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12) 4·19 불사조
“4·19희생자는 우리 시대 불사조
그들의 피가 민주와 자유 찾아줘”
60년 이승만 하야 발표 다음날
학장 신부님 강론뒤 감사가 합창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 (요한 10,17-18)
벗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 15, 13)
사랑은 그리스도교의 핵심 덕목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 희망, 사랑을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로 향한다는 뜻으로 향주삼덕(向主三德)이라 부르며, 이 중 사랑을 첫째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 또한 많은 율법 조항을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말로 요약하셨습니다.
로마에 유학한 첫해인 1965년 겨울 어느 날 저는 윤리신학 시험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구두 면접시험을 치르는데 저는 늘 하듯이 교과서를 열심히 외었습니다. 교수 신부님은 제게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너무 쉽고 자명했습니다. 저는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답했습니다. 교수님은 고개를 갸우뚱하시더니 다른 대답을 원하셨습니다. 저는 적잖이 당황했고 십자가 예수님의 희생과 헌신부터 성경의 가르침까지, 시험을 대비하여 외웠던 것들을 열심히 열거했습니다. 교수 신부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요한1서 4장 10절의 말씀 “내가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를 인용하여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백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임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저는 지금도 이 성경 말씀을 대할 때마다 부끄러웠던 그때를 떠올립니다. 교수 신부님께서는 내리사랑이야말로 사랑의 원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알기도 전에, 믿기도 전에,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점지하시고 사랑하시고 이끄셨습니다. 이러한 하느님 사랑의 예범이 바로 우리네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처럼, 부모님의 사랑처럼, 아무 조건 없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 가장 고귀합니다. 조건 없는 사랑과 투신입니다. 공동체를 위해, 나라를 위해, 민주주의와 평등을 위해 불의와 맞서 싸우며 홀연히 몸 바친 4·19 희생자들 또한 그런 사랑을 실천했던 것입니다.
“같은 입에서 찬미와 저주”가 나와서야
4·19가 일어난 1960년 봄 저는 성신대학(현 가톨릭대학교)에 입학해 혜화동 기숙사에서 살았습니다. 신학교의 시계는 정해진 규칙에 따라 움직입니다. 5시에 일어나 기도와 묵상, 미사 봉헌을 하고, 7시에 아침 식사와 청소, 8시에 첫 수업을 합니다. 대학 생활은 참 좋았습니다. 엄했던 고등학교에 비해 대신학교(가톨릭의 최고 학부)는 자유시간도 많고 일주일에 한 번 외출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입학하자마자 잇단 시위로 외출이 금지되었습니다. 신문도 배달은 되나 이틀이 지나서야 학내 게시판에 붙었기에 신문이 아니라 구문인 셈입니다. 따라서 바깥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1학년 때 저와 친구 몇몇은 학장실의 청소 담당이었습니다. 청소하다가 우연히 책상 위의 신문을 보게 되는 날이면 친구들에게 신문에서 본 것들을 신나게 전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청소 시간 중에 학장 신부님이 방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신부님께서는 “자네들은 신문 보기 위해 학장실에 왔는가?” 하시며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그 후로는 신문 볼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신학교의 12시는 낮 기도와 양심 성찰 시간입니다. 4월26일 여느 때처럼 낮 기도를 시작하려는 순간, 학장 신부님께서 제대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양심 성찰 대신 중요한 일을 전달하고자 하니 더욱 열심히 기도합시다”라고 하시며, “오늘 10시30분에 이승만 대통령이 사퇴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놀랐고 숙연한 마음으로 숨죽이며 신부님의 말씀에 귀 기울였습니다.
그날 학장 신부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이야기를 저는 평생 가슴에 간직하며 살고 있습니다. 바로 불사조 이야기입니다. 피닉스(phoenix)는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1,000년을 사는 새입니다. 이 새는 수명이 다하면 자신이 태어난 둥지로 돌아가 스스로 깃털에 불을 붙여 활활 타오릅니다. 한 줌의 재가 되면 다시 그 재 속에서 알이 부화하여 찬란히 부활한 새로운 피닉스는 더 높이 하늘을 나릅니다.
그날의 이야기를 생생히 기억하는 것은 바로 학장 신부님께서 “경무대 앞에서 죽어 간 청년 ·학생들이 우리 시대의 불사조다!”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불사조는 자신을 죽임으로써 구원을 가져온 예수님을 상징한다”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습니다. 이승만을 경무대에서 끌어내기 위해 목숨 바친 그들이 우리 시대의 불사조이고, 그들의 피가 우리에게 민주와 자유를 찾아주었다는 강론에 이어 “우리 함께 감사 가(Te Deum)를 부릅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날 성가는 우리 마음속 깊이 더 경건하게 울려 퍼졌습니다.
피닉스 신화는 중세 유럽에서 예수님의 부활과 연계해 해석되기 시작했습니다. 영생과 불멸이 죽음으로써 완성된다는 역설은 사뭇 의미심장합니다. 피닉스는 죽음으로써 영원히 사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부활의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는 결코 다시 태어날 수 없고, 낡은 껍데기를 벗어던질 수 없습니다.
교부학 수업에서 불사조 이야기가 나올 때면 학장 신부님의 강론을 떠올리며 더 큰 감흥을 느꼈습니다. 시간이 흘러 제가 교부학 교수가 되어 이 대목을 강의하게 되었고, 언제나 어김없이 4·19 당시의 생생했던 체험을 학생들에게 전했습니다.
불행하게도 4·19는 일 년 후에 일어난 5·16 군사 반란으로 날개가 꺾였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불사조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을 더 뜨겁게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박정희 유신 독재, 전두환 군부 독재를 겪으면서 저는 끊임없이 불사조 얘기를 꺼냈습니다. 제 이야기를 들은 학생들은 힘을 얻은 듯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갔습니다. 제 마음속에 늘 아픔으로 남아있는 것은 불사조를 자처했던 4·19의 주역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5·16 군부 독재의 하수인 노릇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4·19 영령을 칭송하면서 어떻게 아직도 이승만과 박정희를 인정할 수 있는지, 이것은 민족사적 모순입니다. 이제라도 진지하게 공동 성찰을 해야 합니다. “같은 입에서 찬미와 저주가 나오는”(야고보 3,10) 이 모순된 현실을 성경은 무섭게 꾸짖고 있습니다.
광화문에 4·19탑을 세우자
불의한 정권에 맞서 피 흘린 청년, 학생, 시민들이 지금 수유리 4·19 묘지에 잠들어 있습니다. 4·19를 ‘혁명’이 아닌 ‘의거’로 한 단계 격하해 불렀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4·19가 다시 혁명이 되고, 김영삼 대통령 시절 4·19 묘지가 국립묘지로 승격해 다소 한이 풀리긴 했습니다. 하지만, 손호철 교수가 주장하듯 4·19 묘지 곳곳에 “친일 친독재”의 흔적이 아직도 많습니다. 손 교수는 이것이 4·19 영령들에 대한 모독이며, 이제는 광화문 네거리에 새로운 4·19 탑을 웅장하게 세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2021.7.19 프레시안)
당연한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1960년 거리의 불꽃이 되었던 청년, 학생, 시민들은 결단코 죽지 않았습니다. 한 줌 재에서 다시 태어나는 불사조처럼 민주와 자유라는 토양이 되어 우리를 지켜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우리 모두의 영적 길잡이가 되었습니다. 영원히 살고자 하는 자, 기꺼이 죽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룩한 불멸의 삶입니다.
우리는 앞서가신 4·19 불사조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뜨거운 마음을 계승해 민주와 자유의 지평을 더 넓혀야 합니다. 지치지 말고 흔들리지 않으면서 우리 민족이 평화의 공동체로 나아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 땅에 완전한 평화와 안녕이 깃들기를 바라며 기도합니다.
거룩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헌신과 희생을 되새기며 4·19 불사조 영령들을 기립니다. 이들의 고귀한 희생을 간직하며 저희 모두 남북의 평화 공존과 우리 시대 민주주의 계승을 위한 새로운 불사조가 되게 하소서. 성령 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함세웅 신부 _ 1968년 천주교 신부가 된 뒤 줄곧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일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1974년)을 주도하는 등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2012년 현역 은퇴 뒤에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연대의 발걸음을 계속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 현대사와 관련해 쓴 글과 붓글씨를 싣는다.
<2021-12-20> 한겨레
☞기사원문: 가톨릭대 신학생들은 4·19때 왜 감사가(Te Deum)를 불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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