(건축)·무형(산업)의 의미가 모두 강조되면서 세운상가는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인스타 핫플’을 넘은 가치 세우기
최근 관광자원화·지역자산화 강조
너도나도 ‘뜨는 공간’ 조성에 관심
이젠 ‘유지 어떻게’ 해법이 더 중요
가치 계량화하는 역량 키우기 과제
근현대 유산을 평가하는 목적은 결국 남길 것과 부술 것을 가리기 위함이다. 역사가 짧은 근현대 유산은 대체로 다시 쓸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살아남는다. 유물처럼 박제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등록문화재 취지 자체도 ‘일상생활에 맞게 다양하게 활용해 문화재를 적절히 보호한다’(문화재청)는 데 있다. 사람을 끌어모으기 위한 ‘관광자원화’나 ‘지역자산화’도 강조된다. 근현대 유산이 ‘돈이 된다’고 손짓하는 셈이다.
하지만 수십년 된 건축물을 새로운 용도로 쓰는 데는 여러 제약이 따른다. 건축물 본래 용도를 바꾸려면 내부 구조가 바뀌어야 하고, 처음 지었을 당시와는 필요한 주차공간이나 설비 조건도 다르다.
현실적 요구에 맞춰 개량하다 보면 고유의 정체성을 건드릴 수도 있다. 문화재보호법 시행령은 등록문화재 개조 시 신고가 필요한 경우를 ‘외관 면적의 4분의 1 이상’이라고만 규정한다. 이 기준만 넘지 않으면 지자체의 눈을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안창모 교수는 “근대 건축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소유주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것만은 아니다’란 점을 강조하면서 활용을 장려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쪽으로만 치우치다보니 활용 방식에 관해 잘못된 메시지를 전달한 것도 사실”이라며 “지역 재생이나 관광이 개입해 돈을 벌게 해준다고 인식하게 되면서 더욱 혼란스러워졌다”고 말했다.
정부가 2018년부터 군산·목포·영주 등에 조성한 ‘근대역사문화공간’은 이 같은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등록문화재 제도를 점(건물 한 채) 단위에서 선(거리)·면(동네) 단위로 확대 적용한다는 취지는 관광자원화로 이어졌고, 소셜미디어에 오르는 ‘핫플레이스’가 됐다. 하지만 ‘목포가 뜨면 군산이 지고, 통영이 뜨면 목포가 지는’ 흐름 속에서 회의적인 전망도 나온다. 송석기 교수는 “지자체가 너도나도 ‘뜨는 공간’을 한번 만들어 보자며 접근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했다.
제도적 공백을 메우려는 시도가 있지만 역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21대 국회에서 발의된 ‘근현대 문화유산의 보전·관리 및 활용에 관한 법률안’은 등록문화재와 근현대 유산에 관한 별도 법률 체계다. 50년이 안 된 유산을 ‘예비문화재’로 선정할 수 있게 했으며, 등록문화재·예비문화재 모두 소유주의 관리 의무를 ‘선량한 관리자’로 높였다. 또 등록문화재의 ‘필수 보존요소’를 지정하고 이 부분을 변경할 경우 지자체에 신고하게 했다. 하지만 이 법안은 지난 2월 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 상정된 뒤 진척이 없다. 20대 국회에서 발의된 같은 법안은 관련 회의 한 번 없이 임기가 끝나 폐기됐다.
근현대 유산에 관한 국내 역량 문제도 과제로 꼽힌다. 대량생산 체제에서 쏟아진 유산의 양만큼 그 가치를 판단하는 전문가도 풍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안 교수는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근대 건축의 가치를 계량화해 제시할 필요가 있는데, 전문가 집단이 크면 심층 논의를 통해 어느 정도 수렴되는 가치를 찾아낼 수 있다”며 “현재는 전문가가 워낙 적다보니 서로 의견 편차가 너무 크게 드러나 계량화하기 어렵고 사회적 신뢰를 구축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허남설·김태희 기자 nsheo@kyunghyang.com
<2021-10-25>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