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여구소 인천지부 주최… <철도원삼대> 속 배경 둘러봐
한국문학의 거목 황석영 작가의 소설 <철도원삼대>의 주무대인 인천지역을 돌아보는 답사가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 주최로 지난 11월 20일 진행됐다. 이 답사는 한국근대문학관 주최로 지난 12월 3일 열린 <철도원삼대> 북콘서트에 앞서 소설의 무대를 둘러볼 수 있어 의미를 더했다.
소설 <철도원삼대> 답사코스는 일제 강점기 인천의 공장지대와 노동자마을 그리고 소설 속 인물들로 묘사된 사회주의자들의 활동무대를 돌아보는 순서로 구성했다.
코스는 배다리성냥박물관→기동대→동명초등학교→고무공장→노동자마을→창영초등학교→영화학교→이이철주거동네→조봉암부영주택→ 용동으로 이어졌다. 이날 시민답사프로그램은 장회숙 인천도시디자인연구소장과 함경란 인천문화관광해설사가 지역안내와 해설을 맡았다.
소설 <철도원삼대>는 강화도 지산리에서 태어난 영등포 공작창 고원 ‘이백만’과 열차 기관사로 일하다 해방 이후 노동운동에 투신하는 아들 ‘이일철’, 북한군 수송 열차를 운행하다 미군 폭격으로 다리를 잃고 귀향한 손자 ‘이지산’으로 이어지는 노동자 3대의 이야기다. 소설은 이지산의 아들이자 평생을 노동자로 살아온 진오가 공장폐쇄와 해고에 대항해 발전소공장 굴뚝위에서 고공농성을 시작하면서 문을 연다.
소설은 이진오가 발전소 굴뚝위에서 고공농성을 하면서 식민지 시절의 노동자로 살았던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처절하고 고단했던 삶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나라를 빼앗겼던 시절 이백만과 이일철은 시대에 순응하면서 영등포 철도공작창의 고원(직원)과 열차 기관수로 살았고 이백만의 둘째아들 이일철은 공장 노동자로 활동을 하면서 일제에 항거했던 인물로 그려진다.
특히 이일철은 아버지를 따라 영등포 공작창을 다니다 파업을 주도한 뒤 해고된다. 그는 그 이후 노동운동에 투신하다 쫓기는 신세가 되어 결국 인천으로 활동무대를 옮겼지만 결국 일제 경찰에 체포됐고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다. 인천은 당시 정미소·고무·장류공장, 양조장 등의 공장지대가 많았고, 인천항 하역부두는 고된 노동으로 먹고사는 노동자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일제시대 잘나가던 열차기관수였던 이백만의 장남 이일철도 동생의 죽음을 계기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결국은 월북을 선택하게 된다.
소설 <철도원삼대>에는 인천을 배경으로 활동했던 실존 사회주의자들의 이름도 등장해 서사의 깊이를 더한다. 김근식의 롤 모델인 김삼룡, 박헌영, 이재유, 김형선 등의 이름도 만나볼 수 있다.
인천의 성냥공장, 조선인촌주식회사
배다리성냥박물관 앞에 모인 답사자들은 먼저 인천의 성냥공장이었던 조선인촌(燐寸)주식회사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성냥공장 조선인촌식회사는 수백명이 일했을 정도의 규모가 큰 공장이었다.
1900년 러시아 대장성이 발행한 ‘조선에 관한 기록’에는 외국인이 제물포에 성냥공장를 개설했다고 적고 있다. 성냥산업은 노동집약적인 사업이었으므로 조선처럼 임금이 저렴한 지역에서 대단히 유리한 사업이었다.
인천의 성냥공장으로는 성냥제조와 판매를 목적으로 1917년 인천 금곡동에 세운 조선인촌(燐寸)제조주식회사가 있었다. 대규모 자본이 투입돼 본격적인 공장제 생산이 이뤄진 최초의 공장으로 성냥의 대중화에 큰 역할을 했다. 일본은 조선인에게 성냥공장 설립을 불허하고 제조 기술마저 전수하지 못하게 강제했다.
송림동 고무공장
인천사람 안기영은 일본인의 도움으로 고무신사업을 시작해 성공했고 인천 송림동에 고무신 공장을 차렸다. 안기영은 엿장수를 활용해 동네 골목골목을 다니며 헌 고무신을 수집하게 했고, 수집한 헌 고무신들은 선박 편으로 일본 고무공장에 보냈다. 헌 고무신으로 돈을 번 안기영은 인천 송림동에 고무신 공장을 차렸다.
고무신 공장은 1940년대에 일제 전시통제로 문을 닫을 때까지 송림동에 자리 잡았다. 안기영이 세운 송림동 고무신공장의 위치는 동부경찰서 길 건너 골목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노다간장주식회사 인천지점
인천 배다리 동부경찰서 자리에는 일제 강점기 일본장유주식회사가 있었고 이 회사는 노다간장주식회사로 바뀐다. 일본식 된장, 간장을 만들었다.
인천간장 양조업은 1894년 일본인이 처음으로 시작했다. 이어 1902년 기시모토 호노스케가 양조업을 시작해 1905년 일본 디카스키간장양조장, 기시모토양조소, 구라시게양조장, 산하간장양조장 등 다섯 개나 생겼다. 판로는 경성을 주로 하지만 일본간장주식회사는 철도연선 및 연해 각지의 주요한 지방에 대리점을 설치해 시장을 개척했고, 만주 각 요지인 다렌, 텐진, 하얼빈 등에까지 확장했다.
왁찐제조소 동경제국대학 전염병연구소 인천출장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천 동구 송림산을 먼저 주목한 대상은 일본이었다. 동경제국대학 전염병연구소 인천출장소는 두묘 제조소를 인천송림리의 산꼭대기에 자그마한 서양식 건물을 짓고 송림산을 두묘를 추출하는 소목장으로 사용했다.
두묘제조소는 일본에는 없고 오직 조선에만 있었으며 이곳에서 생산된 두묘는 품질이 좋아 일본전역은 물론 중국, 미국까지 수출했다. 현재 바이오산업의 원조다. 100만 명이 사용할 수 있는 ‘왁찐'(백신)을 생산했다고 한다. 백신의 원료를 만들었던 두묘제조소는 일본인이 철수한 후 동명초등학교가 됐다.
<철도원삼대> 속 이이철 주거지
<철도원삼대> 속 인물인 이이철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인천으로 들어온다. 그의 거주지인 우각로 80번지 일대였다. 현재 도원동의 전도관 아랫동네다.
소설 속 이야기는 이렇다.
“박선옥은 배다리 사거리를 지나 창영정의 감리교회 뒷산 산책로에 갔다. 밀착미행이 어려워 미행자는 멀찍이서 그녀를 관찰했다. 삼심분 후에 남자가 나타났는데 처음에는 그가 이이철인 줄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은 삼십분 쯤 주위를 산책했고, 언덕위에 올라가 앉아 있기도 했다, 그가 창영정의 고갯마루 골목이 있는 주택가로 들어가 어떤 이층집에 올라가는 것을 확인했다.”
부영주택과 죽산 조봉암
죽산 조봉암이 살았던 부영주택은 요즘으로 치면 LH공사가 지은 시영주택이었다. 인천에 노동자들이 많이 모이자 주택난이 발생했고 이에 인천부에서 건설해 분양한 주택이다.
죽산 조봉암은 1942년부터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임명돼 서울로 가기전까지 가족들과 도원동 부평주택에서 살았다. 조봉암 선생의 딸 조호정씨에 의하면 부영주택 대부분 조선사람이 살았고, 일본사람은 두 집 정도 있었던 걸로 기억하며 아버지는 바빠서 집에 자주 들어오지 못했다고 전했다.
조호정씨에 따르면 “아버지는 바쁜 와중에도 틈만나면 집 근처 애관극장이나 표관극장에서 영화를 봤는데 유독 로맨틱 영화를 좋아했다”며 “겉으로는 강인한 모습만 보였지만, 실제로는 정도 많고 눈물도 많은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죽산이 살았던 부영주택을 인천시 등이 공공차원에서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꾸준이 나오고 있다.
글· 사진 이용남 i-View 편집위원
<2021-12-15>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