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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윤보선 생가에 얽힌 진실, 친일 안내문 설치는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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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마을 주민들의 ‘연좌제’ 주장이 맞지 않는 이유

▲ 충남 아산시 둔포면 신항리 소재 윤보선 전 대통령 생가 ⓒ 최홍대

충남 아산시 둔포면 신항리의 윤보선 생가 등에 친일 행적 안내문을 설치하는 문제로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현지 주민들이 “헌법은 연좌제를 금지한다”며 “독립운동을 한 대통령에게 친일파로 연좌하는 거냐?”며 반발하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2016년 <순천향 인문과학논총> 제35권 제4호에 게재된 김일환 순천향대 아산학연구소 연구실장의 논문 ‘아산 신항리 근대문화 사적지의 현황조사 연구’는 윤보선 생가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윤치소가 1920년대 지은 집으로 추정한다”고 설명한다.

윤치소(1871~1944)는 윤보선(1897~1990)의 아버지다. 충남도의회 친일잔재청산특위 자문위원들이 안내문 설치를 건의한 것은 윤보선 때문이 아니라 윤치소 때문이다. 이 건의가 나온 것은 아산시가 추진하는 윤보선 대통령 기념관 등의 근대문화마을 조성사업에 충남 재정이 투입되고 있고, 이 마을에서 윤치소를 비롯한 친일파 4명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윤치소의 행적

대한제국시대에 경성신문을 창간하고 중추원 의관(議官, 의원)이 된 윤치소는 광장주식회사 감사역, 대한천일은행 감사역, 광업주식회사 사장 등을 지낸 뒤 일제강점기에 조선상업은행 감사, 분원자기주식회사 감사, 경성직뉴주식회사 사장, 동양서원 경영자, 광업주식회사 전무취체역, 조선교육회 이사, 경성부 학교평의원 등을 역임했다.

그의 사회·경제적 배경은 아들 윤보선의 성장기에 대한 서술에서도 나타난다. 정윤재·심지연·김영수가 공저한 <장면·윤보선·박정희>는 윤보선의 유년기에 관해 “대대로 벼슬을 해온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기에 그는 부러운 것을 모르고 유년 시절을 보냈다”며 “서울에도 집이 있어 유년 시절 그는 형편에 따라 아산과 서울을 번갈아 오가며 살았고, 집에 독선생을 따로 두고 한문을 배울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고 설명한다. 여느 아이들처럼 서당에 가서 한문을 배우지 않고 가정교사를 모셔놓고 한문 교육을 받을 정도로 여유로웠던 것이다.

윤치소는 그 같은 사회·경제적 배경을 선한 용도로 사용하지 못했다. 그것을 세상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일본제국주의를 위해 사용했다. 충청남도 의회가 친일행적 안내문을 붙이고자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의 친일행위가 일반적인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은 윤치소에 관해 “조선총독부 중추원 찬의(贊議)를 지낸 윤치오의 동생이자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을 지낸 윤치영의 형이다. 남작 윤웅렬은 백부다”라고 소개한 뒤 윤치소가 만 53세 때 있었던 일을 이렇게 소개한다.

1924년 4월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주임관대우 참의에 임명되어 1927년 4월까지 재임하면서 매년 600원의 수당을 받았다.

홍인근 국제한국연구원 연구위원의 <이봉창 평전>에 따르면, 1901년 태생인 이봉창 의사가 1915년에 취직한 제과점에서는 식사 제공에 월급 7~8원이 나왔고 1917년에 취직한 약국에서는 숙식 제공에 월 기본급 10원이 나왔다. 1920~1924년에 용산역에서 정식 역부(驛夫)·전철수·연결수로 근무할 때는 월 40~48원을 받았다.

풍부한 수입원이 있었던 윤치소에게는 연봉 600원이 큰돈이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이 금액은 용산역 엔지니어의 연봉보다 많았다. 총독부가 이만한 연봉을 지급한 것은 그에 상응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총독부에 자문 정도 해준 것을 대단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일본은 전쟁을 통해 대한제국을 멸망시킨 게 아니기 때문에 대한제국 기득권층의 협력을 받지 않고는 이 나라를 지배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한국인 대중은 핍박하면서도 지주나 양반 출신은 우대했다.

명문가 출신 독립운동가인 우당 이회영이 특별히 존경을 받는 이유 중 하나는 특권층 출신의 독립운동가가 희소하다는 사실에 있다. 특권층 대부분이 총독부의 대우에 만족하며 일제의 지배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기득권층의 협조 없이는 한국 지배가 힘들었기에, 한국인 유력자들의 ‘자문’이 총독부에 기여하는 바는 적지 않았다. 이 자문은 엄밀히 말하면 ‘지지’였다. 한국인 기득권층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기관인 중추원에 힘을 보태면서 용산역 연결수 이봉창보다 더 많은 연봉을 받았다는 것은 윤치소의 친일이 그저 형식적인 것에 그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그런데 윤치소는 ‘돈을 받으면서 하는 친일’만 한 것은 아니다. ‘돈을 내면서 하는 친일’에도 적극 가담했다. <친일인명사전>은 이렇게 설명한다.

1937년 8월 경성 종로경찰서에 국방헌금 2000원을, 9월에는 애국기 경기호(號) 건조 비용으로 1000원을 헌납했다.

그 자신이 국방헌금이나 전투기 건조 비용을 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내도록 권유하는 일에도 가담했다. 1938년 4월에는 조선예수교 장로교도 애국기 헌납기성회의 부회장이 됐고, 1941년 11월에는 이 단체의 서기가 됐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이 아니라 일왕(천황)에게 헌금하도록 부추기는 일도 했던 것이다.

윤보선도 예외 없다

▲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미국 방문 결과 보고 및 귀국 인사차 윤보선 대통령을 예방했다(1961. 11. 27.). ⓒ 국가기록원

이 정도 수준의 친일이라면, 당연히 세상에 널리 알려야 한다. 더군다나 윤보선 생가 등을 관광자원화하는 근대문화마을조성사업에 충남 도비가 투입되고 있으므로 친일행적 안내문을 설치하는 것이 과도하다고 볼 수도 없을 것이다. 반대하는 주민들은 “헌법이 연좌제를 엄격히 금지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 사안은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는 헌법 제13조 제3항과 무관하다.

윤치소의 친일행적을 알리는 것이 아들 윤보선에 대한 평가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줄 수는 있지만, 그 정도 영향은 친일파를 가족이나 친족으로 둔 모든 사람들이 다 감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영향까지 차단하고자 하게 되면, 가족이나 친족을 둔 모든 범죄자들을 처벌할 수 없게 되는 문제점도 발생할 여지가 없지 않다.

정말로 헌법에 위반되는 것은, 독립운동가 출신 대통령을 아들로 뒀다는 이유로 그 아버지 윤치소의 친일이 부각되는 것을 막는 일이다. 우리 헌법은 제11조 제1항에서 법 앞의 평등을 규정한 데 이어 제2항 및 제3항에서 특수계급과 특권을 부인했다.

윤보선의 아버지라는 이유로 윤치소의 친일을 덜 드러내는 것은 특수계급과 특권을 부인한 헌법 제11조에 위반될 수도 있다. 이는 윤치소에게도 특권을 인정하는 것이고 윤보선에게도 특권을 부여하는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아산시와 충남도가 윤치소가 지은 주택을 관광자원화해주면서 그의 친일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헌법 위반이 될 여지가 있다.

우리 사회가 친일청산을 추구하는 것은 친일파나 그 혈족을 욕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는 우리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역사적 요인을 도려내고 그 문제점을 치유하기 위한 것이다. 가문의 명예 차원에서 바라볼 게 아니라 대아(大我)적 관점에서 받아들여야 할 일인 것이다.

<2021-11-10>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윤보선 생가에 얽힌 진실, 친일 안내문 설치는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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