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1년 3월 25일에 문화재청 고시 제2021-31호를 통해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76호이던 ‘순천 팔마비(順天 八馬碑)’가 보물 제2122호로 승격 지정되었다는 소식이 있었다. 청렴한 지방관의 표상으로 일컬어지는 이 비석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고려 충렬왕 때 승평부사(昇平府使)를 지낸 최석(崔碩)과 말 8필에 얽힌 고사(故事)에서 비롯되었으며, 정유재란 때 훼손된 것을 1617년(광해군 9년)에 이르러 순천부사(順天府使)로 있던 이수광(李睟光, 1563~1629)이 이를 재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유서 깊은 팔마비를 새로 세운 경위는 비석의 뒷면에 새겨져 있는 것이 남아 있긴 하지만 워낙 풍화가 심하여 이것만으로는 정확한 판독이 힘든 상태이며, 그 대신에 이수광의 문집 『지봉집(芝峰集)』에 「순천부중건팔마비음기(順天府重建八馬碑陰記)」의 전문이 수록되어 있으므로 이를 통해 그 내용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이에 관한 자료를 구하여 대략 살펴보니 그 가운데 이러한 내용이 퍼뜩 눈에 띈다.
…… 아아, 최공이 이 부를 다스린 것은 현재까지 4백 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백성들은 그 덕을 하루 같이 사모하여 비석은 비록 못쓰게 되었으나 구비는 여전히 건재하니, 어찌 구구하게 돌에 새길 소용이 있으랴. 그러나 드러내어 알림으로써 사람들을 격려하여 힘쓰게 하는 것이 이 비석에 달려 있으니 참으로 불가결한 일이로다. (噫 崔公之爲是府四百年于今 而民思其德如一日 碑雖廢而口碑尙存 則安用區區刻石爲哉 然所以表識 而風厲乎人者 實在於此碑 固不可闕也)
여기에 나오는 ‘구비(口碑)’라는 것은 “비석에 새긴 것과 마찬가지로 세상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다는 뜻”을 담은 표현이다. 이러한 취지의 말은 음기(陰記)의 뒤쪽에 이수광이 최원우(崔元祐)의 시(詩)를 차운(次韻)하여 직접 지은 칠언절구(七言絶句)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예로부터 산천은 몇 번이나 변했던고 從古山川幾變移
그 터가 황폐해지고 매몰된 지 이미 오래이나 廢基埋沒已多時
성명을 거듭 돌에 새길 필요는 없으니 姓名不用重鐫石
좋은 일은 서로 전하여 입이 곧 비가 되네 好事相傳口是碑
<명심보감(明心寶鑑)>에도 이르기를, “큰 이름이 어찌 단단한 돌에 새기는 데에 있겠는가, 길 가는 행인의 입이 비석을 이기나니(大名豈有鐫頑石 路上行人口勝碑)”라고 하였으니, 좋은일은 구태여 비석을 만들어 새기지 않더라도 사람들의 입을 통해 오래도록 전해져 내려오기 마련인 것이다. 이러한 탓에 예로부터 이러한 ‘구비’의 힘을 더 신뢰하거나 이 때문에 실제로 비석의 건립을 극구 사양한 사례들도 심심찮게 눈에 띄곤 한다.
하지만 세상사가 어디 그런가? 이런 일들은 극소수에 그칠 뿐 애민선정비(愛民善政碑)나 청덕비(淸德碑)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에서 송덕비(頌德碑)나 공적비(功績碑)나 무슨 기념비(記念碑)와 같은 것으로 이름만 약간 달라졌을 뿐 시대를 불문하고 여전히 온갖 비석들이 마구 넘쳐나고 있지 않았던가 말이다. 더구나 비석의 표면에 새겨진 미사여구(美辭麗句)에 칭송일색(稱頌一色)의 찬사(讚辭)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사람은 없을 지라도, 어쨌거나 그것으로 인하여 비문 자체가 사람들을 현혹하는 힘을 갖는 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예를 들어, 친일파 관료(親日派 官僚)가 주인공이 되어 일제 때 건립된 무수한 비석들의 경우가 딱 그러하다. 이들의 행적과 실체를 잘 모르고 비면에 새겨진 구절로만 보면 이들만큼 어질고 훌륭한 관리는 세상에 둘도 없어 보이기 십상이니까 하는 얘기이다. 얼마 전에 강원도 춘천시의 봉의산(鳳儀山) 자락에 있는 소양정(昭陽亭; 1966년에 중층 누각으로 재건)을 찾아가는데, 이곳으로 올라가는 진입로 도로변에 이 지역의 옛 선정비를 모아놓은 비석군(碑石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단연 눈에 띄는 비석 하나는 ‘이범익 강원도지사 영세불망비’인데, 이 비석의 앞뒤로 이런 글자가 새겨져 있다.
[전면] 江原道知事 李公範益 永世不忘碑 / 德高鳳峀 惠深昭江
[후면] 昭和九年二月 日建
중간에 비명(碑銘)으로 적어놓은 부분은 “덕은 봉수(봉의산)만큼 높고, 은혜는 소강(소양강)만큼 깊도다”라는 정도로 풀이되는 구절이다. ‘ ’는 ‘岫’와 같은 글자이며, 산봉우리라는 뜻을 지녔다. 내용은 단출하지만, 그 뜻만은 대단한 찬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범익(李範益, 1883~?)이 누구이던가?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대표적인 친일관료의 한 사람이 아닌가 말이다.
그는 일찍이 강원도 춘천군수(1912.10), 경상북도 금산군수(1913.7), 달성군수(1914.3), 예천군수(1916.2), 칠곡군수(1919.6) 등을 두루 역임하고 경상남도 참여관(1927.6)과 강원도지사(재임 1929.11.28~1935.4.1)를 거쳐 충청남도지사(재임 1935.4.1~1937.2.20)로 영전한 인물이었다. 1937년 11월에는 만주국 간도성장(間島省長)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이 시기에 그는 특히 조선인 항일부대를 섬멸하기 위해 악명 높은 간도특설대(間島特設隊)의 설치를 제안한 당사자이기도 했다.
모르고 보면 그는 대단한 선정(善政)의 대명사이지만, 알고 보면 직업적인 친일부역자 그 언저리에 놓여 있는 사람인 셈이다. 그나마 이 비석의 바로 옆쪽에는 지난 2013년 8월 15일에 이범익 단죄문설치추진위원회에서 설치한 ‘친일파 이범익 단죄문’이 남아 있어서 그가 저지른 친일행적의 실상을 소개하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비문 자체에 현혹되지 않도록 한다는 점에서 참으로 다행스런 조치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이 비석 자체도 어떤 연유로 세운 것인지가 궁금하여 옛 신문자료를 뒤져보았더니, <매일신보> 1935년 11월 6일자에 수록된 「이범익 지사 송덕비 건립(李範益 知事 頌德碑 建立), 춘천읍민(春川邑民)이」 제하의 기사에 이러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춘천] 현 충남지사(現忠南知事) 이범익 씨(李範益氏)는 강원도지사(江原道知事)로 만(滿) 6년간(年間) 재임중(在任中) 교통(交通), 산업(産業), 교육(敎育) 등(等) 각반(各般)에 긍(亘)하여서 도민(道民)을 위(爲)하여 진력(盡力)한 것은 갱언(更言)할 필요(必要)가 무(無)하거니와 도민(道民)은 이 지사(李知事)를 은인(恩人)으로 생각하고 도내(道內)에 기념비(記念碑)가 건립(建立)된 군(郡)도 불선(不尠)한 중(中) 저간(這間) 춘천읍민(春川邑民)도 차(此) 은덕(恩德)을 불망(不忘)키 위(爲)하여서 다액(多額)을 드리여 조작중(造作中) 석비(石碑)가 완성(完成)되어서 거월(去月) 29일(日)에 소양정(昭陽亭) 앞 석벽중간(石壁中間)에 기념비(記念碑)를 건립(建立)하게 되었다. (사진은 동 영세불망비)
비석의 뒷면에는 ‘1934년 2월에 건립’한 것으로 새겨져 있으나, 이 기사를 통해 비석의 완성 제막은 정작 1935년 10월 29일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이범익 강원도지사가 충청남도지사로 전근 발령이 난 것은 1935년 4월 1일의 일이었으므로 이 당시는 이미 그가 춘천을 떠난 상태였던 것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알고 보니 춘천읍민들이 옛 도지사 이범익을 위해 세운 것이 이러한 비석만이 아니었다. 이것과는 별도로 그의 동상(銅像)을 세우기로 했다는 소식이 있었는데, <매일신보> 1937년 5월 27일자에 수록된 「전 강원도지사(前 江原道知事) 이범익 씨 동상(李範益氏 銅像), 춘천(春川)에 건립(建立)」 제하의 기사는 이 일의 경위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춘천(春川)] 전 강원도지사 이범익 씨는 본도 재임 6년 동안 허다한 공적을 남긴 바 있어 그가 본도를 떠난 지도 이미 3년이 경과한 오늘에도 도치(造治)에 대한 씨의 위적(偉績)은 찬연(燦然)히 빛나고 있다. 즉 당시 이 지사의 전임이 발표되자 도민은 그의 유임을 갈망한 바 있었던 터이며 씨가 떠난 후에 그의 위적을 영년 기념하고자 씨의 동상(銅像) 건립을 발기하게 되자 전 도민이 향응하여 급속도로 실현을 보게 되었었는데 그 중간에 모 사정으로 다소 지연됨을 면치 못하고 있던 중 요즈음 씨의 동상이 도착하게 되어 야마나카 토모타로(山中友太郞) 씨 집에 보관되어 있다 한다. 그리하여 발기인 측에서는 하도 속히 건립(建立)하고자 협의를 할 터이라 하며 이로써 전 도민은 씨의 위적을 다시금 상기(想起)하고 있다 한다.
그리고 이보다 1년 가량이 지나 <매일신보> 1938년 9월 30일자에는 그의 동상이 현재 소양정(昭陽亭) 부근에 건립중이며 공사가 끝나는 대로 곧 제막식(除幕式)을 거행할 것이라는 소식이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실제로 동상 건립이 완료되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다만, 동상의 모습을 담은 사진자료라든가 그 이후의 행방에 대해서는 별도로 확인이 가능한 자료가 없어서 그저 약간의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한편, 앞서 인용했던 이범익 강원도지사 영세불망비 관련기사에는 한 가지 더 흥미를 끄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를 은인으로 생각하고 기념비를 세운 도내(道內)의 군(郡)도 적지 않다”고 적은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이곳 말고도 그를 칭송하는 비석들이 몇군데 더 존재한다는 얘기가 된다.
이를 단서로 하여 강원도 지역의 금석문 탐방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강원도 홍천군 내면 창촌2 도로변에 배열되어 있는 비석군(5기)에도 이범익 강원도지사와 관련한 비석 하나가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이곳은 원래 인제군(麟蹄郡)의 관할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1945년 해방과 더불어 38선 분단으로 인하여 미군정청(美軍政廳)에 의해 홍천군으로 편입되었다가 한국전쟁 시기에 인제군에 일시 복귀한 뒤에 1954년 10월 21일에 제정된 법률 제350호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1954.11.17일 시행)의 부칙에 따라 ‘홍천군 내면’으로 확정 편입된 내력을 지녔다. 그러니까 이곳의 비석은 인제군에 속한 시절에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강원도지사 이범익각하(江原道知事 李範益 閣下)”라는 글자만 노출되어 있고 비신의 아랫쪽 상당 부분이 매몰된 상태이므로 정확한 비석의 명칭조차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이비석이 언제 조성되었는지에 대한 아무런 표시도 없으며, 무슨 연유로 세워진 것인지에 대해서도 아직까지는 관련자료가 알려진 바 없으므로 서둘러 이에 관한 보완조사가 있었으면 하고 바랄 따름이다.
이와는 별도로 이범익 강원도지사에 관한 것이라고 하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흔적의 하나는 강원도 정선아라리촌에 남아 있는 영세불망비이다. 1932년 6월에 당시 정선군수 김택림(旌善郡守 金澤林, 재임 1930.5.9~1933.5.18)이 직접 비문을 지어 세웠다는 이 비석은 원래 정선군청에 놓여 있다가 몇 군데를 떠돈 끝에 지난 2008년에 수습되어 지금의 비석군에 포함되었다고 전해진다. 이곳에도 역시 2011년 12월 28일에 ‘거물친일파 이범익 영세불망비 단죄문’이 설치됨에 따라 그의 친일행적을 새삼 상기시켜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곳에는 과연 어떤 연유로 이러한 비석이 세워진 것일까? 이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없는 상태이지만, 비석의 후면에 새겨진 명(銘)의 내용 그 자체에 이미 상당한 설명이 들어 있는 것이 보인다.
강원도지사 이범익 각하 영세불망비// 명// 골짜기로 막힌 동쪽 군이라 둘러싼 것은 온통 산이도다/ 큰길은 막혀 있고 교역은 심히 어렵구나/ 아, 우리 이후시여 어찌 동쪽 번에 이리 늦으셨나이까/ 백성을 긍휼히 여겨노고하며 보살펴 사랑하기에 바쁘시네/ 동쪽으로 오정역사를 보내어 처음으로 큰길에 닿게 하고/ 십만의 큰돈으로 자금의 조달을 도와주셨나니/ 우리 백성을 이롭게 해주고 이로부터 부유함을 보았도다/ 만 사람의 입이 모두 비를 이루니 영원히 두터운 은혜를 칭송하네/ 소화 7년(1932년) 6월 10일 정선군수 김택림 지음. (江原道知事 李範益閣下 永世不忘碑// 銘// 峽絶東郡環者皆山 康莊莫通懋遷極囏 惟我/ 李侯 何暮東藩 矜民努苦 眷愛頻煩 東譴五丁 始達/ 九逵 以鎰十萬 助給其資便宜吾民 從見富 萬口/ 皆碑 永頌厚恩/ 昭和七年六月十日 㫌善郡守 金澤林 撰)
이에 관해 현장에 설치되어 있는 ‘단죄문 안내판’에는 이 지역의 동면 화암리에 자리한 천포금산(泉浦金山; 최응호와 김정숙 내외가 운영하다가 1934년 2월에 소화광업주식회사로 광업권 이전) 쪽으로 연결되는 신작로 개설과 관련하여 이에 대한 보답으로 세운 비석이라고 추정하는 견해를 적어 놓고 있다. 하지만 비석의 건립시기가 1932년 6월인데 반해 1934년의 시기에 이르러서도 그 시절의 신문지상에 이곳 동면에 이르는 이른바 ‘금산도로(金山道路)’의 미개설 구간 개착 문제가 계속 언급되고 있는 점에 비춰 보면, 이쪽 도로와는 직접 관련이 없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그리고 이 비문 가운데 “어찌 동쪽 번에 이리 늦으셨나이까(何暮東藩)”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번(藩)’이라는 표현은 대체로 ‘나라’ 또는 ‘영토(방면)’를 일컫는 뜻으로 사용되므로 ‘동쪽 번’은 곧 ‘강원도’를 말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는 곧 도지사로서 이범익이 강원도 방면에 부임한 사실 자체를 언급한 것이지, 그가 정선군 지역을 시찰하러 직접 왔다거나 하는 뜻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이 비문에 나오는 “큰길에 닿게 한다”는 표현의 대상은 이 지역의 시급한 현안과제로 떠올라있던 ‘강릉 정선 구간 3등도로’의 개착인 것으로 드러나는데, 이에 관해서는 <매일신보> 1931년 8월 7일자에 수록된 「정선군(旌善郡)의 신시설(新施設), 김 군수(金郡守)의 열성(熱誠)으로 교통(交通)도 편리(便利)」 제하의 기사에 이러한 내용이 담겨 있다.
[원주(原州)] 강원도 정선군(江原道 旌善郡)은 산악중첩(山岳重疊)하여 동방(東方)은 대지산맥(大支山脈)이 연긍(連亘)하고 서방(西方)은 촉도(蜀道)와 같아서 성마령(星摩嶺) 서파령(署波嶺) 이령(二嶺)이 연긍(連亘)이며 북부 일대(北部 一帶)도 역(亦) 아아(峨峨)한 산맥(山脈)이 기구(崎嶇)하고 남방(南方)으로는 조양강천(朝陽江川)이 흘러 그 중(中)의 정선군(旌善郡)[구호 도원군(舊號 桃源郡)] 소재지(所在地)인데 참으로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라고 칭(稱)하겠는데 다만 교통기관(交通機關)은 평창 정선간(平昌 旌善間) 격일(隔日)로 강릉상사자동차(江陵商事自動車) 1대(一臺)만 왕복(往復)하므로 정선군민(旌善郡民)은 유감(遺憾)으로 생각하던 중(中) 군수 김택림 씨(郡守 金澤林氏)가 소화(昭和) 5년(1930년) 5월분(月分)의 신임 이후(新任 以後)로 정선(旌善)의 발전진행(發展進行)을 연구(硏究)하여 교통기관 자동차(交通機關 自動車)가 격일선(隔日線)을 본도(本道)에 교섭(交涉)하여 매일선(每日線)으로 운동(運動)하여 내인거객(來人去客)의 편리(便利)를 정(呈)하게 하고 시구개정(市區改正)에도 착수(着手)하였고 정선 강릉간 삼등도로(旌善江陵間 三等道路)를 준공(竣工)되게 하려고 김 군수(金郡守)는 누차 상도(累差 上道)하여 간청(懇請)한 결과(結果) 정선군민 사활문제(旌善郡民 死活問題)의 접(接)한 정선 강릉간 삼등도로(旌善 江陵間 三等道路)를 도지방비 보조금(道地方費 補助金) 9만여 원(萬餘圓)을 득(得)하고 정선군민 부담액(旌善郡民 負擔額) 기천 원(幾千圓)을 전부득수(全部得收)하여 7월 20일부터 공사(工事)의 착수(着手)하여 12월 15일에 준공(竣工)하기로 되었다.
여기에는 김택림 정선군수가 부임 초기부터 여러 차례 춘천에 있는 강원도청에 올라가 간청한 끝에 정선 강릉 구간의 도로개설비로 도지방비 보조금을 얻어냈다는 사실이 서술되어 있다. 이보다 앞서 <부산일보> 1930년 10월 29일자에는 「강릉 정선간 삼등도(江陵 旌善間 三等道)는 오만원(五萬圓)의 보조(補助)를 받아, 10만 3천 원의 예산(豫算)으로써 소화(昭和) 6년도(年度)까지 출현(出現)된다」 제하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는 것도 눈에 띈다.
이를 테면, 이범익 영세불망비의 비문에 새겨진 “10만의 자금조달을 도와주었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가리키는 구절인 셈이다. 이때 도로개설비로서 강원도의 보조금 5만원에다 정선군 쪽에서 조달한 3만 3천 원과 강릉군 쪽에서 조달한 2만 원을 합쳐 도합 10만 3천 원의 자금이 투입된 것으로 알려진다.
이에 따라 강릉과 정선을 잇는 도로의 개착은 해당 지역에서 경제적 이익과 사활(死活)이 걸린 해묵은 현안문제로 다뤄졌고, 1930년 5월에 예비논의를 거쳐 그해 10월 19에는 마침내 강릉군청회의실에서 양군연합(兩郡聯合)으로 ‘강릉정선선 도로속성회(江陵旌善線 道路速成會)’가 정식으로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결과로 정선군 임계면 쪽에서 강릉군 왕산면 목계리 사이를 잇는 20킬로미터 구간의 도로개착이 본격 개시된 것은 1931년 7월 20일의 일이었으며, 그 이후 1932년 11월에 이르러 완공을 보게 된다.
<조선신문> 1932년 11월 12일자에 수록된 「강릉 정선 연락도로(江陵 旌善 連絡道路) 개통축하회(開通祝賀會)」 제하의 기사는 강릉공회당에서 열린 강릉 정선간 3등도로의 개통식 및 축하회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이 행사에는 당시 이범익 강원도지사도 직접 참석하였고, 이튿날에는 새로 개통된 강릉 정선 구간의 도로를 직접 시찰까지 했던 것으로 드러난다.
[강릉(江陵)] 강릉 정선 양군(江陵 旌善 兩郡)은 밀접불리(密接不離)의 경제관계(經濟關係)를 지니면서도 교통(交通)에 혜택을 입지 못한 특수한 정선군(旌善郡)과 같은 곳은 무한(無限)의 천산물(天産物)을 지니고 있다고는 하나 교통(交通)의 이편(利便)이 없는 탓에 어떻게도 행할 방법이 없는 상태(狀態)로 강릉지방(江陵地方)에서 구입(購入)하는 제물자(諸物資)도 다액(多額)의 운임(運賃)에 피해를 입어 주민(住民)에게 끼치는 타격(打擊)은 실로 적지 않은 것이었는데, 이게 연결도로(連結道路)의 개착(開鑿)은 초미(焦眉)의 급무(急務)가 되어 일작년도(一昨年度; 재작년도)에 양군협력일치(兩郡協力一致)로 해도로(該道路)의 기성동맹회(期成同盟會)를 세워 도당국(道當局)에 진정(陳情)을 거듭하여 왔으므로 점차 당국(當局)의 용인(容認)하는 바가 되어 6년( 1931년) 7월 20일 춘천 무라카미구미(春川 村上組)의 손에 의해 정선군 임만(旌善郡 臨漫; 臨溪의 잘못)에서 강릉군 왕산면 목계리간(江陵郡 旺山面 木界里間) 5리(약 20킬로미터)의 도로개착(道路開鑿)에 착수(着手)한 이래(爾來) 예의(銳意) 공사진척중(工事進陟中)이었는데, 이즈음에 완성(完成)을 고하였고 이리하여 다년(多年)의 요망(要望)은 달성되어졌던 것이다.
이것의 개통식(開通式)과 더불어 축하회(祝賀會)를 8일 정오(正午)부터 강릉공회당 전정(江陵公會堂 前庭)에서 거행하는 것으로 되었으며, 정선군(旌善郡)에서는 김택림 군수(金澤林郡守), 토미타 경찰서장(富田警察署長) 이하(以下) 10명(名) 및 각 인접군수(各隣接郡守), 서무주임(庶務主任) 등(等)이 내강(來江)하여 식장(式場)에서 미우라 토목과장(三浦土木課長)을 맞이하였고, 이미 이 도지사(李�知事)는 수백 명(數百名)의 관민(官民)이 위의(威儀)를 바로하고 정열(整列) 정각(定刻)에 이르자 제주(祭主)의 축사(祝詞), 기타의 의례가 있었으며 …… 식(式)을 마치자마자 곧장 공회당내(公會堂內)의 축연(祝宴)으로 옮겨 최 기성회장(崔期成會長)의 인삿말에 대해 이 지사(李知事)의 사사(謝辭)가 있었고, 개연(開宴) 일력정 복내가(一力亭 福乃家; 이치리키테이 후쿠노야), 기타의 미기주간(美妓酒間)을 알선(斡旋) 성황리(盛況裡)에 폐연(閉宴)했다.
밤에는 후쿠노야(福乃家)에서 관민합동(官民合同)의 환영연(歡迎宴)이 있었고 간단(間斷) 없는 화화(花火,불꽃)를 쏘아 올리는 등 공전(空前)의 번성함을 나타냈는데, 덧붙여서 지사 일행(知事 一行)은 9일 오전(午前) 9시반(時半) 정선(旌善), 강릉(江陵) 각군수(各郡守), 서장(署長) 등(等)과 더불어 개통도로(開通道路)를 시찰(視察)하고 귀춘(歸春)의 길에 올랐다.
그러니까 정선군청에 세워졌다는 이범익 강원도지사 영세불망비의 건립 시기가 이 개통식보다 불과 석 달이 앞선 1932년 6월이라는 점에서, 이 비석이 건립된 동기는 역시 자원수탈의 통로로서 강릉 정선 사이에 험악한 도로가 마침내 개설된 사실과 연결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고 하겠다. 그리고 비문의 내용 또한 이러한 사실관계를 서술하고 있는 흔적이 역력한 상태이다.
이상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강원도 지역에는 이범익 지사와 관련한 불망비가 춘천, 정선, 홍천 등 세 곳에 남아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 가운데 홍천의 것은 비문 자체만으로는 언제, 어떠한 연유로 세워진 것인지를 전혀 가늠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운 대목이다. 나머지 두 지역의 것에는 그나마 ‘단죄문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어서 비석 앞에선 무심한 탐방객들에서 그의 친일행적을 낱낱이 알려주고 있다.
비문으로만 보면 그 누구에 못지않은 자애롭고 어질고 선량한 은인(恩人)이지만, 이러한 장치마저 없다면 그가 식민통치기를 통틀어 으뜸으로 꼽을 만한 대표적인 친일파 관료의 한 사람인줄을 어찌 알 수 있을 것인가 말이다.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이 글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영원토록 잊지 말아야 할 대상은 바로 비석에 새겨진 그의 이름 석자와 더불어 그가 저지른 친일행적의 죄상이어야만 마땅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