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1868~1933)이라고 하면 근대시기에 아주 이름난 서화대가(書畵大家)의 한 사람이다. 창덕궁 희정당에 그려진 벽화(‘내금강 만물초 승경도’와 ‘해금강 총석정 절경도’)가 그의 손에서 나왔고, 금강산 구룡폭포의 절벽에 새겨진 ‘미륵불(彌勒佛)’ 큰 바위 글씨도 그의 작품이다.
일찍이 그는 궁내부(宮內府)에서 주사, 비서관, 시종의 자리를 지내면서 영친왕(英親王)의 서예 스승으로도 있었고, 워낙 많은 글씨를 남긴 탓에 지금도 전국의 여러 사찰에는 그가 쓴 편액(扁額)과 주련(柱聯)이 수두룩하게 남아 있는 편이다. 그는 또한 사진가(寫眞家)인 것으로도 유명한데, 서울 석정동(石井洞, 지금의 소공동)에 천연당사진관(天然堂寫眞館)을 개업하고 이곳에 고금서화관(古今書畫觀)을 함께 운영했던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의 사업영역은 여기에만 그치질 않고 서예에 관한 자신만의 확고한 필력을 바탕으로 ‘석공장(石工場)’을 부설(附設)하여 꾸려왔던 모양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매일신보> 1916년 6월 30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광고 문안이 수록되어 있다.
본관(本館)에서 고금서화매매(古今書畵賣買)와 현판(懸板), 주련(柱聯), 표장조각(裱粧彫刻)의 다년 수응(多年 酬應)함은 일반임지이금우(一般稔知而今又) 석공장(石工場)을 부설(附設)하고 남포오석(藍浦烏石), 강화애석(江華艾石), 화강석(花岡石)으로 입비(笠碑), 무립비(無笠碑), 상석(床石), 지석(誌石), 공동묘지 표석(共同墓地 標石) 급(及) 양옥문미(洋屋門楣), 석각자(石刻字) 등(等) 제반 부속석물(諸般附屬石物)을 교묘조제(巧妙彫製)하며 전(篆), 예(隷), 해(楷), 행(行), 초(草), 안(顔), 유(柳), 구(歐), 유(劉) 등(等) 각가법체(各家法躰)로 본인(本人)이 친서(親書)하여 사일등선수(使一等善手)로 지정전각(至精鐫刻)하여 수구수응(隨求需應)하오며 원근(遠近)을 불구(不拘)하고 입석(立石)까지 의청구시행(依請求施行)하오니 선로기차(船路汽車)의 운수편리(運輸便利)한 차시(此時)에 위선사업(爲先事業)의 유지(有志)하신 경향 첨군자(京鄕 僉君子)는 속속청구(速速請求)하시요. …… (중략)
경성 장곡천정(京城 長谷川町) 고금서화진열관(古今書畵陳列館) 김규진 고백(金圭鎭 告白).
여기에는 이 석공장에서 생산하는 여러 종류의 석물도안을 함께 그려놓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예를 들어 장명등이라든가 무인석, 문인석, 동자석, 상석 등 여느 묘역에서 흔히 사용하는 석물들의 모습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고, 비석으로는 비두(碑頭, 갓)가 있는 것과 없는 형태가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상첨비(上尖碑)’라고 하여 기존의 전통 양식과는 전혀 다르게 사각기둥 위쪽에 사각뿔 모양을 한 비석이 그려진 것도 눈에 띈다.
이런 형태의 석물은 대개 그 원형이 흔히 ‘방첨탑(方尖塔)’ 또는 ‘방첨주(方尖柱)’라고 표기하는 오벨리스크(Obelisk)에서 온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없지 않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형태의 사각기둥이 아니라는 점이 약간 다르다. 어쨌거나 신문광고에까지 이러한 도안의 그림이 등장한다는 것은 이미 외래양식의 묘비석이 널리 퍼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대목인 듯하다.
일반적으로 묘비석이나 기념비의 제작에 있어서 오벨리스크 형태가 채용된 것은 그 시기로보나 지역으로 보더라도 전 세계에 걸쳐 이미 널리 확산된 현상으로 간주된다. 예를 들어, 서양 각국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과 같은 경우에도 명치시대(明治時代)의 초기에 건립된 오벨리스크 양식의 존재를 어렵잖게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도 양화진외국인묘지의 최초 피장자(被葬者)인 의료선교사 헤론(John W. Heron, 蕙論; 1856~1890)의 묘역에 조성된 묘비석이 전형적인 오벨리스크 모양으로 만들어졌던 것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이러한 묘비석이나 기념비가 아무리 오벨리스크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이것과는 구분되는 일본 고유의 비석 형태가 별도로 존재했다는 사실은 명확히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를 테면, 오벨리스크가 위로 올라가면서 좁아지는 형태라면, 이것과는 달리 위 아래의 크기가 동일한 사각기둥 모양의 비석도 매우 흔하게 남아 있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근대시기에 이 땅에 남겨진 갖가지 일제 잔존물을 살펴보면, 그 가운데 유달리 “단면이 정사각형(正四角形)인 사각주(四角柱, 네모기둥)에 방추형(方錐形, 사각뿔 모양)”의 기념물이 자주 눈에 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형태의 기원이 늘 궁금하던 차에 몇 가지 자료를 뒤져보니, 일본 해군의 매장지 묘표(墓標, 묘비석)와 관련한 규정집에서 이러한 내용이 퍼뜩 눈에 띈다.
질의한 해군매장지(海軍埋葬地)에 매장하는 하사졸(下士卒)의 묘표(墓標)는 지금부터 별지(別紙) 추형(雛形)에 조준(照準)하여 석제(石製)로 건설할 것.
― 하사 묘표 약도(下士墓標略圖) : 비신은 높이 2척(尺) 5촌(寸), 사방 6촌 / 윗 기단은 높이 7촌, 사방 1척 2촌/ 아랫 기단은 높이 5촌, 사방 2척 (정면에는 무슨 관 누구의 묘라고 적고 또 훈등이 있는 자는 관명 아래에 이를 기재하며, 측면에는 연월일을 적을 것).
― 졸 묘표 약도(卒墓標略圖) : 비신은 높이 2척, 사방 5촌 / 윗 기단은 높이 6촌, 사방 1척 1촌/ 아래 기단은 높이 5촌, 사방 1척 9촌(정면에는 무슨 관 누구의 묘라고 적고 또 훈등이 있는 자는 관명 아래에 이를 기재하며, 측면에는 연월일을 적을 것).
[자료출처 : 海軍大臣官房, <海軍制度沿革> 卷7, 1940]
이것은 1879년 12월 26일에 일본제국의 해군경(海軍卿)이 군무국장(軍務局長) 앞으로 보낸「하사졸묘표촌법(下士卒墓標寸法)의 건(件)」에 관한 회신 내용이다. 이것과 동일한 내용의 묘표 양식은 1886년 6월 3일에 제정된 해군성령 제41호 「해군생도하사졸용부사망자취급규칙(海軍生徒下士卒傭夫死亡者取扱規則)」에도 그대로 다시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자료에는 모두 묘비석의 도안까지 잘 그려져 있으므로 ‘사각기둥에 사각뿔 모양’의 묘비석이 일찍이 일본해군묘지에서 사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렇다면 일본 육군(陸軍)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이에 관하여 가장 빠른 시기의 기록으로는 1873년 12월 25일에 육군성(陸軍省) 포(布)제315호로 제정된 「하사관병졸매장일반법칙(下士官兵卒埋葬一般法則)」이다. 여기에 포함된 ‘육군매장지에 장사지내는 법칙(陸軍埋葬地ニ葬ルノ法則)’에는 묘표의 설치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묘표(墓標)는 목주(木柱)로써 이를 만들고 사자(死者)의 위기관등성명(位記官等姓名) 및 연세월일(年歲月日)을 기입하며, 기타는 대개 구규(舊規)에 따름. 묘표 노후(墓標老朽)한 것은 새로이 이를 만들고 서법(書法)은 옛 것에 따르며, 이를 위해 정칙매장료(定則埋葬料)의 여잔(餘殘, 잔액)을 적치(積置)하여 미리 인당(引當, 충당)할 것.
목주(木柱)로써 묘표를 만드는 것은 일반의 정칙(定則)이지만 혹(或)은 지방(地方)에 있어서 물가하직(物價下直)으로써 매장료정칙(埋葬料定則)에 따라 석주(石柱)로 제작하는 것은 이 제한에 구애되지 않음.
일본 육군에서 이러한 매장규칙이 마련된 계기는 「징병규칙」(1871)과 「징병령」(1873)의 시행에 따라 징집된 병사들 가운데 영내에서 질병이나 사고로 죽는 사례가 늘어나게 되자 이에 대한 현실적인 수습대응책으로 등장한 것이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육군매장지에 묘표를 세운다는 내용만 들어 있고 구체적인 규격이나 양식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는데, 그 이듬해인 1874년 10월 5일에 나온 육군성 포(布)제369호 「하사관병졸매장일반법칙(개정)」에 이르러 처음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었다.
묘표(墓標)는 하사(下士)에 있어서는 고(高, 높이) 2척(尺) 5촌(寸), 방(方, 사방) 6촌(寸), 병졸(兵卒)에 있어서는 높이 2척, 사방 5촌의 목주(木柱)로써 이를 만들어 사자(死者)의 관위성명묘(官位姓名墓)라고 적고, 그 측면에 연월일(年月日)을 기입하며 기타는 대개 구규(舊規)에 따름. (하략)
여기에는 별도의 도안(圖案)이 제시되어 있지 않으므로 단지 묘표가 사각기둥으로만 이뤄졌다는 것을 알 수 있고, 특히 꼭대기 부분이 어떤 모양으로 마무리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아무튼 이 규정을 기점으로 하여 육군매장지에 사용되는 묘비의 기본 형태가 만들어졌으며, 그 이후에 관련 규칙의 잇따른 제개정(制改正)과 청일전쟁 및 러일전쟁 등을 겪으면서 피장자(被葬者)의 대상이 사관생도, 준사관(準士官), 사관(士官, 위관), 상장관(上長官, 좌관), 장관(將官) 및 동 상당관(同 相當官)의 범위까지 계속 확장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육군매장규칙」에 따른 각 신분별 묘지구획 및 묘표 촌법(1897년 8월 17일 제정)
이 대목에서 일제패망의 시점에 이르기까지 육군매장지 또는 육군묘지에 사용된 각 계급단위별 묘표와 관련한 제도의 변천 연혁을 총정리하면,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일본 육군의 군인묘지 및 묘표 관련 제도의 변천 역혁
이상에서 취합한 자료들에 따르면, 애당초 석비(石碑)를 사용했던 일본 해군과는 달리 일본육군에서는 초기에 목주(木柱; 비석은 예외적인 경우)로 묘표를 만드는 것이 원칙이었다가 청일전쟁이 끝나고 차츰 비석으로 바뀌었으며, 또한 해군 쪽은 이중의 기단부가 있었던 것에 반해 육군 쪽은 사각기둥 하나로만 이뤄져 있다는 것이 달랐다. 하지만 일본 쪽의 연구자료에 따르면, 그 어느 것도 모두 기본 형태가 “사각주(四角柱, 네모기둥)에 방추형(方錐形, 사각뿔 모양)”이었던 것은 틀림이 없다.
일본군의 묘지석에 있어서 꼭대기가 사각뿔 모양을 지니게 된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는 모양인데, 요코야마 아츠오(橫山篤夫, 관서대학 비상근강사)가 정리한 「군대와 병사 ― 여러 가지 죽음의 모습(軍隊と兵士 ― さまざまな死の姿)」이라는 글에 다음과 같은 논지로 설파한 대목이 눈에 띈다.
묘비(墓碑)의 형상(形狀)이 사각주(四角柱)인 이유는 목주(木柱)의 형상을 본뜬 것이라 생각된다. 규정(規定)에는 두부(頭部)의 형상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두부를 방추형(方錐形, 사각뿔 모양)으로 통일한 이유는 검선(劍先, 칼끝)을 본 땄다고 하는 설명이랑 유교(儒敎)와 신도(神道)의 영향이라는 설명도 있다. 필자(筆者)는 목주(木柱)의 선두(先頭)의 부식을 방지하고자 사각추의 모양으로 자른 형태를 비석(碑石)이 취한 탓이라고 판단한다. 검토 과제의 하나이다.
[자료출처 : 小田康德・橫山篤夫・堀田曉生・西川壽勝 編著, <陸軍墓地がかたる日本の戰爭)>(ミネルヴァ書房, 2006), 28쪽]
이러한 일본군 묘비석에 관한 글을 정리하다보니까 한 가지 퍼뜩 떠오르는 것이 저명한 영국인 여행작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이 남긴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1897)에서 읽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평양 탐방기의 한 대목이다.
…… 1894년 9월 15일 오후에 좌보귀 장군(General Tso Pao-kuei)은 묵덴(Mukden, 만주 봉천)을 출발할 때 5,000명에 달했으나 탈주와 전사에 의해 급격히 줄어든 그의 병력을 거느리고 칠성문(七星門)을 통과하여 아래쪽의 평지로 이어지는 가파른 갈지자형 내리막을 내려가면서 그의 운명적인 기습공격을 감행했으나 이 문에서 대략 300야드 못 미치는 지점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 조선 사람들이 전언하는 바에 따르면, 그의 부하들이 시신을 거두었으나 그것을 옮기는 동안 일본군의 총격이 이뤄지면서 대량살육의 와중에 유실되었다고 한다. 둥글게 난간이 쳐진 깔끔한 오벨리스크가 일본군에 의해 그의 전사 추정 지점에 세워졌으며, 한쪽 면에는 이러한 비문이 새겨져 있다.
“봉천군사령관 좌보귀(左寶貴) 전사지”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평양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에 사망”
이렇게 되어 있다. 탁월한 능력의 적장에게 보내는 우아한 찬사라고 하겠다.
이 글을 보고나서 ‘오벨리스크’라고 묘사된 이 비석의 정체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하고 그저 상상만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옛 자료를 뒤지다가 <관광자료 유경의 이야기(觀光資料 柳京の話)>(평양관광협회, 1938)라는 소책자에서 마침내 이것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마주하게 되었다. 여길 보면 우선 한쪽 면에 “좌보귀전사지소(左寶貴戰死之所)”라는 글자가 보이고, 전체 비석의 형상이 바로 “정사각형 단면의 돌기둥에 사각뿔”을 올린 일본군 묘비석의 양식을 그대로 닮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버드 비숍 여사의 책이라고 하니까 또 하나 생각나는 것이 여기에 수록된 한 장의 사진자료이다. 청일전쟁 시기에 걸쳐 여러 차례 우리나라를 찾아왔던 그였기에 그 시절의 목격담을 생생하고 전해주는 것이 이 책이 지닌 장점 중의 하나이기도 한데, 바로 여기에 제물포(濟物浦) 지역의 어느 언덕 위에 백여 기(基) 남짓 빼곡하게 조성해놓은 일본군 묘지의 모습이 등장한다.
표목(標木)의 앞쪽에 전사자의 이름이 적혀 있고 측면에 ‘보병 제21연대(步兵 第二十一聯隊)’라고 표시된 걸로 보면 이들의 신분이 오시마혼성여단(大島混成旅團)의 주력부대(보병 제11연대 및 보병 제21연대)에 소속된 군인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묘표의 모습을 보아 하니 「육군대부(陸軍隊附) 하사졸매장규칙」에 묘사된 것과 동일한 형태이며, 나무기둥의 꼭대기 부분이 ‘사각뿔 모양’으로 처리되어 있었다는 사실도 또렷이 드러난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이러한 양식의 비석은 비단 묘지석뿐만이 아니고 송덕비(頌德碑)라든가 기념비(記念碑)라든가 충혼비(忠魂碑)라든가 하는 각종 기념시설물의 기본 양식으로 서서히 정착되기 시작했고, 심지어 조선총독부가 전국 각지의 폐사지(廢寺址)에서 석조유물을 옮겨온 다음에 그 터에다 원위치 표지석(原位置 標識石)을 세울 때에도 이 양식을 그대로 채택한 바 있었다. 그리고 1933년 8월 9일에 제령 제6호로 제정된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朝鮮寶物古蹟名勝天然記念物保存令)」에 따라 각종 문화재의 지정대상지에 세운 표주석(標柱石)도 이것과 동일한 양식이었다.
해방 이후 시기에 이르러서도 이러한 비석의 기원에 대해 정확히 인지를 못한 탓인지 이를 본떠 만든 기념비 종류도 다수 제작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러한 종류의 비석에 대해 간혹 오벨리스크 양식에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하는 견해도 없지 않고 때로 혼용하여 사용된 흔적도 없지 않으나, 역사적 유래로 살펴보자면 이것과는 무관하게 일본군 매장지에 세운 ‘묘표’에서 직접 그 연원이 맞닿아 있는 만큼 그 자체가 명백한 일제잔재의 한 갈래인 것은 분명하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