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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보국’이란 이름의 강제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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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 33]

‘근로보국’이란 이름의 강제동원

• 강동민 자료팀장

1. 양정중학교 근로보국대 사진 ‘양정중학교 근로보국대’ 장행기를 앞세우고 근로 현장으로 이동하는 모습 2. 3. 학생들의 근로보국 활동 전주공립농업학교 졸업앨범, 1941. 4.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기념사진첩, 1937. 5. 근로보국대 경성부 성북지부 소속 보국대원의 명찰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많은 병력과 물자가 필요하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노동력 확보는 당연한 수순이다. 일제는 이렇게 필요한 노동력을 식민지 조선에서 강제동원해 전쟁을 뒷받침하려 했다. 강제동원의 형태는 여러 방식이 존재했는데 ‘근로보국대’도 그중 하나다. ‘근로보국’이란 ‘힘써 일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라’는 뜻으로 일제는 성별·계층·나이를 가릴 것 없이 일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노동력을 동원하였다. 동원 대상은 14~50세 남자와 14~25세의 미혼 여성으로 주 임무는 조선총독부에서 실시하는 공출이나 군사상 필요한 토목 건축·운반 작업에 대한 부역, 지역 단위의 공공 이익과 필요에 의한 작업에 대한 부역, 관 알선이나 징용 등 노무 인적 자원 보급이었다.

일제는 1938년 6월 ‘학생생도의 근로봉사작업 실시에 관한 건’이라는 통첩을 발표하고 학생들을 근로보국대에 편입시켰다. 학생들의 경우 학기 중에는 학업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근로보국’ 활동은 주로 방학에 이루어졌지만, 중학교나 전문학교에는 방학을 ‘심신단련’ 기간으로 부르고 방학이라는 관념을 아예 없애 버렸다. 방학은 전쟁을 치루기 위해 후방에서 ‘땀을 바치는’ 시간이 되었다. 1939년 조선총독부는 근로보국 활동을 학기 중에도 실시하게 되고 아예 ‘근로보국’을 정식과목으로 편입하여 성적까지 매겼다.

1941년 이후에는 부족한 노동력을 확충하기 위해 「국민근로보국협력령」을 시행하여 모집, 관알선 등 단계적으로 확대 편성하였다. 특히 1943년부터는 공장·사업장의 손쉬운 작업은 근로보국대의 노무로 충당할 것이 지시되면서 그 동원 규모가 확대되었다. 이렇게 해서 일제는 조선 내의 주요 산업 시설이나 광산, 농업, 토목, 건설 등 각 분야에 필요한 대부분의 노동력을 근로보국대 형태로 동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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