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8월 서울시경 사찰과는 서울 서대문구 정동 1번지에 자리잡고 있던 소련영사관을 수색하여 영사관 관리인 니콜라이 크레오셉과 그의 아내 니콜라이 줄리안을 간첩 협의로 검거했다. 이들은 1947년 5월 미·소 공동 위원회가 열렸을 때 소련측 대표 스티코프 중장의 수행원으로 와서 영사관 관리인이란 명목으로 계속 남아 있었다.
이승만 정권은 ‘6월 공세’를 펼쳐 국회 프락치 사건을 획책하고 반민특위를 무력화시키며 공안정국으로 몰아갔다. 소련영사관 관리인 부부의 체포, 구속 수사도 반공 의식의 강화를 조장하기 위해 벌인 일이었다. 이들에게 간첩 혐의로 실형을 가하면 엄청난 외교문제로 비화될 수 있었다. 그래서 이승만 정권은 이들에게 국외추방령을 내리고 소련영사관 폐쇄 조치를 취했다. <신천지> 1950년 1월호에 실린 <니콜라이 부처 추방 전말>은 니콜라이 부부의 구속수사와 간첩 혐의, 그리고 국외추방 과정을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편집자 주
대단한 인물은 아니지만 니콜라이 크레오셉과 그의 아내 줄리안은 문제의 소련인이기 때문에 그들을 추방한다는 것은 매우 흥미있는 뉴스였다. 지금도 일부에서 말하기를 결국 3・8 이북으로 쫓아 보내고 말 것을 진작부터 그렇게 할 것이지 왜 구속한다는 둥 송청한다는 둥 불기소한다는 둥 한바탕 떠들썩하고 나서야 추방하느냐고 하지만 두 달 동안은 그러는 동안에 대수롭지 않은 이 니콜라이 부처는 완전히 화제의 인물로 클로즈업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10월 4일 그러니까 일요일 다음에 개천절이 끼어 연이틀의 공휴일 후에 서울시 경찰국 트럭에 실어 개성지구 3·8선으로 호송되어 이북으로 추방되었는데 그들이 추방되던 당일로 그러하였지만 체포 구속되어 송청되었다가 추방하기로 결정되어 불기소로 석방되기까지 가지가지 흥미있는 이야기가 얼크러져 있는 것이다. 김호익 총경이 수사한 박헌영의 비서 박시현을 중심으로 하는 스파이단 체포를 계기로 남로당 프락치 국회의원 김약수 노일환 이문원 등을 국회에서 숙청한 것은 이 나라 의정사상 특기할 사건일 뿐 아니라 정부와 국회 간의 지나친 알력을 다소간 완화시키는 효과를 나타냈던 것이다. 김 총경의 수사비화가 「국제스파이사건 진상」이라는 제목으로 □□일보 지상에 연재되던 즈음 하루저녁 그를 만났더니 뚱뚱한 얼굴에 희색이 만면해서 말하기를 어제저녁에 차석검사 김영재를 구속하였다는 것이다.
그러자 김 검사 구속을 계기로 법조계에 검거선풍이 불기 시작하여 몇몇 변호사가 구속되는 가운데 윤학기도 체포되었다. 확실히 분산적인 숙청보다는 집중적인 숙청이 효과적이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법조계 숙청이 성과를 거둔다면 남로당 프락치 국회의원 숙청사건에 못지않은 중대한 업적일 것이라고 말하던 김 총경의 말을 잊지 않고 있던 하루저녁 명동거리에서 그를 만났더니 또 한 번 희색이 만면해서 말하기를 소련 영사관 니콜라이를 구속하였다는 것이다. 국제문제를 고려해야 하니 섣불리 건드릴 수는 없었고 이번에는 확증을 얻었다는 것이다. 즉 니콜라이는 윤학기를 통하여 심상치 않은 모종의 흉계를 꾸미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윤학기에게 몇 권의 공산주의 서적을 기증하였으며 공산주의자들이 전한국 (해독불가) 제안으로서 윤학기를 격려하였다는 것이다.
니콜라이의 서재에 걸려있는 극동지도에는 공산주의가 지배하는 지역과 장차 지배하게 될 지역을 붉은 잉크로 표시했으며 또한 중국지도에다가 모택동이 점령한 지점을 세밀히 기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천여 달러의 현금을 소지하였고 도쿄 주재 극동위원회 소련 대표에게서 1400 달러의 현금이 □□은행에 송금되어 있었고 북조선 중앙은행권이 수십만 원에 달하더라는 것이다. 또한 사냥 취미가 없으면서도 성능이 우수한 미국제 엽총이 2자루나 있는가 하면 무엇에 사용하려던 것인지 일본도가 2자루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수상한 징조로서 소련영사관 직원으로서 격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도대체 일본어와 영어를 곧잘 하는 젊은 내외가 영사관 관원이라는 명목으로 서울에 있는 것은 본래부터 그들의 목적은 딴 데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도 한복판 정도 막바지에 아라사의 곰을 기르고 있었던 셈이다.
니콜라이에 대한 문초는 통역을 둘 필요 없이 일본말로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추방되던 날 아침 서울시 경찰국에 나타난 니콜라이라는 사나이는 전형적인 슬라브인이었다. 둔중하고 강정하고 존대한데다가 잔뜩 뱃장이 흘여가지고 이 사람 저 사람을 못마땅해 하는 눈짓으로 흘겨보는 것이었다. 출발할 시간이 되어 그들의 소지품을 트럭 위에 싣게 되었다. 니콜라이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자기 짐을 자기가 간직하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다. 하는 수 없이 지나가던 지게꾼을 불러서 현관에 늘어놓은 트렁크를 트럭으로 운반케 하였다. 그것이 끝나자 니콜라이는 그의 아내 줄리안과 안나 야콘레프더러 트럭에 오르라고 한 다음 포켓에서 100원짜리 조선은행권 몇 장을 꺼내더니 그중에서 200원을 지게꾼에게 주는 것이었다. 그의 태도는 아주 당당하였다.
이러한 인물이고 보니 문초를 받는 동안 니콜라이는 건방지기 짝이 없어 담당 형사들을 근본적으로 멸시하는 태도로 묵묵한 가운데 좀체 범죄를 자백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본시 외교관이라는 것은 평시와 전시를 막론하고 공공연한 스파이라는 것은 상식화한 비밀이고 볼 때 정식 국교도 열리지 아니하였을 뿐더러 대한민국과 소련과는 적대적 관계에 있다고 할 지금 그들이 서울에 있으면서 할 행동이란 소련의 이익, 그러니까 대한민국에 손해가 될 북한의 괴뢰집단 내지는 남한 공산주의자들의 이익을 도모할 것이라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니 애당초 그들을 서울에 머물게 할 필요가 없었고 당장 추방해 버렸어야 할 것이었던 것이다. 세계적으로 우수한 모스크바의 국제 스파이가 단서를 잡히게 소홀히 일할 탓이 없으니 허다한 간첩행동이 모두 은밀한 가운데 아무런 증거로 남기지 아니하는 교묘한 방법으로 행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수사 결과 니콜라이는 (1)국가보안법 제3조 (2)군정법령 제5호 (3)미군태평양사령관포고 제4조 위반 혐의의 범행을 자백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마침내 서울지방검찰청으로 구속 송청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즈음 해서 국제적 반응이 일어났다. 동경 주재 극동위원회 소련대표로부터 맥아더 사령부를 통해서 항의가 왔던 것이다. 임병직 외무부 장관은 유엔한국위원단에게 서한을 보내 대한민국 경찰이 소련 시민을 체포한 것은 법에 의한 것이지만 국제성을 가진 이 사건을 유엔위원단이 처리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자 김익진 검찰총장은 반박하기를 니콜라이 부처를 체포해놓고 장관들 사이에 옥신각신 성명 싸움이 벌어지고 보니 이 문제는 아연 내외의 관심을 총집중 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신경이 예민한 신문기자들은 앞으로 이 문제가 어떻게 진전될 것인가 해서 이승만 대통령 회견에서 이 문제가 제기되는가 하면 관계 장관들에게 함축 있는 질문이 던져졌고 그러자니 매일처럼 신문지상에 보도되어 일반의 관심을 끌어왔던 것이다.
공판에 회부하여 체형을 가하느냐 무죄 석방하느냐. 만일 체형을 가하는 경우 서울이든 어디든 형무소에 수감해두니 몇 해 동안 좀 성가신 일이 아닐 것이냐 해서 검찰청측의 태도에 대해서 구구한 억측이 떠돌았다. 그러나 검찰청은 추방이라는 현명한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니콜라이는 일단 석방되어 그들의 숙소인 소련영사관으로 돌아왔고 추방할 때까지 그들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하여 시경찰국에 의해서 엄중한 감시가 실시되었다. 유죄한 것으로 판정되어 추방하기로 되고 보니 염려되는 것은 니콜라이 부처의 생명인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공산당들이 어떠한 짓을 할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만일 니콜라이를 암살함으로 해서 소련에 자극을 주어 국제문제를 야기시킬런지도 모를 일이다. 대한민국 경찰이 불법으로 소련 외교관을 살해하였다는 모략을 만들어가지고 전 세계에다가 선전할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니콜라이를 추방하는 시일과 방법과 추방하는 지점에 관해서는 일체 비밀에 부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불일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니콜라이의 추방이 하루이틀 지연되는 동안에 항간에는 구구한 억측이 떠돌기 시작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니콜라이 부처가 구속되어 있는 동안 부족하였던 영양을 회복하고 있으리라는 것이다. 배탈이 났다면 그것을 치료할 필요가 있을것이고 체중이 줄었다면 잘 먹고 잘 자면서 체중을 늘릴 필요도 있을 터이니 보름이나 한달 동안은 영사관에 머물러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외무부 당국에서는 새로운 의견을 제기하였다. 개성지구로 해서 3・8 이북으로 호송할 것이라는 내무부 당국의 추방방법에 대해서 그것은 국외추방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두만강을 넘겨 보내야 국외추방이지 3・8 이북이 엄연히 대한민국의 영토이고 볼 때 무엇이 국외추방이냐는 것이다.
본래부터 외무부는 대한민국 주권의 범위에 관한 문제를 가지고 유엔한국위원단과도 다투어 오던 바이다. 그렇다면 일본으로 보내느냐 중국으로 보내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수속절차가 복잡한 그 방법을 취할 것이 없으니 평양으로 가기만 하면 손쉽게 모스크바로 갈 수 있을 것이니 우선 간단한 방법으로 3·8선에서 추방하면 그 다음에 니콜라이가 어디로 가든 간에 3·8 이남에서 다시는 스파이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 해서 추방지점으로 3·8선이 확정된 것이다. 니콜라이 부처가 건강과 체중을 회복하여 마침내 추방하기로 되어 9월 27일이 지정 공포되었다. 시일과 장소를 비밀에 부쳐야 할 필요도 있지만 또한 공포할 필요도 있는 것이다. 준전시 상태라고도 할 수 있고 또 쉴 사이 없이 돌발적으로 북한 괴뢰군이 3·8선을 총격하고 있는 실정을 고려할 때 니콜라이 부처가 무사히 3·8선을 월북하기 위해서 언제 어디로 추방한다는 사실은 북한 괴뢰집단이 알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실 10월 4일 니콜라이 부처를 어떤 지구까지 호송해서 거기서 이북으로 보낼 때까지 북한 보초들이 망원경으로 이 광경을 보고 있었을 터인데 일발의 총격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니콜라이 부처는 트렁크를 등에 지고 금단의 지점인 3·8선을 기차 레일 위로 천연스럽게 마음놓고 걸어서 3·8선을 넘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추방한다던 9월 27일 아침에 이르러 갑자기 중지하라는 명령이 상부에서 내렸던 것이다. 왜냐? 다시금 항간에는 여러 가지 억측이 떠들기 시작했다. 무슨 새로운 사태가 돌발하였는가. 모두 궁금해 하였으나 추방중지의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것은 비밀이다. 그러나 추방중지의 이유는 알려지게 되었다. 즉 스미스호가 공산당의 책략으로 진남포로 나포되었고 동시에 미국인 선장과 기관사 2명이 납치되었던 것이다. 잃어버린 배도 찾아와야 하겠지만 납치된 미국인 2명도 찾아와야 하자니 장차 미국이 소련에 대해서 배와 선장의 반환을 요구하겠지만 공교롭게도 니콜라이 부처는 소련으로 돌려보낼 처지이고 보니 기왕이면 납치된 2명의 미국인을 반환할 때까지 추방을 보류하자는 것이다.
궁금한 것은 니콜라이 부처이다. 이북으로 보내준다고 해서 속으로 기뻐해하던 참에 갑자기 상부의 명령이라고 해서 무기한 연기한다는 말을 들은 그들은 은근히 불안하기조차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어떠한 조처가 강구되었는지 미국 국무성에서는 소련정부에 대해서 정식으로 반환을 요구하게 되었고 서울특별시에서는 기존 방침대로 추방하기로 되어 마침내 전후 2개월 동안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킨 모스크바의 제5열 니콜라이 크레오셉과 그의 아내 니콜라이 줄리안과 어학교수 안나 야콘레프 세 명은 10월 4일 뉴스 카메라맨들과 함께 트럭을 타고 개성지구 3·8선에서 이북으로 추방되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