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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의병장 손녀의 ‘쓸쓸한’ 마지막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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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왕산 허위의 손녀 허로자 옹 별세

대한제국이 병탄되기 얼마 전, 일본에 상당한 위협을 준 의병투쟁이 있었다. 의병연합부대인 ’13도 창의군’의 1908년 한양 탈환 작전이 그중 하나다.

<고종실록>에 따르면, 12년 전인 1896년 8월 4일 전국 23부(府)를 13도로 개편하는 칙령 제36호의 반포가 있었다. 강원도·경기도·황해도를 제외한 나머지 5개 도를 각각 남·북으로 나누는 이 개편으로 인해 13도 창의군이란 명칭이 나오게 됐다.

이 부대는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대한제국 군대 출신 3000여 명이 포함된 약 1만 규모의 대병력이었다. 이미 일본군 수중에 들어간 대한제국 경내에서 1만 정도의 반일 병력이 결집되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일본 입장에서는 한층 긴장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이 부대는 한양 옆의 양주를 거점으로 삼았다. 1882년 임오군란 때 한양 남대문 밖 용산이 청나라군 주둔지가 되고 일본군이 이 기지를 이어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외국 군대가 주둔하는 용산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대규모 의병 기지를 두는 것은 매우 대담한 일이었다.

이들은 규모뿐 아니라 내용 면에서도 일본군에 위협을 줬다. 약 40회의 전투를 치른 상태에서, 경북 구미 출신인 허위(1855~1908)가 이끄는 선발대 300여 명이 한양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격했다. 연합부대는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으로 낙향한 뒤에는 허위를 중심으로 게릴라 투쟁을 계속 이어갔다.

“설령 지옥으로 떨어진다 해도 원수에게 도움을 받겠는가”

▲ 경북 구미시 임은동 왕산공원에 있는 왕산 허위 선생의 동상. ⓒ 조정훈

지휘권을 넘겨받은 허위는 지칠 줄 모르는 항일투사였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반발해 41세 때인 1896년에 항일 의병을 일으킨 그였다. 선비 출신인 그는 고종의 지령을 받고 자진 해산한 뒤 1899년 조정에 나아가 황제 비서실 간부인 비서원승 등을 역임했다.

하지만 관직 생활에 안주하지 않았다. 일본의 내정간섭을 비판하다가 체포되기도 했고, 1905년 을사늑약에 맞서 의거를 추진하기도 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의병연합부대를 지휘하게 된 그는 1908년 6월 일본 헌병대에 체포돼 서대문감옥에서 순국했다. 그와 동갑인 정치평론가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의병장 허위가 죽임을 당했다”면서 그의 최후를 이렇게 묘사했다.

“허위가 목 졸라 죽임을 당할 때 왜승이 경문(經文)을 외워 명복을 빌어주려 하자, 허위는 ‘충성스럽고 의로운 귀신은 자연스레 신선이 돼 올라가지만, 설령 지옥으로 떨어진다 해도 어찌 너희들 원수 오랑캐들에게 도움을 받겠냐?’고 꾸짖었다.

일본 관헌이 유언이 있느냐고 묻자 ‘대의를 펴지 못했는데, 유언이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고 말했다. 시신을 수습할 사람이 있느냐고 다시 묻자 ‘시체를 어찌 거두겠느냐?’며 ‘이 감옥에서 썩어지는 것이 좋다’고 한 뒤 태연한 안색으로 ‘어서 나를 죽여라’고 고함쳤다.”

일본 관헌은 시신을 수습해줄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런 질문은 애당초 필요도 없었다. 허위에게는 그 정도에 그치지 않고 항일운동까지 계승해줄 혈육들이 있었다.

맏형 허훈도 의병장이었고 셋째형 허겸도 의병이었다. 허위의 아들인 허학(1887~1940) 역시 의병이었다. 의병 가문인 이 집안은 그 뒤 해외로 대거 망명해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허학은 해방 5년 전에 카자흐스탄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우당 이회영 가문처럼 이 집안도 집단적 항일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허위의 순국은 직계혈통들이 해외로 뿔뿔이 흩어지는 계기가 됐다. 허위의 사촌형제의 손녀이자 독립운동가 이상룡의 손부인 허은의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에 수록된 이 집안 족보에서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독립운동가 허은이 쓴 이 책에 따르면, 장남 허학이 낳은 두 딸인 경놈과 로자는 소련에 살게 됐고, 차남 허영이 낳은 여섯 자녀 중 둘은 미국에 살게 됐다. 삼남 허준이 낳은 자녀들은 북한과 소련에 살게 됐다.

4남 허국의 두 딸은 클라라와 브르코프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4남의 두 딸 역시 소련에 살게 됐던 것이다. 한국 이름을 들으며 살았을 사람들이 허위의 순국으로 인해 로자·클라라·브르코프 같은 이름으로 살게 됐던 것.

외국 이름을 갖고 외국에서 살게 된 허위의 자손 중에서 한 분이 지난 26일 세상을 떠났다. 장남 허학의 둘째딸인 허로자 옹이 만 95세를 일기로 운명했다. 그의 빈소는 서울시 강동구 중앙보훈병원에 차려졌다.

95세 일기로 세상 떠난 허위의 자손, 허로자 옹

▲ 26일 별세한 허로자 선생. ⓒ 김종성

허로자 옹은 2006년에 처음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나라를 방문했다. 1926년 연해주에서 태어난 그가 80세 나이에 처음으로 한국을 찾아오게 됐던 것이다.

한명숙 당시 국무총리의 초청으로 2006년 10월 4일 귀국한 허로자 옹에 관해 그날 발행된 <한겨레> 기사 ‘의병대장 허위 손녀 허로자씨 한국 땅 첫 발’은 “항일 의병대장 허위의 손녀로 평생을 연해주와 중앙아시아로 떠돌아야 했던 ‘장군의 손녀’ 허로자(80)씨가 마침내 한국 땅을 밟았다”고 한 뒤 “할아버지 산소에 제일 가고 싶습니다. 묘소에 꽃도 바치고 절도 올릴 생각을 하느라 잠도 오지 않았습니다”라는 소감을 전했다.

아버지를 카자스흐탄에서 잃은 허로자 선생은 2006년 당시 우즈베키스탄에 살고 있었다. 소련 정부의 강제이주정책에 따라 한국인들이 카자흐스탄으로, 우즈베키스탄으로 쫓겨 다닌 결과였다.

위 기사는 “4일 오전 9시 인천공항에 도착한 노인은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 기차와 비행기로 10시간이 넘는 여행의 뒤끝인데도 피곤한 기색 하나 없었다”고 전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나라에 최초로 발을 내딛는 ’80세 소녀의 설렘’을 느끼게 해주는 보도였다.

이 방문을 계기로 그는 할아버지의 나라에 정착하게 됐다. 우즈베키스탄에 동생의 혈육들이 있었는데도 한국을 선택했다. 그래서 우즈베키스탄 조카들이 주기적으로 한국을 방문해 보살폈다고 한다.

▲ 조카 정따마라 씨. ⓒ 김종성

상주 역할을 맡은 조카 정따마라 씨에 따르면, 그는 한국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다. 그래서 한국 동포들과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했다. 통역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외로운 이곳을 떠나지 않고 15년을 지키다가 세상을 떠났다. 1908년 한양 탈환 작전에 실패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못 지키고 빼앗긴 땅을 80세 때부터 95세 때까지 홀로 지키다가 쓸쓸히 눈을 감은 것이다.

‘할아버지 산소에 꽃도 바치고 절도 올릴 생각을 하느라 잠도 오지 않았습니다’라는 그 설렘의 힘을 느낄 수 있다. 1908년 의병운동이 일본에 준 위협만큼이나 그 손녀의 삶에도 강렬한 흔적을 남겼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길은 쓸쓸했다. 27일 밤에 방문한 중앙보훈병원 빈소에는 경북 구미에서 왕산 허위 기념사업을 하는 몇몇 분과 함께 허로자 옹의 혈족 몇 명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의병장인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의병장의 손녀’마저도 쓸쓸히 떠나는 모습이었다.

발인은 28일에 진행된다. 양재역 인근의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한 뒤 당분간 정따마라씨가 유골을 보관한다고 한다. 화장 이후의 절차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김종성(qqqkim2000)

<2021-12-28>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의병장 손녀의 ‘쓸쓸한’ 마지막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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