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 묘역 효창원 훼손한 일제, 이름까지 바꿔… 차리석 아들 “효창공원, 본래 이름으로 돌려놔야“
MBC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이 화제다. 조선 22대 왕 이산(정조)과 궁녀 성덕임(의빈성씨)과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렸기 때문인데, 실제 ‘조선왕조실록’ 등 기록에서도 두 사람의 사랑은 드라마 이상의 모습으로 끊임없이 표현됐다.
그러나 두 사람이 어렵게 얻은 아들 문효세자는 태어난 지 다섯 해도 되지 않은 1786년 6월 홍역으로 사망한다. 의빈성씨 덕임 역시 아들을 떠나보낸 지 반 년도 안 된 1786년 11월 생을 달리했다. 정조는 “슬프다”와 “사랑한다”라는 말을 담아 의빈성씨의 묘지명과 제문을 직접 작성했다.
정조는 아들과 부인의 안식처를 궁에서 멀지 않은 곳에 두고 싶어했다. 정조가 아들 문효세자를 떠나보낸 뒤 직접 지관(풍수전문가)들과 함께 도성 주변의 길지를 찾아 다닌 이유다. 도성과 한강 사이에 위치한 소나무 숲이 우거진 양지바른 언덕(현 효창공원)을 발견한 정조는 이곳을 아들의 묘로 정하고 장사를 지낸 뒤 ‘효성스럽고 번성하다’라는 뜻의 ‘효창묘’로 명명했다.
반년 뒤 의빈성씨 덕임이 사망하자 세자 묘 아래쪽 언덕에 그의 묘도 마련했다. 1870년 고종은 도성에서 가장 가까운 왕실 묘역인 효창묘를 효창원으로 격상했다. 효창원은 지금의 만리동과 청파동, 남영동, 공덕동, 도원동, 용문동에 이르기까지 100만 평에 이르는 숲으로 이뤄진 큰 규모를 자랑했다.
일제가 저지른 만행
효창원 왕가의 묘역은 일본 군대가 서울 땅에 주둔하기 시작하면서 훼손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효창원 솔숲이 펼쳐진 만리재에 병력 5000여 명의 숙영지를 마련해 주둔했다. 1904년 러일전쟁을 거치며 일제는 보다 본격적으로 효창원을 포함한 용산 일대를 일본군 기지로 만들어간다. 1910년 나라가 망한 뒤 일제는 효창원이 갖고 있던 위엄을 격하시키기 위한 여러 작업에 들어간다.
첫째가 서울지역 최초의 골프장이었다. 전국적으로 3.1운동이 발발했던 1919년 그해 일제는 효창원 일대에 5만7000평 9홀 규모의 골프장을 건립한다. 해당 골프장은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운영하던 조선호텔의 부속골프장으로 1924년 12월 청량리 일대에 대규모 골프장이 마련될 때까지 애용됐다. 골프장 건립 이유로 문효세자의 묘역에는 울타리가 세워졌다.
1925년 대홍수가 발생하자 일제는 효창원 일대에 천막촌을 마련해 이재민을 수용했다. 이듬해인 1927년부터는 효창원의 공원화를 위해 총독부가 주관하는 벚나무(사쿠라) 심기 행사를 수년 동안 반복적으로 열었다. 이후엔 일제 스스로 자신들의 행적을 기념하기 위한 각종 비석을 효창원 곳곳에 세웠다. 급기야 1940년에 일제는 효창원의 공식명칭을 ‘효창공원’으로 바꿔 버렸다.
1944년 10월 일제는 침략전쟁의 희생자를 위한 탑을 마련한다며 효창원에 잠든 문효세자와 의빈성씨 등 정조 가족들 묘를 강제로 이장하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정조가 효창원에 묘를 마련한 지 150여년만의 일이다.
김구, 왕가의 묘역에 다시 정기를 세우다
일제는 1945년 8월 패망한다. 왕가의 무덤을 훼손한 지 8개월 만의 일이다. 일제강점기 내내 목숨 걸고 독립운동을 한 지사들은 고국으로 돌아와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한 작업에 들어간다. 임정을 이끌었던 백범 김구가 선두에 섰다.
백범은 일제가 훼손한 왕가의 무덤에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한 지사들을 모실 계획을 실천한다. 이들이 바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그리고 안중근이다. 1946년 7월, 안중근을 제외한 유해를 찾은 삼의사의 국민장이 거행됐다. 2년 뒤인 1948년 9월에는 임정의 국무령을 지낸 이동녕과 비서장을 지낸 차리석의 유해를 봉환해 효창원 언덕에 모셨다.
여기서 우리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은, 문효세자가 모셔졌던 자리에 삼의사의 묘역이 조성됐고, 의빈성씨 덕임이 잠들었던 자리에 임정요인들의 묘역이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효창원의 역사를 연구해온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백범이 독립운동가의 묘를 효창원에 조성한 것은 일제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일제가 패망 전 문효세자와 의빈성씨 등 왕가의 무덤을 강제로 흩트려 놓았다. 백범 입장에서 삼의사 유해를 수습한 상황에서 자리도 좋고, 묘역 자체도 완성된, 봉분만 사라진 효창원에 모실 수밖에 없었던 거다. 1948년에 조성한 임정요인 묘역도 마찬가지다. 의빈성씨의 묘역을 그대로 활용했다.”
종합하면 독립유공자를 위한 국립묘지가 없는 상황에서 임시방편으로라도 지사들을 모실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백범에 의해 주인이 사라진 효창원 묘역으로 선정된 거다. 실제 백범일지에도 백범은 “(삼의사) 장례에 임하여 봉장위원회 책임자들이 장지를 널리 구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여, 결국 내가 직접 잡아놓은 용산 효창원 안에 매장하였다. 그것은 서울 역사 이래 처음 보는 장례식이었다”라고 기록했다.
백범은 삼의사묘역과 안중근 의사 가묘 아래쪽에 ‘遺芳百世(유방백세)’라는 글을 새겼다. 향기가 백대에 걸쳐 흐른다는 뜻으로 꽃다운 이름이 후세에 길이 전해진다는 것을 말한다.
수난을 거쳐 제자리를 찾아가다
1949년 6월 백범이 안두희 흉탄에 서거한 뒤 백범까지 삼의사 묘역 옆에 안장되었지만, 효창원의 정기는 독재정권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됐다. 참배객들의 행렬은 이승만 정권이 배치해놓은 경찰에 의해 막혔다. 이승만 정권은 한걸음 더 나아가 독립운동가 묘역 남쪽에 아시안컵 축구대회 전용 경기장을 세운다는 이유를 대며 당시 아시아 최대 규모의 효창운동장을 짓는다. 이로 인해 묘역 앞쪽에 자리했던 연못과 왕가 묘역의 제실 등이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1961년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한술 더 떠 1920년대 일제가 했던 대로 효창원 골프장 공사를 시도한다. 각계의 반대로 무산됐지만 박 정권은 1969년 느닷없이 백범과 삼의사 묘역 머리쪽에 반공투사위령탑을 세운다. 같은 시기 대한노인회관과 육영수여사 송덕비 같은 관제 시설도 세웠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인근에 원효로가 있다는 이유로 원효대사 동상도 배치한다. 이 결과 왕가의 무덤이자 독립운동가들의 묘역이었던 효창원은 우리 국민들 사이에 ‘효창공원’으로 더욱 인식돼 자리잡게 된다.
1990년대 말 김대중 정부 들어 기존 테니스장 자리에 백범기념관이 세워졌다. 2000년대 초중반 노무현 정부 들어와 민족공원화와 독립공원화 추진을 위해 효창운동장 철거 및 이전 논의가 진행됐지만 축구계와 주민들 반발로 이뤄지지 못했다. 2013년 효창공원을 국립묘지로 추가 지정하는 내용을 담은 법 개정안도 발의됐으나 효창원 일대 주민들의 거센 반발로 무산됐다.
2019년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문재인 정부는 ‘근린공원시설’이었던 효창공원을 독립운동 기념공원으로 바꾸고 효창원에 잠든 묘역들을 국가차원에서 관리하고 예우하도록 결정했다. 이에 대한 후속작업으로 용역업체에 의해 ‘효창독립 100년, 메모리얼프로젝트’가 현재 진행 중이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효창원’에서 ‘효창공원’으로 바뀐 이름에 대한 개선작업은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다.
효창공원 임정묘역에 잠든 차리석 지사의 아들 차영조씨가 30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가칭 ‘효창100년독립공원(효창독립공원)’으로 해놓고 더 진전은 없는 상태다. 효창원의 시작과 백범이 독립유공자를 모신 역사성을 고려하면 원래의 이름대로 돌아가는 게 맞지 않겠냐”며 “메모리얼 프로젝트가 눈에 보이는 알록달록한 것에만 집중하기보다는 본래의 의미와 역사성 등을 고려해 진행됐으면 한다”라고 바람을 드러낸 이유다.
김종훈 기자(moviekjh)
<2022-01-01>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