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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김대건 신부에게서 불의 정권에 맞선 청년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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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13) 김대건 신부의 외침

“때리든 죽이든 빨리 때려 빨리 죽이시오”
죽음 앞에서 의연했던 25살 청년 김대건
의인들 희생 위에 인류의 전진 진척돼와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는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지혜서 3,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루카 9,24-25)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본받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삶의 핵심은 십자가 죽음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십자가를 수락하는 삶, 곧 순교입니다. 순교는 목숨을 걸고 피로써 증언하는 것으로, 목숨을 건 증언은 숭고합니다.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라는 교수들의 외침이 독재자를 쫓아냈습니다. 피 흘린 분들 앞에 경건하게 머리를 숙여야 할 이유입니다.

민주주의가 피를 먹고 자라듯이 교회도 피로써 성장해 왔습니다. 민주주의와 교회는 이처럼 한 짝입니다. 아시아 해방신학자 A. 피어리스 신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형 터, 골고타 언덕이 바로 교회가 태동한 자리라고 말합니다. 서울 서대문 형무소 사형 터는 우리에게 독립 항쟁의 원천이요, 조국의 뿌리인 셈입니다. 순교자 축일에 전례에 따라 사제들은 십자가 예수님, 사랑의 성령, 불길 같은 열정을 상징하는 붉은색 제의를 갖춰 입습니다. 추기경은 교회의 기둥과 핵심으로 순교를 각오하라는 의미로 붉은 수단을 입습니다. 피 흘릴 각오로 진리를 증언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핵심은 놓친 채 형식적으로 껍데기만 좇는 일이 많습니다.

유네스코 선정 ‘올해의 기념 인물’

유네스코는 김대건 신부님을 2021년 올해의 기념 인물로 선정했습니다. 한국 교회 또한 희년을 선포하여 그분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습니다. 올해를 마무리하며, 다시 한 번 김대건 신부님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특히 신부님이 서해 순위도에서 체포되어 해주 감영, 서울 포도청 등에서 겪은 104일간의 폭언과 구타와 고문을 기억하고,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조선시대 사형집행의 한 방법. 벤 목을 군대 정문에 걸어두는 것)로 순교하시기까지의 과정에 눈길을 두고자 합니다.

올해 12월 초 저는 교우들과 김대건 신부님의 제주 표착 기념 용수리 성당을 찾았습니다. 180여 년 전 차귀도에 표착한 라파엘 호를 상상하며 청년 김대건의 발자취를 따라 묵상하며 기도했습니다. 이어서 황사영(알렉산델) 순교자의 부인이자 신앙의 증인 정난주(마리아) 묘소를 찾아 피정하는 마음으로 임했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여성이고 신앙인입니다. 그날 순교자들과 의인들의 얼을 받아서인지 몸과 정신이 한결 가벼워져 하늘을 나는 듯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을 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무리 의로운 일이고, 누군가 꼭 해야 할 일이라도 그렇습니다. 우리 역사에는 이렇듯 인간적 한계를 뛰어넘어 의로운 결단을 내렸던 수많은 분이 계십니다. 그중 한 분이 바로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님입니다.

충청남도 당진에서 아버지 김제준 아냐시오와 어머니 장흥 고씨 우르술라 사이에서 태어난 신부님은 순조 21년(1821)부터 헌종 12년(1846)까지 격랑의 조선 말기를 살았습니다. 천주교의 종교적 신념을 지킨다는 것은 당시 목숨을 건 선택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신심이 깊었던 그는 작은 아버지이자 순교자인 김한현의 세례명을 이어받아 안드레아가 되었습니다. 유년 시절은 비교적 평탄했지만, 열다섯 살에 프랑스 선교사 모방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면서 가시밭길 삶이 시작됩니다.

배우 화가 김현정씨의 작품 ‘풍랑 속의 김대건 신부’. 김현정 제공

신학교에 가는 것도 큰 문제였습니다. 중국을 횡단하여 마카오까지 걸어서 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조선을 떠난 지 6개월 만에 예비 신학생 두 분과 함께 마카오에 도착합니다. 여정이 얼마나 힘들었던지 한 분은 몇 달 버티지 못하고 열병에 걸려 세상을 뜹니다. 마카오에서 신학 공부를 하는 동안에도 필리핀 마닐라로 피신을 갔다 다시 돌아오는 등 갖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1842년 청년 김대건은 청나라가 아편전쟁으로 영국에 무릎을 꿇는 국면을 지켜보며 조국을 아픈 마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조선에 돌아오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 소 떼 틈에 섞여 들어오거나, 눈 덮인 만주 벌판과 산을 가로지르기도 하나 모두 실패합니다. 1844년 말에 부제품을 받고 1845년 1월 1일 압록강을 건너 보름 뒤 서울에 도착하는데, 그 여정이 그의 심신에 얼마나 큰 부담을 주었는지 한동안 호되게 앓았다고 합니다. 병에서 회복되자 그는 순교자들의 전기를 정리하고 조선 지도를 제작하는 등 바쁘게 활동했습니다. 1845년 8월 김대건 부제는 중국 상해 금가항(金家港) 성당에서 조선인 최초로 사제 서품을 받고, 일주일 뒤에는 횡당(橫堂) 성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합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조선에 돌아가는 게 큰 문제였습니다. 그해 9월 28일 신부님은 제주도 서쪽 차귀도에 표착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며칠을 지내고 10월 12일 강경 황산포에 도착합니다. 신부님은 서울 인근에서 교리를 가르치고 미사와 성사를 집전합니다. 10년 만에 어머니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1839년에 순교한 후로, 어머니는 문전 걸식으로 생을 이어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이 무렵 다섯 달쯤이 신부님에게는 평화로운 시간이었을 거라 생각됩니다.

1846년 5월 14일 김대건 신부는 최양업 부제와 매스트르 신부의 입국을 돕기 위해 황해도 순위도로 향합니다. 중국인 어부에게 편지와 지도를 건네고 돌아오는 길, 배를 징발하려던 관리와 언쟁을 벌이다 순위도 앞바다에서 체포됩니다. 1846년 9월 16일 김대건 신부는 “나는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영원한 생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라는 말씀을 남기고 새남터에서 순교하십니다.

안중근 의사가 표상 삼은 사제 김대건

김대건 신부님은 해주 감영의 네 번째 문초에서 “때리든 죽이든 빨리 때려 빨리 죽이시오!”(打之殺之 速打速殺-타지살지 속타속살)라고 힘주어 외쳤습니다.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 자료집, 3집 62쪽) 저는 이 대목에서 의인들의 항거와 결단, 순국선열들의 굳센 신념과 결연한 모습, 불의한 정권에 맞서 싸웠던 청년, 학생, 시민 등의 고난을 떠올리며 묵상합니다. 만 25세의 청년 사제 김대건은 이제 한국 천주교 성직자들의 주보이며, 가톨릭 온 세계는 7월 5일(로마 교황청이 1925년 김대건 신부 등을 시복한 날)을 축일로 기념해 추앙합니다. 안중근 의사의 표상이 바로 청년 사제 김대건이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는 수많은 순교자의 삶이 중첩되어 있습니다. 비단 종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너나없이 나라와 겨레를 위해 목숨을 건 순국선열들의 고난이 맺은 열매를 먹으며 살아갑니다. 물질적 풍요와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요즘, 우리는 보다 진지하게 선조들이 겪은 고난의 삶을 묵상해야 합니다. 젊은이들은 청년 김대건과 같은 순교적 결단과 청순함을 되새기고 실천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제주도 용수리 성당에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 며칠 전 전직 총리 일행이 고사리 식당을 찾았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일행은 122번 번호표를 받아 1시간 20분을 식당 밖에서 줄 서서 기다렸다 식사를 했는데, 대기하는 동안 순서를 기다리던 청년 학생들과 기쁜 마음으로 담소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공직자가 있는 한 우리 사회는 희망이 있습니다. 신앙과 현실이 만난 은총의 사건, 사랑의 조화입니다. 이에 저는 김대건 신부님의 사목적 헌신과 함께 하느님과 민족 공동체를 위한 전적 봉헌의 삶을 깊이 묵상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힘든 코로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세상 어느 곳에서는 묵묵히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이 세상을 정화하고 한 차원 고양된 미래로 인류를 인도할 것이라 믿습니다. 그들이 꺼지지 않는 빛이 되어 세상의 어둠을 제거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용기와 결단으로 세상을 포용하는 그들의 앞길을 지켜 주시기를 바라며, 민족 공동체를 위해 더욱 정성스럽게 기도 바칩니다.

거룩하시고 정의로우신 하느님, 김대건 사제를 비롯한 순교자들과 순국선열, 그리고 의인들과 희생자들 모두를 기리며 기억합니다. 부디 우리 모두 초지일관의 삶을 사는 신념인들이 되게 해주소서. 그리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민족 공동체 구성원 모두 이웃과 약자를 위해 더욱 헌신하는 아름다운 열정의 실천자와 증거자가 되게 하소서. 성령 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김대건 순교 사제와 순국선열이시여, 우리 겨레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함세웅 신부 _ 1968년 천주교 신부가 된 뒤 줄곧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일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1974년)을 주도하는 등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2012년 현역 은퇴 뒤에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연대의 발걸음을 계속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 현대사와 관련해 쓴 글과 붓글씨를 싣는다.

<2021-12-27> 한겨레

☞기사원문: 김대건 신부에게서 불의 정권에 맞선 청년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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