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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억울과 참담이 쌓이는 국회 프락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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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6) 국회 프락치 사건
친일청산 앞장선 제헌국회 소장파
항일투사 탄압한 헌병대에 체포돼
고문 끝에 ‘남로당의 프락치’ 혐의

함세웅 신부가 쓴 ‘국회 프락치 사건’ 붓글씨.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
거기에 모든 인간의 종말이 있으니 살아 있는 사람은 이를 마음에 새길 일이다.
슬픔이 웃음보다 낫다. 얼굴은 애처로워도 마음은 편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이들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고
어리석은 자들의 마음은 잔칫집에 있다.” (코헬렛 7,2-4)

모두가 공감하는 선현들의 체험과 가르침입니다. 일상의 교훈이지만 성서 작가가 성경에 기록하면 이 말은 “하느님의 말씀”이 됩니다. “사람을 잘 보면 하느님이 보인다”는 신학적 정언과 같이, 역사를 회상하고 성찰하면 아름다운 기도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상처와 아픔, 고난과 죽음이 깃든 역사의 현장을 찾아 조문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는 함께 울고 고뇌하고 위로하며 새롭게 기쁨과 희망을 찾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20세기에 가톨릭 교회가 깨닫고 고백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목헌장 첫 대목의 고백과 선언입니다.

“오늘날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고통당하는 모든 이들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는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입니다.”

성경은 히브리인들의 역사입니다. 선조들의 삶을 기리며 하느님을 생각하고 하느님 안에서 성찰하고 후대를 위하여 기록한 이 문서는 신앙 고백이자 역사 증언입니다.

함석헌 선생은 1934~1935년 동인지 <성서조선>에 연재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에서 나름대로 과감한 시도를 꾀했습니다. 물론 히브리인들의 성서 역사를 우리네 역사와 단순 연계했다는 한계는 있지만, 이는 신앙인으로서 용기 있는 접근이었습니다. 그 후 두 차례의 수정본을 거치며, 성서적 관점을 넘어서서 우리 민족의 역사를 다원 종교적 시각에서 해석하고 보완했습니다. 그 행업을 높이 평가합니다.

이제 70여 년 전의 선배들은 거의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미국을 등에 업고 전횡했던 이승만 시대처럼 오늘날에도 그 추종자들이 횡포를 부리고 있습니다. 제헌 국회의원은 200명이었습니다. 거기서 100명이 늘어난 만큼 ‘세상은 진전되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70여 년 전 제헌국회 그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국회의원에 대한 살인적 고문

맥아더 미군정에 힘입어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친일 잔재에 기초해 정권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해방 정국 당시 송진우, 여운형, 김구 등 유능한 정치 지도자들이 테러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946년 10월 대구항쟁, 1948년 4.3 제주항쟁 과정에서는 많은 시민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해 5월 15일에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었고, 8월 15일에는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했습니다. 그리고 10월에는 여순항쟁이 일어났습니다. 숨가쁜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제헌국회는 강력한 빛을 발했습니다.

사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 이들은 1948년 5월 총선을 보이콧했습니다. 언뜻 반쪽짜리 국회라 생각할 수 있지만, 실상은 젊고 민족정신이 투철한 젊은 정치 지망생들이 대거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헌 국회의원 200명 중 이승만 계열의 대한독립촉성회 소속이 55명, 야당 격인 한국민주당 소속이 29명인 데 반해 젊은 소장파 의원이 85명이나 되었습니다. 국회 내 최대 세력을 형성한 그들은 반민족행위자 처벌, 남북의 자주적 평화통일의 기치를 걸고 이에 소극적으로 임하는 정부를 연일 비판했습니다. ‘친일 경력자를 처벌하라, 미소 양군은 철수하라’는 등의 주장은 이승만 정권을 뿌리째 흔드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이승만 정권은 경찰력과 행정력의 유지를 위해서 친일 경력자들을 더욱 껴안고 미국에 종속되었습니다. 가슴속에 민족에 대한 사랑과 봉사의 염으로 가득했던 소장파 의원들은 그 어떤 회유나 협박 앞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강한 분들이었습니다.

기어코 이승만 정권은 독재의 칼을 꺼냈습니다. 1949년 5월에 3명의 국회의원을 체포합니다. 6월엔 소장파를 이끌었던 김약수 국회 부의장을 포함해 추가로 7명을 체포하고, 8월에는 6명을 더 체포했습니다. 결국 이들 중 소장파 의원 13명을 소위 ‘남로당 프락치’라는 혐의로 기소해 재판에 넘깁니다. 남로당의 사주를 받아 외국군 철수와 평화통일을 요구했다는 죄목입니다. 이것이 바로 국회 프락치 사건입니다. 이 사건과 병행해 1949년 6월 6일 이승만 정권의 친일 경찰들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기습적으로 습격하고, 1950년 9월까지였던 반민족행위처벌법의 공소시효를 1949년 8월 말로 단축하는 개정안을 국회는 9월에 통과시켰으며, 10월에는 반민특위 검찰과 특별재판부를 모두 해체했습니다. 이승만 정부의 치밀한 정치적 계산과 반민족적 범죄입니다.

그레고리 헨더슨의 증언

현역 국회의원을 체포한 것은 검찰도 경찰도 아닌, 일제 강압 통치의 표상이었던 헌병대였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이 받았던 살인적인 고문과 자백 강요는 대한민국 최초의 국회의원에게도 똑같이 쏟아졌습니다. 재판정에서 의원들은 강압에 의한 자백임을 수차례 소명하지만, 이듬해 3년에서 10년까지의 실형을 선고받습니다. 13명 전원이 항소했고, 2심 재판을 기다리던 중 6.25 전쟁이 발발하자 1명을 제외하고 12명이 월북 또는 납북돼 북쪽으로 갔습니다.

저는 무엇보다 이 지점을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특히 월북이란 단어는 자발성을 전제합니다. 하지만 그때 그들에게 선택권이 있었을까요? 그들은 살기 위해 북으로 향했고, 누명을 벗을 기회는 영영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잊혔습니다. 가족들은 사람들의 눈에 띌세라 숨죽이며 살았고, 억울한 냉대와 불이익에 항변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망각이 더 깊어지기 전에 사건의 기록물들을 정리했기 때문입니다. 2021년 김정기 교수가 출간한 <국회 프락치 사건의 증언>은 이 사건이 한국 민주주의에 미친 영향과 유족들의 아픔을 공론화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국가 폭력이 국회의원에게 자행한 고문과 학대, 그리고 가족과 후손들에게 이어진 영혼 학대 추적기’란 부제에서 우리가 잊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 있습니다. 1948년 대한민국 미 대사관의 3등 서기관으로 근무했던 그레고리 헨더슨입니다. 그는 국회 프락치 사건의 중요성을 직감하고 수많은 공판 기록을 바탕으로 최고의 증언을 남겼고, 김정기 교수는 그와 교류하며 방대한 자료들을 집대성했습니다. 그레고리 헨더슨의 기록은 이승만 정권이 제헌국회를 어떻게 탄압했는지 적나라하게 증언합니다. 재판부의 판사와 검사, 헌병대가 정권의 이익을 위해 얼마나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는지 보여줍니다. 그 결과 무소속 국회의원이 다수였던 제헌국회는 동력을 상실했고, 민주주의는 퇴행했으며, 반공 독재가 시작되었습니다. 헨더슨은 한 세미나에서 “13명의 제헌 의원들이 역사적 무명인간화되었다”라고 술회했습니다.

당시 언론은 국회 프락치 사건의 결정적 증거가 남로당 특수공작원 ‘정재한’이란 여성이 음부에 숨긴 암호 문서라고 보도했습니다. 남로당의 지시를 받고 프락치 활동을 하는 국회의원 명단을 갖고 월북하려던 정재한을 체포했다는, 엽기적 시나리오입니다. 김정기 교수는 이를 저질 정치 코미디라고 단언합니다.

변호인 측의 끈질긴 증인 요청에도 당시 검사 오제도(반공조작 사건의 대표적 인물)와 장재갑, 주심 판사 사광욱(친일 인명사전 등재인물), 배심 판사 박용원, 정인상은 정재한에 대한 증인 채택을 거부합니다. 실존 인물이 아니란 말까지 돌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후 헨더슨이 확보한 자료에 의하면, 13인의 재판이 끝나기도 전인 1949년 12월 정재한의 총살형이 집행되었다고 합니다. 재판이 끝나기도 전에 결정적 증인을 사형에 처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 모든 것이 조작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아닐까요.

국회 프락치 사건 앞에서 큰 부끄러움과 참담함을 느낍니다. 외국 외교관이 진실을 밝히는 데 앞장섰다는 사실이 부끄럽고, 진상규명을 하지 못한 채 너무 긴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 참담합니다. 또한 13명의 국회의원과 가족들이 겪었을 고통에 가슴이 아픕니다. 제헌국회가 받은 박해는 어쩌면 그들의 꿈과 힘이 그만큼 창대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들의 저력이 제대로 발현되었다면 6.25라는 비극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상상해봅니다.

“프락치 사건 재심 가능”

최근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를 방문해 국회 프락치 사건에 관해 얘기를 나눴습니다. 위원장과 대화 중에 이 사건의 재심이 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사상이나 월북 여부보다는 절차의 불법성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제헌 국회의원 13인은 다만 1심만 받았다는 점, 그들이 군·경·검 합동조사부에서 취조받았다는 점, 무자비한 고문 등이 모두 재심 사유가 된다고 했습니다. 먼 길 끝에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이분들은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 전, 즉 미결 상태였으므로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당당한 제헌 국회의원들입니다. 이제 후배 국회의원들이 국회의 이름으로 나서서 그들의 무죄를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정치적으로는 물론 민족사적으로서도 제헌 국회의원들의 신분을 재확인해야 합니다. 국회의사당 내의 친일 인물들의 상을 철거하고 이분들의 흉상을 모셔야 합니다.

아무리 부끄럽고 아플지언정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역사 책무이자 하나 된 대한민국으로 가는 길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하고, 실천해야 할 일을 실천해야 합니다.

고난의 길을 걸은 제헌 국회의원들의 명복을 빌며 가족들의 고초에 깊은 아픔을 표합니다. 위패를 모시는 마음으로 한 분 한 분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그 후손들의 손을 잡고 큰절을 올립니다. 미완으로 끝난 통일 공동체의 꿈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느님, 수난 당한 제헌 국회의원들에게 합당한 상급을 주시고 저희 모두 역사를 바로잡아 정의로운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열세 분의 제헌 국회의원을 마음에 정성껏 모시기 위해 그 이름과 대표 연혁을 소개하며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노일환(盧鎰煥, 1913~1982)
-전북 순창 출신. 배재고보 졸업, 보성전문 상과 졸업
-제헌 국회의원(1948.5~1950.5) <선거구> 전북 순창, <소속정당> 한국민주당
-동아일보사 기자, 국회 프락치 사건의 주동(1950)으로 징역 12년 선고, 복역 중 6.25 전쟁으로 출옥, 재북 평화통일협의회 상무위원 겸 선전부장 역임, 그 후 숙청되었다고 함

이문원(李文源, 1906~1969)
-전북 익산 출신. 전주사범 졸업
-제헌 국회의원(1948.5~1950.5) <선거구> 전북 익산을, <소속정당> 무소속
-교원생활 10년, 사회민주당 중앙집행위원, 한독당 조직부장, 대동청년단 조직부장,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징역 12년 선고, 6.25 전쟁 후 출옥, 북에서 사망

김약수(金若水, 1889~1964)
-경남 동래 출신. 경남고 졸업, 일본대 사회과 졸업
-제헌 국회의원(1948.5~1950.5) <선거구> 동래, <소속정당> 조선공화당
-다년간 항일투쟁, 길림군정서 군사위원, 재조선인 사상단체인 북성회 조직위원장(1920), 기관지 <대중시보> 경영, 경성에서 <일간대중> 발행(1937), 조선공화당 위원장, 한민당 간부, 국회 부의장,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징역 8년 선고, 복역 중 6.25 전쟁 후 출옥, 북에서 사망

박윤원(朴允源, 1908~1994)
-경남 출신. 여수 수산중학 졸업, 동경 수산강습고 졸업, 만주 대동대학 졸업
-제헌 국회의원(1948.5~1950.5) <선거구> 남해, <소속정당> 무소속
-수산시험장에서 연구 생활, 남해 귀환동포회 총무, 기사 생활 9년,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징역 8년 선고, 복역 중 6.25 전쟁 후 출옥, 북에서 사망

김옥주(金沃周, 1915~1980)
-전남 광양 출신. 양정고보 졸업, 조도전대학 법학부 졸업
-제헌 국회의원(1948.5~1950.5) <선거구> 광양, <소속정당> 무소속
-국회 프락치 사건에 연좌, 징역 6년 선고, 복역 중 6.25 전쟁 후 출옥, 재북평화통일협회 상무위원(1957) 역임, 그 후 숙청되었다고 함(1959)

강욱중(姜旭中, 1908~1969)
-경남 함안 출신. 중학교 3년 중퇴
-제헌 국회의원(1948.5~1950.5) <선거구> 함안, <소속정당> 민족청년단
-변호사, 조선법학회 상무이사, 인권옹호동맹 조선지부 중앙위원, 민족청년단 이사,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징역 6년 선고, 투옥 중 6.25 전쟁 후 출옥, 북에서 사망

김병회(金秉會, 1916~1987)
-전남 출신. 소학교 졸업
-제헌 국회의원(1948.5~1950.5) <선거구> 진도, <소속정당> 무소속
-보문(普文) 시험 합격, 목포일보 편집장, 대한노총 목포지부 간사,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투옥, 징역 6년 선고, 6.25 전쟁 후 출옥, 북에서 사망

황윤호(黃潤鎬, 1913~1977)
-경남 출신. 진주중학교 졸업
-제헌 국회의원(1948.5~1950.5) <선거구> 진양, <소속정당> 무소속
-면장 생활 3년, 국회 프락치 사건에 연좌, 징역 6년 선고, 6.25 전쟁 후 출옥, 북에서 사망

최태규(崔泰奎, 1919~2009)
-강원 정선 출신. 동경전수대 법학부 3년 수료
-제헌 국회의원(1948.5~1950.5) <선거구> 정선, <소속정당> 무소속
-전재동포 원호회 소비조합이사, 대동신문 기자, 국회 프락치 사건에 연좌, 징역 3년 선고, 복역 중 6.25 전쟁 후 출옥, 납북

이구수(李龜洙, 1912~1967)
-경남 고성 출신. 소학교 졸업
-제헌 국회의원(1948.5~1950.5) <선거구> 고성, <소속정당> 무소속
-기자 생활 4년, 국회 프락치 사건에 연좌, 징역 3년 선고, 복역 중 6.25 전쟁 후 출옥, 납북

서용길(徐容吉, 1912~1992)
-충남 아산 출신. 연희전문학교 문과 졸업
-제헌 국회의원(1948.5~1950.5) <선거구> 충남 아산, <소속정당> 무소속
-조선화약총포주식회사 근무(1943~1946),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강사(1947~1948),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투옥(1949), 징역 3년 선고, 성균관대학교 교수, 자유당 입당(1959)

배중혁(裵重赫, 1920~1991)
-경북 봉화 출신. 동경 태동중학 졸업
-제헌 국회의원(1948.5~1950.5) <선거구> 봉화, <소속정당> 대동청년단
-목재회사 근무, 대동청년단 경리이사국장,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투옥(1949), 징역 3년 선고, 복역 중 6.25 전쟁 후 출옥, 북에서 사망

신성균(申性均, 1905~1967)
-전남 곡성 출신. 일본 와세다대학 전문부 졸업
-제헌 국회의원(1948.5~1950.5) <선거구> 전북 전주, <소속정당> 무소속
-전남 곡성 면장, 한독당 전북도당 위원장, 해방 후 곡성군 건준위원장, 전북도내 각종 정치단체에 관여,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투옥(1949), 징역 3년 선고, 6.25 전쟁 후 출옥, 북에서 사망
*월북한 분들이 돌아가신 연대는 2004년 북한이 공개한 평양시 룡성구역 ‘재북인사의 묘’에서 확인된 내용입니다.


함세웅 신부 _ 1968년 천주교 신부가 된 뒤 줄곧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일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1974년)을 주도하는 등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2012년 현역 은퇴 뒤에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연대의 발걸음을 계속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 현대사와 관련해 쓴 글과 붓글씨를 싣는다.

<2021-11-08> 한겨레

☞기사원문: 억울과 참담이 쌓이는 국회 프락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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