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보도자료] 동인문학상 폐지 촉구 작가 행동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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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동인문학상 폐지 촉구 작가 행동
일시: 2021년 11월 26일(금) 오후 4시
장소: 조선일보 미술관(동인문학상 시상식장)
내용: 조선일보는 친일문인을 기념하는 동인문학상을 폐지하라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학연구회(회장 맹문재 교수, 안양대)와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위원장 송경동 시인)는 11/26일 동인문학상 시상식장인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친일문인 김동인을 기리는 동인문학상을 폐지하라’는 주제로 집회를 열 계획이다.

한국 문학계에는 여전히 ‘친일문인’을 기리는 기념사업과 함께 ‘친일문인기념 문학상’이 성황리에 운영되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그들은 일제를 적극 옹호하고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자고 했던 문인들이다. 그들은 단지 문화예술을 통한 일제에 협조한 행위를 넘어서서 일본제국주의와 식민지 전쟁의 앞잡이 노릇을 한 ‘전범’이자 매국노들이었다. 특히 김동인은 대표적인 친일문인으로 그의 친일행위는 그 강도가 어느 누구보다도 적지 않고 그런 김동인을 기리는 문학상을 버젓이 주고받는 행위에 대해 우리는 더 이상 방기할 수 없어 친일문인기념문학상 청산에 뜻을 모으게 되었다.

동인문학상 주관사 조선일보는 거액의 상금으로 친일문인을 기리는 데 작가들을 줄 세우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학연구회와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는 지난 10/23일 서울글로벌센터 9층 국제회의장에서 소장 학자 중심으로 ‘문단의 적폐, 친일문인기념 문학상 이대로 둘 것인가’란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한 바 있다. 여기서 우리는 조선일보에 친일문인기념 문학상과 관련해 언제든지 토론할 용의가 있고 속히 토론의 장으로 나오기를 촉구한다고 밝혔다.

민족문학연구회와 자유실천위원회는 코로나 시국에 정부의 사회적 거리두기에 맞춰 집회를 열 계획이다

2021년 11월 26일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학연구회 /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동인문학상 폐지 촉구 작가 행동

<순서>
독립운동가와 순국선열 및 항일 문인에 대한 묵념
성명서 발표
논문 낭독 – 좀비 동인문학상을 폐지하라 (최강민 교수 우석대)
항일시 낭독
구호 제창

[성명서]

조선일보는 친일문인김동인을 기리는 동인문학상을 폐지하라!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기로부터 해방된 지 70년이 넘었다. 그러나 아직도 일제의 식민잔재는 청산되지 않았다. 남북분단과 전쟁, 그리고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친일세력들이 오히려 득세하는 무대가 만들어졌다.

한국의 문학계에는 여전히 ‘친일부역문인’을 기리는 기념사업과 함께 ‘친일문인기념 문학상’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가 일본의 침략에 의해 36년 간 식민통치를 받는 동안, 그들은 일제를 적극 옹호하고 일본국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자고 했던 문인들이다. 그들은 문필가라기보다는 적국의 편에 서서 민족을 배반한 부역자들이다. 그들은 단지 문화예술을 통한 일본에 협조한 행위를 넘어서서 일본제국주의와 식민지 전쟁의 앞잡이 노릇을 한 ‘전범들’이었다. 전범은 처벌되어야 한다. 그러나 친일문인들은 전혀 단죄되지 않았다. 해방 이후, 친일문인들은 오히려 한국문단의 권력자가 되었다.

해방 이후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가 설립되어 일제에 협력한 자들을 처벌하자는 ‘반민족행위처벌법’이 만들어졌지만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승만 정권은 반민특위 위원들을 ‘빨갱이’로 몰아 탄압했다. 친일파 경찰들을 동원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했다. 결국 반민특위는 해체되었고, 친일파 청산의 기회는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만일 반민특위가 제대로 된 활동을 했다면,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는 물론이고 ‘일본에 직간접적으로 협력한 문인’들은 결코 온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친일문인들, 그들의 제자들, 그리고 친권력적인 문인들, 교수들, 비평가들은 “친일행적 때문에 그들의 문학적 자산이 가려져서는 안 된다.”는 이유를 들어 그들을 옹호했다. 그들은 단 한마디의 사과나 반성도 없었다. 그들의 작품은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에 실렸다. 친일문인들이 죽으면, 그들을 기리는 ‘문학상’이 앞다투어 만들어졌다. 한국의 일제 강점기 36년과 프랑스의 나치 지배 3년을 비교해 보면, 프랑스는 나치 부역 문화예술인들에게 처절하리만치 가혹했다. 단 한 줄이라도 부역혐의가 있으면 용서하지 않았다. 한국은 반민특위가 잡아들인 400여명의 친일파 중에 처벌받은 자는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친일문인 이름으로 된 기념문학상이 넘쳐나고 있다.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식민지 지배를 겪고 강대국의 침략을 받은 세계의 수많은 국가 중에서, 자기 나라를 배반하고 민족을 팔아먹은 범죄자, 역사반역자, 민족반역자들을 두둔하고 그들을 기리는 기념상을 만들어 찬양하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 어디에 있는가? 대한민국 말고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우리 민족은 오랫동안 민주주의를 빼앗기고 친일세력들의 정치적 압제에 시달려 왔다. 그중 인간의 엄중한 삶과 문학의 존재가치를 스스로 증명해야 할 문학인들이 가장 먼저 삐뚤어졌다. 문인들이 문학정신을 왜곡하고 민족의 정신사를 말살하고 문학이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마저도 오염시켰다. 여기에는 보수언론이 문단에 개입하여 문화적 지배이데올로기를 행사하려는 의도적인 음모가 들어있다. 그런데 누구보다도 올바른 양심을 지키고 문학적 자존감을 지녀야 할 작가들이 이같은 공모에 영혼을 팔고 있다. 끊임없는 국론분열을 획책하고, 민주주의의 근본을 훼손하고, 국민갈등을 부채질하고, 친일보수 편향적인 여론책동에 몰두하는 조선일보에서 주는 친일문인기념상의 대표격인 ‘동인문학상’을 한국의 소설가들은 그렇게도 받고 싶은가?

김동인이 누구인가? 김동인은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를 제 발로 찾아가서 문단사절을 조직해 중국 화북지방에 주둔한 ‘황군’을 위문할 것을 제안했다. 그 제안이 받아들여져 그는 ‘북지황군위문 문단사절’로 활동했다. 그는 조선총독부의 외곽단체인 조선문인협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내선작가간담회에 출석하여 ‘내선일체’를 선동했다.

김동인이 누구인가? 그의 문필활동을 보면,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선전 선동하면서 일제에 협력하는 글을 썼다. 그는 ‘만주사변’을 통해 조선인도 내선일체가 되어 국민의식을 높여가게 되었다고 했다. 다시 태평양전쟁이 발발되자 “조선인도 다만 ‘일본시민’일 따름이다. 한 ‘천황폐하’의 아래서 생사를 같이 할 백성일 뿐“이라고 했다. 그는 조선인 학병이 첫 입영을 하게 되자 “조선에도 드디어 징병제가 실시됐다. 우리나라 헌법은 병역을 국민의 의무로 잡았다”고 주장했다. “병역이란 단지 국민의 의무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국민의 특권이다. 조선인의 사상이 과연 황국신민이 되기에 충분한가, 그 사상까지 완전한 일본인적 사상을 가진 자가 아니면 안 된다”고 했다.

김동인이 누구인가? 그는 “우리나라의 국체에 대하여 충분한 이해를 가지고 이런 국체를 가진 국가의 우수한 병사가 되기를 명하는 바이다. 내 몸은 이제부터는 내 것이 아니요 또는 가족의 것도 아니요 황공하옵게도 폐하의 것이며 지금 폐하의 어본부로 완적을 멸하려는 성검을 잡고 일어선 자각을 가지고 나서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또 학병제야말로 “조선인의 황민화의 정도, 조선인의 일본인적 애국심의 강도를 다루어 보는 저울”이라고 했다.

김동인이 누구인가? 그는 국책문학으로서 ‘국민문학’을 선전하면서 문학인의 ‘문필보국’에 앞장섰다. ‘애국열과 보국정신을 붓의 힘을 빌어서 국민에게 환기시켜 천황폐하의 은혜와 나라의 은혜에 대해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고 싶은 것이다.’라고 결의하고, 전쟁 막바지까지 ‘국민문학’에 대한 문학인의 자세를 설교하는 한편 문화인과 지식인의 선도적 역할을 선전함으로써 문필보국의 전범이 되었다. 이 밖에도 그는 친일소설이나 산문을 여러 편 남겼다.

이러한 반민족적, 반인륜적, 반문학적 행적을 가진 문인을 문학상으로 기념해서야 되겠는가? 그러므로 동인문학상은 이제 문학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앞에 놓인 역사의 문제이다. 문단적폐 청산의 중대한 과제인 것이다.

문학은 문학인들만의 것이 아니다. 이 나라의 공동체 구성원인 국민 모두의 것이다. 일본의 아베 수상이 우리를 믿지 못할 나라로 매도하고 수출을 금지하는 행위 또한 우리가 친일 잔재를 청산하기는커녕 이런 친일파를 기리는 행위를 목도해왔기에 가능하다는 추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인문학상을 주관하고 있는 조선일보사는 언론사로서 분별력이 있고 역사정의에 대한 치욕을 안다면, 역사와 국민 앞에 사죄하고 더 이상 동인문학상을 운영하지 말라!
-동인문학상 심사와 수상에 참여하고 있는 문인들은 최소한의 고민도 없는가? 문학을 배우는 학생들에게, 후대의 작가들에게, 정말 부끄럽지 않은가?
-우리말을 가르치고 우리글을 쓰는 평론가, 대학교수, 소설가들은 국민 여론에 귀를 기울이고 ‘친일문인기념 동인문학상’ 심사와 수상을 당장 거부할 것을 촉구한다! 

조선일보는 친일문인기념문학상에 대해 토론할 의사가 있으면 언제든지 토론의 장으로 나오기를 바란다.

2021년 11월 26일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학연구회/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논문 낭독]

좀비 동인문학상을 폐지하라!

최강민 문학평론가,우석대 교수

1. 문학 적폐 청산과 민족 문학사 바로 세우기
한국에서 소설 분야의 3대 문학상은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이다. 이 중에서 특정 문인을 기념하는 문학상은 동인문학상과 이상문학상이다. 현재 논란이 되는 것은 김동인의 문학적 유지와 업적을 기리는 ‘동인문학상’이다. 보통 문학상과 관련한 논란은 심사의 불공정성과 객관성의 미흡, 적합하지 않은 수상작들로 인한 잡음 때문에 발생한다. 그러나 ‘동인문학상’의 경우 이와 같은 이유보다 문학상 자체의 정체성 문제로 인해 발생했다. ‘동인문학상’은 친일문인인 김동인을 기념하는 성격이기에 폐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동안 친일문학상에 대한 비판은 간헐적으로 제기되었지만 폐지 운동으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2016년 촛불혁명 이후 한국사회의 적폐를 청산하려는 움직임과 맞물려 친일문학상 폐지 운동은 시대적 과제가 되었다. 2017년 한국작가회의와 일부 문인들은 친일문학상 폐지 운동을 벌이면서 미당문학상 폐지를 집중적으로 주장했다. 2018년에는 ‘미당문학상’에 이어 ‘동인문학상’을 폐지하자는 운동을 중점적으로 하고 있다.

‘동인문학상’을 처음 만든 것은 장준하의 〈사상계〉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반일민족주의자인 장준하는 왜 ‘동인문학상’을 제정했을까? 대학교수인 정혜영은 칼럼에서 장준하가 김동인의 공과를 다양한 시각과 객관적 시각에서 판단한 결과 공이 더 많기에 제정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장준하 평전을 쓴 김삼웅은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장준하가 친일문학상을 제정 한 것을 치명적 오류라고 비판하면서도 〈사상계〉의 문학 담당 편집위원의 취향 때문에 동인문학상이 제정되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이들의 주장은 쉽게 공감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동인문학상’의 유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김동인의 문학적 업적을 강조하고,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김동인의 반민족적 배신행위를 강조한다. 양자는 현재 의견의 합일점을 찾지 못한 채 평행선을 그리고 있다.

〈사상계〉의 동인문학상은 〈사상계〉가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 탄압을 받고 경영상의 어려움에 직면하자 1968년부터 시상이 중단되었다. 중단되었던 ‘동인문학상’은 1979년에 동서문화사에 의해 부활된다. 동서문화사의 ‘동인문학상’은 1986년부터 중단된다. 조선일보사는 1987년에 동인문학상을 부활시켰다. ‘동인문학상’은 시상 주체가 벌써 3번이나 교체되었던 것이다. ‘동인문학상’ 폐지운동은 친일문인인 김동인과 ‘동인문학상’을 제정해 운영하는 시상주체에 대한 동시적인 문제 제기이다. 친일문학상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미당문학상’과 ‘동인문학상’에 폐지운동의 역량을 집중 시킨 것은 거대 언론사를 배경으로 시행중인 친일문학상이 가장 문제가 심각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거대 언론사가 친일문인을 단죄하기보다 문학상을 통해 우상화하는 데에 힘을 쏟 는 것은 일반인에게 반민족적 친일을 해도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잘못된 메시지를 전달할 위험성이 높다.

‘동인문학상’은 작고한 문인 이름을 내건 최초의 한국 문학상이었다. 문인을 기념한 문학상의 경우, 해당 문인의 문학적 업적을 매년 상기시키는 제도를 통해 작고 문인의 문학적 명성을 유지 확장시킨다. 작고 문인은 자신을 기념하는 문학상을 통해 일종의 후광효과를 얻게 된다. 김동인은 문학상이라는 후광효과 속에 친일경력이 축소 은폐된 채 근대문학의 선구자라는 문학정전이 될 수 있었다. ‘동인문학상’은 친일문인 김동인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어렵게 만드는 일등 공신이다. ‘동인문학상’은 김동인에게 과도한 상찬, 신비화, 우상화를 낳도록 만든 진앙지다. 이런 점에서 친일문학상 폐지운동은 과도하게 부풀려진 김동인을 객관적으로 성찰하기 위한 시발점이 될 수 있다. 또한 거대 언론사가 운영하는 친일문학상을 폐지하려는 운동은 친일문학상을 통해 자사의 친일역사를 은폐 축소시키거나 극우적 지배담론을 생산하려는 거대 언론사와의 싸움이기도 하다. 친일문학상 폐지를 통해 문학적폐를 청산하려는 움직임은 민족 문학사를 바로 세우려는 작업이기도 하다.

2. 사상계사의 동인문학상, 생존욕망과 반공주의
‘동인문학상’은 1955년에 사상계사가 처음 제정했다. 1955년은 한국전쟁이 끝난 지 불과 2 년의 시간이 지났을 뿐이다. 전후인 1950년대에 한국을 가장 강력하게 지배했던 것은 민주주의도 민족주의도 아니었다. 한국전쟁은 종료된 것이 아니라 잠시 쉬는 ‘휴전’이었다. 전후에 적대적 반공주의는 모든 것을 지배하는 최상위 지배 이데올로기였다. 친일세력들은 공산주의자와 싸워 대한민국을 지켜냈다는 반공주의 선전을 통해 자신들의 친일경력을 세탁시켰다. 북한의 좌파세력은 해방기에 친일세력을 청산해 근대민족국가의 적자임을 과시했지만, 남한사람들은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을 일으킨 북한의 좌파세력을 민족배신자 내지 원수로 규정했다. 이런 상황에서 전후 시대에 친일파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북한의 좌파라는 오해를 살 수 있었다. 친일세력은 자신을 비판하는 존재를 향해 언제든 좌파 빨갱이라는 색깔론으로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955년에 제정된 동인문학상은 적대적 반공주의라는 시대적 환경 속에서 탄생할 수 있었다.

장준하는 한국전쟁 기간인 1952년에 국민사상연구원의 기관지였던 〈사상〉에 편집위원으로 참가했다가, 1953년 4월에 단독 인수하여 〈사상계〉로 개칭하여 월간종합교양지로 발간한다. 대학생을 포함한 지식인을 독자층으로 설정한 〈사상계〉는 민족통일, 민주주의, 민족주의, 경제발전, 새로운 문화 창조를 표방했다. 창간 당시 장준하는 무일푼에 가까웠기에 잡지의 발간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한국전쟁에서 일반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생존’이었다. 평안북도 선천 출생의 북한 출신인 장준하도 〈사상계〉의 생존을 위해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장준하는 1955년에 월남 지식인들을 끌어 모아 다수의 편집위원이 주도하는 편집체제로 시 스템을 바꿔서 독자층의 확대를 겨냥했다. 장준하는 〈사상계〉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당대 문화계의 왕좌였던 문학에 지면을 대폭 배정하기 시작한다. ‘동인문학상’의 제정은 문학 지면의 확대와 함께 독자를 배가시키려는 차원에서 기획된 것이다. 전후에 월남 문인들은 1954년 예술원 선거에서 남한 출신 문인들이 중심이 되어 북한 출신 문인들을 배제하는 사건을 경험했다. 월남 문인들은 북한 출신들이 뭉쳐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절박한 인식을 공유했다. 그래서 월남 지식인들의 아지트인 〈사상계〉에 모여 북한 출신 문인들의 생존을 담보하기 위한 문학제도인 문학상을 만들었던 것이다. ‘동인문학상’은 〈사상계〉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장준하의 의도, 김동리와 서정주로 대변되는 남한 출신 문인들과의 경쟁에서 생존하면서 문학권력을 확보하려는 심사위원의 욕망, 소외된 북한 출신 문인들을 챙겨주려는 서북지역주의(또는 범북한지역주의)가 낳은 것이다.

그렇다면 왜 ‘동인문학상’이었을까. 근대 단편소설의 개척자로서 손꼽을 수 있는 작가는 이광수, 김동인, 현진건 등이 있었다. 이 중에서 북한 출신 문인은 이광수와 김동인이다. 근대문학의 아버지라고 보통 이야기되는 이광수는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일제 말기 가장 대표적인 친일문인이었다. 〈사상계〉는 이광수를 북한 출신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는 있지만 대표적인 친일 문인인 이광수를 내세우기는 힘들었다. 또한 이광수는 1950년대 중반에 납북인지 월북인지 불분명했고, 생사도 제대로 확인되지 않았다. 반공주의가 작동하는 상황에서 이광수 문학상의 제정은 위험성이 너무 높았던 것이다. 1950년대 동인문학상 수상작들을 보면 당대 현실을 반영한 리얼리즘 작품들이 많이 선정되었다. 이런 점을 상기한다면 리얼리즘 소설을 쓰며 일제와 타협하지 않고 문인의 지조를 지키며 살다가 1943년에 사망한 현진건이 〈사상계〉에 어울리는 작고 문인이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현진건은 대구 출생으로 북한 출신이 아니었다. 또한 ‘동인문학상’을 심사하는 심사위원들 대부분이 친일경력을 갖고 있었기에 현진건은 심사위원들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근대 단편소설의 개척자인 김동인은 평안남도 평양 출신으로 당시 한국전쟁 중 피난 중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유족들은 병으로 인해 피난을 가지 못한 채 병사한 김동인의 죽음의 진실을 당시에 알리지 않았다.) 김동인의 죽음은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한국전쟁으로 인해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북한 출신 문인의 대표적 상징이 된다. 전후의 반공주의는 일제강점기에 김동인이 저지른 반민족적 친일행적의 심각성을 축소시키면서 반공주의자인 김동인을 우상화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또한 한국전쟁 중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김동인에 대한 동정적 인정주의도 한몫을 했다. 그 결과 장준하와 문학상 제정을 주장하는 문인들은 김동인으로 의견일치를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제1회 동인문학상 심사위원은 김기진(충청북도 청주시), 백철(평안북도 의주), 이무영(충북 음성), 계용묵(평안북도 선천), 정비석(평안북도 용천), 이헌구(함경북도 명천), 주요섭(평안남도 평양), 전영택(평안남도 평양), 최정희(함경북도 성진)였다. 이 중에서 김기진, 이무영을 빼고는 모두 북한 출신 문인들이다. 1950년대 동인문학상 수상자도 모두 북한 출신 문인들이었다. 〈사상계〉의 동인문학상은 김동인의 문학적 업적을 기념하는 목적 외에 〈사상계〉 독자의 확대와 영향력 증가, 북한 출신 문인들의 문학적 입지 구축, 심사위원들의 문학 권력 확보라는 소기의 목적을 모두 달성했다. 〈사상계〉는 박정희 군사정권의 탄압 속에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1968년부터 ‘동인문학상’ 시상을 중단한다. 〈사상계〉는 1970년에 김지하 필화사건을 계기로 끝내 폐간을 맞게 된다. 이와 동시에 〈사상계〉의 ‘동인문학상’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3. 조선일보사의 ‘동인문학상’과 친일경력의 세탁
동서문화사는 1979년에 박정희 군사정권의 탄압으로 심장이 정지된 ‘동인문학상’을 심폐소생술로 부활시킨다. 동서문화사는 제13회 ‘동인문학상’ 수상작으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선정하며 화려한 부활을 알렸다. 동서문화사는 동인문학상의 부활이 김동인의 문학적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였을 뿐 실제 목적은 〈사상계〉가 제정하여 문학적 권위를 쌓아온 동인문학상을 통해 월간 〈동서문화〉와 동서문화사의 문학적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동서문화사가 ‘동인문학상’을 부활시킨 1979년은 ‘동인문학상’을 처음 제정한 1955년과는 질적으로 다른 시대였다. 1970년대 말은 한국전쟁을 겪은 지 많은 시간이 흘렀고, 사람들은 군사독재정권의 전가 보도로 사용된 반공주의와도 비판적 거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동인문학상’을 처음 제정할 당시 친일세력이 독재정권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면서 대한민국의 지배층으로 확고하게 성장한 시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친일문제의 심각성이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재야사학학자 임종국은 1966년에 『친일문학론』을 발간했고, 비판적 지식인들은 이 책을 1970년대에 읽으면서 친일문제의 심각성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동서문화사의 ‘동인문학상’은 사상계사의 ‘동인문학상’과 달리 친일문학상에 대한 논란을 점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동서문화사의 ‘동인문학상’은 1985년 제17회 수상작인 정소성의 「아테네 가는 배」를 마지막으로 중단된다.

조선일보사는 1987년에 사망한 ‘동인문학상’을 또 한 번 소생시켰다. 동서문화사의 ‘동인문학상’은 〈사상계〉의 역대 수상작의 특성을 이어받으려는 경향이 강했다. 김동인의 〈감자〉 계열에 속하는 작품들이 수상의 영예를 많이 가졌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조선일보사가 시행한 ‘동인문학상’은 김동인의 문학특성 중 개인주의, 유미주의 계열의 작품들이 주로 수상을 했다. 이것은 조선일보사의 ‘동인문학상’이 〈사상계〉가 제정한 ‘동인문학상’과 명칭은 같지만 성격이 다른 문학상임을 보여준다. 조선일보사가 시행한 ‘동인문학상’ 수상작은 1987년 제18회 유재용의 「어제 울린 총소리」부터 시작하여 최근 2017년에는 김애란이 창작집 『바깥은 여름』으로 수상했다. 조선일보사는 2003년에 동인문학상 수상작품집 모음을 여러 권의 단행본으로 출간한다. 1956년부터 1999년 수상작까지 실린 이 작품집 모음에 흥미로운 부분은 책 뒷부분에 있는 ‘김동인의 생애’라는 연표이다. 이 연표만을 보면 김동인이 친일을 했는지 안했는지 일반 독자들은 알기 어렵다. 일반 독자들은 조선문인보국회가 친일단체라는 것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동인을 제대로 알려주는 목적에서 연표를 작성했다면, 조선문인보국회 간사로 친일을 했다는 사실을 연표에서 간략하게 언급했어야 했다.

김동인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친일 행각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김동인은 히가시 후미히토로 창씨개명을 했고, 1939년에 북지황군 위문 문단사절로 중국에 다녀오기도 했다. 조선일보사는 김동인의 친일행적을 가급적 은폐시키려는 의도를 연표 기재에서 보여준다. ‘김동인의 생애’라는 연표에서 천황 모독죄로 약 반년 동안 헌병대에서 옥살이 했다는 언급이 있다. 이 부분은 김동인을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아니라 일제에 맞선 애국지사라는 이미지를 왜곡되게 전달한다. 김동인의 천황 모독죄는 애국심의 차원에서 한 것이 아니라 말실수가 낳은 참사였다. 감옥에서 풀려난 이후 김동인은 일제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해 더 많은 친일 행적을 보여주었다. 내선일체와 황민화, 학병 권유를 선전하는 글을 썼고, 친일소설인 『백 마강』도 창작했다. 조선일보사는 ‘김동인의 생애’라는 연표에서 김동인이 1947년에 좌익을 규탄하는 데 필봉을 휘둘렀다는 언급을 한다. 이것은 김동인이 반공주의자로서 좌익과 투쟁했다는 투사의 이미지를 만든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을 가지 못해 자택에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연표는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한국전쟁으로 인해 비극적인 죽음을 당한 반공주의 문인의 이미지를 형성한다. 조선일보사가 연표를 통해 보여준 전략은 김동인의 친일행위를 최대한 은폐하면서 반공주의자 김동인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이것은 조선일보사가 ‘동인문학상’을 운영하는 방식이 그대로 투영되어 나타난 것이다. 조선일보사는 왜 1987년에 동인문학상을 뒤늦게 부활시켰을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일보사가 동인문학상을 부활시킬 수 있는 시대적 환경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사상계사의 ‘동인문학상’은 박정희 군사정권의 탄압으로 인해 없어졌다. 군사정권이 지속되 는 상황에서 조선일보사는 ‘동인문학상’을 부활시키는 데에 부담감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1987년은 6·10민주항쟁이 일어났고, 직선제를 수용한 노태우가 당선되던 해이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조선일보사는 정권의 눈치를 덜 보면서 ‘동인문학상’을 부활시킬 수 있었다. 둘째, 〈조선일보〉는 〈사상계〉처럼 북한 출신 사람들이 모여 만든 언론사였기 때문에 지역주의를 매개로 한 동지적 연대 속에 ‘동인문학상’을 부활시켰던 것이다. 실제로 1950년대와 60년대에 〈사상계〉와 〈조선일보〉는 밀월 관계였다. 김동인도 〈조선일보〉 학예부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같은 북한 출신이라는 지역주의와 김동인과의 특별한 인연 등은 조선일보사가 동인문학상을 부활시킨 계기를 제공했다. 셋째, 한국의 최고 문학상으로 자리한 ‘동인문학상’을 통해 문학계와 사회에 〈조선일보〉의 영향력을 증가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1등 신문이 되고자 했던 〈조선일보〉는 동인문학상을 통해 문학 독자를 신문 구독자로 바꾸려는 산술적 계산으로 ‘동인문학상’을 부활시켰던 것이다. 넷째, 동인문학상을 통해 〈조선일보〉에 우호적인 유명문인들을 확보하려는 전략이었다. 동인문학상 심사자, 수상자, 수상을 꿈꾸는 소설가들은 〈조선일보〉에 우호적이거나 적대적 태도를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일보〉는 동인 문학상이라는 당근을 통해 자사에 불리한 글을 쓸 수 있는 잠재적 문인들을 단속하고 관리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일보사가 동인문학상을 부활시킨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것 외에도 또 하나 결정적 이유가 존재한다. ‘동인문학상’을 통한 김동인의 친일경력 세탁과 문학적 우상화는 〈조선일보〉 의 중간 창업자인 방응모의 문제와 바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방응모는 1920년대에 금광으로 돈을 벌었고, 그렇게 번 돈으로 1933년에 〈조선일보〉를 인수해 적자 상태의 신문사를 크게 성장시켰다. 방응모는 중일전쟁 이후 친일단체 참여, 일제 군국주의 찬양, 친일 논설 쓰기 등 반민족적 친일행위를 했다. 방응모는 해방 이후 반공주의자로 변신했고, 한국전쟁 중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방응모의 행적은 바로 김동인의 삶과 유사한 부분이 많다. 김동인과 방응모는 일제강점기에 친일 인사였지만 해방 후 반공주의 투사로 변신했고, 한국전쟁 중 모두 사망했다. 고향도 같은 북한 출신이다. 이러한 삶의 궤적에서 김동인과 방응모는 닮은꼴이다.

여기에서 하나의 추론이 가능해진다. 〈조선일보〉는 ‘동인문학상’을 통해 김동인을 우상화·정전화 하면서 〈조선일보〉의 방응모를 우상화·정전화 하는 대리체험과 대리만족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동인문학상’을 통한 김동인에 대한 우상화와 문학 정전 만들기는 곧 오늘의 1등 신문인 〈조선일보〉를 낳게 한 방응모의 우상화와 언론 정전 만들기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4. 친일문학상 폐지운동과 역사적 재평가 작업
1998년 최장집 교수 사건과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국내 진보세력은 안티조선 운동 을 시작한다. 안티조선운동은 〈조선일보〉의 반민주주의적 행태, 기득권 세력 옹호, 사실관 계 왜곡 보도, 친독재정권 등을 근거로 제시하며 〈조선일보〉 구독 거부, 불매운동 등으로 표출되었다. 〈조선일보〉는 자사를 공격하는 안티조선운동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동인문학상의 상금을 5천만원으로 상향하고 종신 심사위원제를 도입했다. 매년 8~10회 심사 독회를 실시하고 이것을 지면에 게재하는 이벤트도 했다. 이러한 〈조선일보〉의 공격적 대응은 안티 조선운동에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도 1등 신문의 지위를 박탈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친일문학상 폐지운동은 친일문인에 대한 비판이자 친일문학상을 운영하는 거대 언론사나 출판사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친일문인 문학상 폐지를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서 일부는 친일행위를 비판하면서도 해당 문인의 문학적 성과는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 주장은 친일문인의 문학적 업적이 대단히 우수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친일문인인 서정주와 김동인의 문학작품이 뛰어나다는 미학적 판단은 자발적이라기보다 친일문인들이 만든 교과서, 문학을 보는 시각, 문학담론을 지속적으로 학습한 결과물이다. 김동인의 선구자적인 문학 활동은 인정해야겠지만 그것이 문학 텍스트의 우수성을 자동적으로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20세기 전반기와 21세기 초는 문학 텍스트의 미학성을 평가하는 문학적 기준도 조금 변했다. 지금의 문학적 기준을 과거의 문학작품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곤란하지만, 그렇다고 현재의 문학적 기준을 아예 외면한 채 과거의 기준대로 문학작품을 평가해서도 곤란하다. 문학사는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유동적 존재이다.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새로운 문학 정전이 탄생할 수 있고, 기존 문학 정전에 대한 재평가도 가능하다. 이 끊임없는 문학사적 대화와 재평가의 과정을 통과했을 때 불멸의 고전이, 정전이 탄생할 수 있다. 김동인은 근대 문학의 선구자라는 과도한 상찬과 동인문학상을 통한 우상화와 신비화로 인해 이러한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동인문학상 폐지운동은 시대적 정당성을 갖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이것을 추진하는 과정에 서 다양한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무엇보다 과거 동인문학상을 심사하거나 수상했던 문인들과 친일문학상 폐지 운동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내부 갈등이 현재 발생하고 있다. 문인들이 친일문학상인 동인문학상을 거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동인문학상을 수상하는 것은 명예와 상금을 동시에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문인들이 많은 실정에서 5천만 원이라는 상금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결코 무시할 수가 없다. 또한 대중적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입장에서 동인문학상 수상은 대중들에게 자신들의 인지도를 높이는 결정적 계기가 될 수 있다. 동인문학상 수상 포기는 이러한 모든 것을 포기해야하는 실존적 결단이 된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들도 전통 있는 문학상을 심사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문학적 명성을 높일 수 있었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동인문학상’ 폐지운동은 쉽지 않은 문제가 된다. 이것은 친일문학상인 ‘동인문학상’을 폐지하지 못하고 계속 수명을 연장시키는 악순환을 만든다. 이제는 누군가가 나서서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조선일보사가 ‘동인문학상’을 계속 시행하는 상황이라면 문학적 진정성과 자존심을 가진 문인들이 결단할 수밖에 없다. 유명 문인들의 심사 거부와 수상 거부는 동인문학상의 생명을 끊는 총알이 될 수 있다. ‘동인문학상’이 제공하는 명성과 상금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자신의 문학적 길을 고고하게 걸어가는 삶의 자세는 문학적 가치와 문인의 삶을 새롭게 재구성시킨다.

‘동인문학상’은 오랫동안 김동인을 홍보해왔다. 이제 거대 언론사가 ‘동인문학상’을 통해 김동인의 문학적 업적을 알려주지 않아도 상당수의 국민이 김동인의 이름을 알고 있다. 따라서 김동인의 문학적 업적을 널리 알리려는 목적으로 ‘동인문학상’을 계속할 필요가 없다. 김동인 과 〈조선일보〉가 범북한지역주의라는 공통점 때문에 조선일보사가 의리 차원에서 ‘동인문학 상’을 계속 시행한다면 시대착오의 구시대적 발상이다. 〈사상계〉의 ‘동인문학상’은 소외된 북한 출신의 문학적 지분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분단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거의 대부분이 남한 출신의 문인이 되었다. 이제 북한 출신 문인들의 문학적 지분을 확보하기 위해 ‘동인문학상’을 계속 운영할 필요가 없어졌다. 동인문학상을 폐지하더라도 〈조선일보〉의 대사회적 영향력이 갑자기 흔들릴 가능성도 없다. 오히려 ‘동인문학상’을 유지함으로써 생기는 문학적 논란이 〈조선일보〉의 명성에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더 높다. 소설가들은 전통이 있고 상금도 많은 ‘동인문학상’이 없어진다면 그 문학적 공백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걱정도 할 것이다.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하나의 유력 문학상이 없어진 상황에서 문학적 권위를 가진 새로운 문학상이 등장할 여지가 생긴다. 〈조선일보〉가 정말 한국문학의 발전을 위해 문학상을 만든 것이라면 친일문인인 김동인을 기념하는 ‘동인문학상’이 아니라, 차라리 ‘조선일보 문학상’을 만드는 것이 낫다. 

물론 수상자가 그 상을 거부할 수도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사회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법과 도덕에 위반되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김동인의 문학적 업적을 기념하는 ‘동인문학상’이 여전히 필요하다면 유가족들이 직업 운영하는 형식으로 계속 진행하면 될 것이다. 개인 자격으로 유가족이 동인문학상을 계속하겠다는 데에 누가 막을 수 있을 것인가? 만일 그런 상황이라면 수상할지 여부는 개별 문인들의 자유의사에 따르면 될 일이다. 조선일보사가 손을 떼고 유가족 개인이 동인문학상을 운영해도 최고의 한국 문학상으로 군림한다면 그것은 어찌할 수가 없다. 그것은 미래가 결정할 일이다.

5. 친일문학상은 폐지되어야 한다
과거 반공보수정권에서 친일 문인들은 단죄되지 않은 채 독재정권과 협력하면서 자신들의 문학적 지위를 유지 확대해왔다. 친일 문인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교과서에 수록해 문학의 정전으로 행세했고, 문학상 수상이나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문학권력을 행사했고, 대학 교수나 유명 문인이 되어 제자를 키우며 부귀영화를 누렸다. 친일 문인에게서 문학을 학습한 제자들은 그 문학을 주기도문으로 알고 살아왔다. 청산되지 못한 친일의 역사는 후대의 문학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친일문학상 폐지 운동은 친일문인이 친일문학상을 통해 최고의 문인으로 군림하는 잘못된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시정하려는 적폐청산 작업이다. 
‘동인문학상’은 김동인의 친일행적을 은폐시키면서 근대문학 개척자로서 위대한 문인이라는 이미지를 형성시키는 데에 결정적 공헌을 했다. 다른 친일문학상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역할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 현재 운영되고 있는 친일문학상은 동인문학상 외에도 노천명문학상, 모윤숙문학상, 팔봉비평문학상, 조연현문학상, 동랑희곡상이 있다.

만일 친일문학상을 폐지하지 않고 계속 운영하겠다면 전제조건이 있다. 친일문학상의 경우 문학상 시상식장이나 수상 소감문에서 친일문인의 문학적 업적을 찬양하는 잔치만이 아니라 작가의 친일행적을 상기하는 고통과 성찰의 시간도 함께 필수적으로 해야 한다. 친일문학상이 역사의 반면교사로서 활용된다면 친일문학상도 존재의 가치를 찾을 수 있다. 문학상은 매년 수상자를 배출하는 문학 제도를 통해 주기적으로 상징적 권위를 생산한다. 이 권위는 문학판을 지배하는 질서를 만드는 동력을 제공했다. 친일문학상이 만들어지고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문학상이 주는 혜택에 취해 공모한 문인들이 다수 존재했기 때문이다. 문학상 주관사, 심사위원, 수상자, 수상을 욕망한 문인들이 친일문학상에 생명을 불어넣었던 존재들이다. 친일문학상이 성황리에 계속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우리들의 침묵과 공모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친일문학상이 만들어낸 우상과 거짓의 판타지에 현혹되어 문학상을 찬양하거나 침묵했던 문인들의 고백성사가 필요한 시점이다.

시인 김수영은 불온함을 이야기했다. 불온함은 남의 이야기가 절대 아니다. 친일문학상이 주는 고액의 상금과 명성을 거부하고 자신의 문학적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것. 바로 그것이 개별 문인들이 구체적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는 불온함이다. ‘동인문학상’은 제정된 이후부터 현재까지 김동인의 친일행적을 기억하면서 역사의 반면교사로 삼았던 적이 없었다. 김동인에 대한 일방적인 찬양만이 존재했던 것이다. 문학상은 영구불변의 존재가 아니다. 사상계사가 처음 제정한 ‘동인문학상’은 생명을 다하고 소멸했다. 현재 조선일보사가 부활시킨 동인문학상은 이미 사망한 ‘동인문학상’을 억지로 되살려 자신의 문화적 지배력을 유지 확장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조선일보〉의 친일 행적을 은폐 축소키는 문학 행사로 활용하고 있다. 좀비가 된 ‘동인문학상’. 이제 우리들은 좀비 동인문학상을 역사의 저편으로 떠나보낼 때이다. 우리 모두 ‘동인문학상’에 ‘안녕’이라는 인사를 던지자.

최강민
• 문학평론가, 우석대 교수, 웹진 <문화 다> 편집인.
• 200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
• 평론집으로 『문학 제국』, 『비공감의 미학』, 『고독한 말』, 『엘리트 문학의 종언시대』가 있다.
* 상기 논문은 2018년 <문단의 적폐, 친일문인기념문학상 이대로 둘 것인가 – 친일문인 김동인을 기리는 동인문학상 폐지 촉구 세미나> 때 발표한 우석대 최강민 교수의 발제문을 가져왔습니다


[항일시 낭독]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쁜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 들이라도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쌈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띄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명이 지폈나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이상화 시인 약력
1901. 4. 5 ~1943. 4. 25 대구 출생
일제강점기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같은 민족시를 발표하여 민족정신을 드높였다.
본관은 경주. 호는 무량(無量)·상화(尙火 : 또는 想華)·백아(白啞).
1916년 경성중앙학교에 입학해 1919년 수료하고, 강원도 일대를 방랑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대구학생운동에 참여하고 백기만과 함께 거사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잠시 서울에 피신했다.
1921년 현진건의 추천으로 〈백조〉 동인에 가담했고, 1922년 프랑스 유학을 목적으로 도쿄[東京]로 건너가 아테네 프랑세에서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다 관동대지진으로 귀국했다.
1925년 박영희·등과 함께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에 참여했고,
1927년 대구에 돌아왔으나 여러 번 가택수색을 당했으며 의열단 이종암사건에 말려들어 구금되기도 했다.
1937년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친형인 이상정 장군을 만난 이유로 5개월 정도 옥살이했다.
1934년 〈조선일보〉 경상북도총국을 경영했으나 실패하고,
1937년 이후 교남학교에서 영어와 작문을 가르쳤는데, 이때
“피압박 민족은 주먹이라도 굵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교남학교에 권투부를 신설했다.
1940년 학교를 그만두고 독서와 연구에 몰두하며 〈춘향전〉을 영역하고 〈국문학사〉·
〈불란서 시 평석〉 등을 기획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위암으로 죽었다.
1946년 경상북도 대구 달성공원에 상화시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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