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김동인 소설의 환멸의식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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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0월 23일 친일문인 김동인을 기리는 동인문학상 비판 세미나에서 발표된 「김동인 소설의 환멸의식 연구」 요약문이 다. 이 요약문을 작성하여 보내준 최창근 교수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편집자

1. 서론

김동인은 이광수와 함께 서구문학 수용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활발한 작품 활동으로 근대의 문을 연 인물들이다. 그들의 공과 과는 지금까지 다소 분리해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친일행적이 자신들의 경험이나 기질과 그로 인해 형성된 가치관 및 예술관으로부터 형성되었을 가능성을 살피는 작업은 친일행위를 보다 입체적으로 분석하는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판단된다.

김동인의 경우에도 그의 문학과 친일을 연결하는 것은 다소 개연성이 부족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주제의식을 따라가다 보면 김동인만의 문학세계가 가지고 있는 현실부정과 도피의식을 찾을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동인의 소설과 평론을 통해서 그의 삶과 작품 세계를 이해하고 여기에 내재된 친일의 가능성을 추출해 보고자 한다.

2. 인간의 원소화와 과학실험

김동인에게 소설은 작가의 창조에 의해 생겨난 하나의 독립적인 세계였다. 문학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의 가치와 상당 부분 일치한다. 김동인의 예술론에서는 근대, 그 중에서도 과학적 성과에 대한 그의 동경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과학자는 실험실에서 원소를 발견하고 화학적으로 결합해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내며 현대 문명의 기초를 닦았다. 김동인이 근대의 가치를 증명하고 인간의 창조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과학과 예술 모두를 중요하게 여겼다는 사실은 많은 글에서 찾을 수 있다.

<창조(創造)> 제4호(1920년 2월호) 「마음이 옅은 자여」 수록

김동인은 문학을 통해 자신만의 과학 실험을 시도한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을 하나의 원소로 환원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래서 김동인은 소설을 쓸 때 인물의 성격에 가장 집중했다. 과학자가 하나의 원소를 규명해 내듯 그도 한 인간에게서 순수한 하나의 성격을 추출해낸다. 소설 속 사건은 결국 인물들이 각자의 성격에 따라 반응함으로써 새로운 물질이나 현상으로 변하는 일련의 과정에 가깝다. 성격이 먼저 정해지면 사건의 진행이 자연스러워지고 구심력이 작용한다. 그러나 이렇게 성격이 먼저 형성될 때는 그 인물이나 이야기가 주가 아니라 성격이 주가 됨으로써 이야기의 현실성이 부족하게 된다. 즉 인물의 성격을 위한 사건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김동인은 불륜을 저지르는 여자와 이를 어떻게 하지 못하고 고민하는 소심한 남자를 부부관계로 설정한다.

「유서」에서 주인공의 아내는 남편이 있음에도 공공연히 다른 남자를 만난다. 남편은 아내의 불륜에 대해 의심하고 괴로워하지만 이를 알고도 관계를 정리하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남자이다. 「마음이 옅은 자여」에서도 이와 유사한 남녀의 결합이 나타난다. K는 사랑하는 Y가 자신을 떠나자 상심에 빠진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상심의 밑바닥에 있는 것은 단지 욕정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육욕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시에 부끄럽고 천박한 욕망이기도 하다는 것을 남자는 곧 깨닫는다. 결혼의 파탄이나 뜻하지 않은 이별로 괴로워하는 남성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삶의 의지를 상실해간다. 이때 이 주인공을 도와주는 조력자가 등장한다. 그의 도움으로 여성의 육체에 대한 집착이 점차 사라지자 이 욕망은 다른 곳 즉 자신의 조력자에게로 향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남자는 남성과 남성의 정신적 교감이라는 한 차원 높은 단계의 사랑으로 올라선다. 남녀의 사랑은 오로지 관능에 의한 것이므로 이성보다는 동물적 본성에 해당하고 자연적이며 원초적이다. 인간의 동물적 본성은 인간이 자연 상태에 존재함을 의미한다. 여성과의 사랑에서 멀어질수록 그 사랑은 보다 더 문명의 색을 입게 되는 것이다.

성격의 형상화에는 근대문학에 대한 김동인의 가치관이 집약되어 있다. 현실의 인간에게는 하나의 성격이 아니라 다양한 성격이 혼재되어 있다.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따라서 소설을 위해서는 성격을 단순화해야 한다. 즉 자연 상태에서 한 차원 높은 예술로의 전환이 바로 성격의 창조이다. 자연에서 객관을 추출하려는 자세는 과학의 시선이자 자연주의 문학의 지향점이다. 그러나 지나친 성격의 단순화는 사건 자체의 구상에 치우쳐 오히려 객관세계의 재현과 분석은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가 자연 상태로 여긴 현실은 예술을 위해 재가공되어야 하는 상태일 뿐이다. 즉 과학과 자연, 주체와 객체의 위계적 시선이 작동하는데 이 위계에는 전근대 조선에 대한 일종의 부정과 환멸의식이 잠재되어 있다.

3. 자기애와 환멸의 세계관

김동인 소설의 주인공들은 외부세계 즉 조선이라는 현실 세계를 불신한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불신은 자기 자신으로의 도피를 촉발한다. 그리고 김동인은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닫게 되면서 동정에 대한 그만의 독특한 의식을 형성한다. 동정은 흔히 나보다 약한 타인에게 향하는 것으로 공동체의 형성과 유지를 위한 것임에도 김동인 소설 속 주인공들은 반대로 자신에 대한 동정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이때 동정을 주는 사람은 세상에서 감추어져 있는 진실을 구원해주는 인물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과정이 추가된다. 동정받는 이는 동정의 가능성을 얻기 위해 자신의 모든 비밀을 고백한다. 「마음이 옅은 자여」에서 K가 C에게 동정을 요구하며 보낸 것은 자신의 일기장이다. 동정을 받기 위해 해야 할 일은 그의 감추어진 내면을 상대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상대의 동정을 얻어 내기 위해 그는 자신의 내면을 지불한다. 화폐라는 교환체계를 정립한 근대사회에서 개인은 고백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만 교환가치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동정 받을만한 인물이 고백을 하지 않을 경우 조력자는 이 비밀을 파헤친다. 이때 조력자는 단순히 조력자라기보다는 권력관계에서 주도적 입장에 있다. 동정을 이유로 폭력적인 상황이 초래되어도 이는 진실을 규명한다는 이유로 책임이 면제되기도 한다. 동정은 고백과 폭로의 두 수단을 통해서만 가능해지고 두 경우 모두 조력자의 무한 책임이 뒤따른다. 결국 「유서」에서 조력자가 예술가인 주인공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것까지도 묵인되는 것은 동정의 무한한 책임감 때문이다.

물론 예술의 구원을 위한 살인이 무조건적으로 옹호받기는 어렵다. 예술이 도덕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적게 받는다고 하더라도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것은 분명히 윤리적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김동인은 이 환멸을 정당화하기 위해 선한 인물들이 겪는 비극을 이야기한다. 소설 「송동이」는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인물이 겪는 비극을 그리고 있다. 송서방은 근대화의 흐름 속에서도 머슴살이를 그만두지 않고 주인집에 대를 이어 충성을 바치는 인물이다. 이런 그에게 본인이 의도하지 않은 비극적인 일이 연쇄적으로 일어난다. 그는 구체적 죄를 범하지도 않았고 선의를 가지고 있기에 송서방에게 불행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그러나 송서방을 둘러싼 현실은 모든 책임을 그에게 묻고 있었다. 경찰에 신고한 것 때문에 강도의 동생에게 주인집 아들이 죽게 된 뒤 송서방은 자신이 강도를 그냥 보내줘야 했는지를 고민하다 홀로 사라진다.

김동인의 작품에서는 이처럼 죄를 묻기 어려운 죄인들이 등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송서방은 물론 억울하지만 그는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말할 수 있는 힘도 방법도 모른다. 그의 소설에서 죄인이 중죄를 범한 경우 그 과정을 돌이켜보면 주위의 방관과 무관심 탓이 크다. 이를 통해 김동인은 죄인 주변의 사람을 잠재적 공범자나 방관자로 만들고 범죄 행위 자체에 대한 도덕적 평가를 무화시키고 있다.

4. 가치판단의 불가능성

김동인 소설의 두드러진 소재 중 하나는 재판이다. 재판 과정을 보여주며 김동인은 이 죄인을 진정으로 단죄할 수 있는가를 독자에게 묻는다. 꼭 재판이 아니더라도 김동인의 소설은 독자에게 판사의 역할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죄(罪)와 벌(罰)」, 「포플라」, 「증거」 등의 작품에서 작가는 순진하고 선의를 가진 인물이나 억울한 누명을 쓴 인물을 내세우고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누명을 썼거나 또는 그 죄를 오롯이 본인의 책임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운점이 있다. 즉 모두 하나같이 동정을 가할 만한 인물들이다.

「죄와 벌」은 한 살인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가 살인자가 되기까지에는 우연한 사건으로 투옥된 아버지와 아버지의 부재 이후 생계를 위해 매춘을 하는 어머니의 사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살인자 홍찬도는 범행 현장에서 아이마저 죽이는 잔인함으로 죄가 가중되지만 부모를 죽인 마당에 아이를 살려두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를 아는 찬도는 차라리 아이의 목숨까지도 끊어버린다. 여기에 더해 범행의 공범인 그는 주범에게 아내와 자식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백하지 않고 혼자 죗값을 받는다. 이 이야기의 아이러니한 점은 과거 아버지에게 감옥형을 판결한 사람이 찬도의 재판을 맡은 판사라는 점이다. 이 소설에서도 불행은 우연에서 시작한다.

여기에 더해 「벗기운 대금업자」의 경우 김동인이 말하고자 하는 동정의 차이와 그 의미를 분명히 알 수 있는 작품이다. 빈민들이 사는 곳에서 전당국을 하는 삼덕은 이윤에 밝을 것이라는 고정관념과는 달리 늘 손해를 본다. 순진한 그를 세민굴 사람들이 영악하게 이용했기 때문이다. 손해가 쌓이고 쌓여 장사 밑천을 날린 삼덕은 가족을 데리고 만주 유랑길에 오른다. 삼덕의 잘못이라면 단지 우유부단하고 동정심이 많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 주위에 있는 악인들로 인해 불행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삼덕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오히려 그를 악덕 전당국 주인으로 묘사한다. 삼덕은 세상의 무서움을 모르고 책임질 수 없는 선행을 베풀다 사업이 기울어졌다. 그가 불행해진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동정심 때문이다.

<딸의 업을 이으려>에서도 부정을 이유로 쫓겨난 한 여성의 사연을 파고들며 그녀가 시부모의 모략에 의해 불륜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친정으로 돌아오게 된 사실을 밝혀낸다. 그러나 신문은 양반가문의 감추고 싶은 추문이나 미인 여성의 비극 같은 흥미위주로 이 사건을 보도하며 대중의 관심을 유도했다. 이처럼 실제 동정의 대상은 철저히 은폐되어 있다. 대중이 원하는 것은 고전소설의 결말처럼 동정에 어울리는 서사이지 실제 사건의 진실은 아니다. 신문과 잡지 등 대중매체 역시 진실을 찾기보다는 독자가 원하는 욕망을 전할 뿐이다. 대중은 자신들의 욕망을 소비하기 위해 기꺼이 동정심을 지출한다.

김동인은 주인공을 둘러싼 세계 자체의 불의를 그들이 겪는 비극의 원인으로 돌린다. 나아가 무분별한 동정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작품도 있다. 작품 「거지」는 구걸을 온 걸인을 불쌍하게 여긴 남자가 그에게 밥과 찌개를 주는 온정을 베풀지만 아내가 찌개에 쥐약을 타 놓았다는 사실을 몰라서 걸인이 죽게 되는 사건을 다루었다. 함부로 동정을 하는 것은 동정 받는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 일반 대중은 동정을 손쉽고 돈이 들지 않는 행위라 여기지만 김동인은 동정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주며 동정의 책임성을 묻는다. 동정 받는 자에 대한 책임을 가볍게 생각하는 값싼 동정에는 오히려 큰 비용이 들어간다. 값싼 동정은 생명을 담보로 하기도 한다. 김동인은 동정조차 쉽지 않는 현대인의 삶을 이야기하지만 이는 반대로 쉽게 동정을 요구하거나 동정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에 가깝다.

5. 환멸로부터의 도피

김동인이 이처럼 범죄자와 주변 환경, 동정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문제를 뒤섞고 범죄행위 자체의 문제를 지나치게 흐리게 하는 것은 기존의 윤리와 도덕에 대한 전면적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전근대적 가치를 부정하는 김동인의 무의식이 반영되어 있으며 또한 근대와 전근대의 이분법 속에서 문명과 자연의 대립 구도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자연의 범주는 실제의 자연에서 출발해 야만과 미개로까지 확대되어 전근대의 문화 전반에까지 이른다. 도덕과 윤리, 미신과 종교, 관습과 편견 등은 문화의 자연 상태이다. 따라서 아직까지 전근대에 머물러 있는 조선은 극복해야 할 자연 상태에 가까운 것이다. 그가 과학주의를 들고 나온 것 역시 조선의 자연을 박멸하기 위함인 것이다. 이처럼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은 김동인이 조선이라는 세계를 불신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따라서 그가 숨 쉬는 현실은 그가 소설로 그려야 할 세계가 아니라 부정해야 될 세계일 뿐이다. 그는 세계를 사실적으로 재현하고자 하는 자연주의의 원칙을 거부하고 자신이 원하는 상상의 세계를 창조하려 했다. 그가 액자식 구성을 선호하는 이유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만하다. 자연주의 소설은 현실의 반영을 지향하므로 굳이 액자식 구성을 취할 필요는 없다. 반면 김동인은 현실을 부정한 과도한 설정에 개연성을 입히기 위해 액자식 구성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액자 속 세상에서 김동인은 자신만의 세계를 마음껏 창조할 수 있게 되었다.

사진과 그림, 사진사와 화가의 비유는 이러한 기반 위에서 등장한다. 자연주의는 과학주의와 객관주의를 중요하게 생각하므로 작가의 간섭을 최대한 억제한다. 따라서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관찰하고 옮기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이는 사진사와 비슷하다. 반면 김동인에게 사진은 본인이 담고 싶은 진실을 드러내기에는 한참 부족한 수단이다. 사진은 사진기 앞에 놓인 모든 것을 다 포함한다. 거기에는 애초 사진사가 담고 싶어하는 것도 있지만 그가 원하지 않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김동인은 이 같은 사진의 특성에서 거짓이 참을 가릴 위험을 발견했다. 따라서 그는 사진이 아닌 그림이 문학과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보여주고 싶은 것을 보여주고 전달하고 싶은 것을 전달하며 이를 위해 제거할 수 있는 것은 전부 제거하는 것이 김동인의 문학론이다. 이는 김동인이 근대소설에 대해서 오해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소설은 플롯을 통해 개연성을 만드는 것이고 이는 작가의 상상력에 기반한다. 그러나 그 개연성 자체는 철저히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어야 한다.

반면 김동인은 현실 자체를 거짓과 위선의 세계로 보기 때문에 자신의 참세상을 찾기 위해서 가상의 세계로 도피한다. 그곳에서만이 그는 참사랑, 참예술, 참인생이라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이러한 도피를 피할 수 없었던 것은 대중과 사회에 대한 혐오 때문이다. 그에게 ‘참’이란 보편적 내용이라기보다는 보편적 형식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그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창조성만을 긍정하고 이를 막는 모든 것을 거부했다. 주관에 기초한 미의식과 보편에 기초한 형식이 결합하는 데에는 어떠한 문제도 일어나지 않는다.

김동인에게는 문학으로 재창조되지 않은 현실이란 모두 야만의 상태일 따름이다. 그가 현실에서 액자의 세계로 도피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도 ‘참예술’에 대한 과도한 집착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지나친 예술의식은 그의 현실감각을 파괴시켰고 나아가 조선의 현실을 보는 시야마저 가려 버렸다

6. 결론

이상으로 김동인의 작품을 통해 그의 문학세계가 가지고 있는 특질을 규명해 보았다. 김동인이 과학과 예술을 동일시하는 것은 근대문명의 관점에서 과학과 예술이 인류가 확보한 성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과학주의는 사실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오히려 사실에 대한 배제를 추구한다. 그는 사실로 당위를 없애려 하였으나 단지 구시대의 당위를 자신의 당위로 교체한 것뿐이었다.

김동인이 액자 속의 세계로 도망친 것은 조선의 현실 속에서 그가 구하는 진실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는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냉철히 파악하기보다는 야만과 무지의 조선에서 박해받는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불행한 삶을 동정해주기만을 원했다. 김동인의 친일은 이러한 인식에서 출발한다. 근대에 대한 찬양, 조선에 대한 부정 그리고 그 안에서 패배하고 있는 자신의 예술은 그를 현실 밖으로 내몰았다. 자신만의 아름다운 예술의 왕국으로 도피한 김동인이 친일에 대해 무비판적일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참고문헌>
<동인전집>, 홍자출판사, 1968,
<김동인 평론전집>, 삼영사, 1984
강인숙, <김동인과 자연주의-불・일・한 3국 비교연구>, 박이정, 2020, 306쪽.
강헌국, 「김동인의 창작방법론과 그 실천-1920년대를 중심으로」, <국어국문학> 177, 국어국문학회, 2016, 290쪽
손유경, 「1920년대 문학과 同情(sympathy)-김동인의 단편을 중심으로」, <한국현대문학연구> 16, 한국현대문학회, 2004, 176쪽.
허병식, 「한국 근대문학에 나타난 과학의 표상-방법으로서의 객관주의와 그 저항」, <동악어문학> 62, 동악어문학회, 2014, 3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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