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일제 강점기였던 1932년, 이봉창 의사가 일본 도쿄에서 일왕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비록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독립운동의 큰 물꼬를 튼 의거였습니다. 그래서 의거 90주년을 맞아 이봉창 의사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임상범 기자가 전하겠습니다.
<기자>
임시정부를 찾아온 정체불명의 청년.
밀정이라는 의심도 받았지만, 은밀히 서약서를 쓰고 한인애국단 1호 단원이 된 이봉창.
차라리 일본인으로 살겠다며 일본 땅에서 일용직을 전전하던 그는 일왕 즉위식을 보러 갔다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투옥되자, 자신이 누구인지 자각하게 됩니다.
[한시준/독립기념관장 : 고민을 하죠. 내가 일본인으로 살고 싶어 해도 일본 사람들은 나를 일본인으로 봐주지 않는구나.]
삶의 목표를 바꾸고는 임시정부가 있던 상하이로 망명합니다.
[홍인근/이봉창 평전 저자 : 삼십 년 동안 육신의 쾌락은 다 했습니다. 이제 영원한 쾌락을 얻어야 되는데. 김구 선생 말씀을 듣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는 거예요.]
준비를 끝낸 이봉창은 일본으로 되돌아가고,
[홍인근/이봉창 평전 저자 : 일왕이 1월 8일 날 요요기 연병장에서 육군 관병식을 한다. 그런 얘기를 듣고 아 그날 거사하면 되겠구나.]
1932년 1월 8일, 도쿄 경시청 앞을 지나는 일왕의 마차 행렬에 수류탄을 던집니다.
[송성희/이봉창 역사울림관 : 이봉창 의사는 성공한 줄 알았어요. 왜냐하면 엄청 큰 소리가 났거든. 근데 위력은 너무 약했던 거야.]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의 거사는 실패도, 끝도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독립 의지를 만방에 알렸고 석 달 뒤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이어졌습니다.
[송성희/이봉창 역사울림관 : 이봉창 의사의 실패가 있었기 때문에 폭탄도 성능도 더 좋게 하고, 그리고 시험까지 합니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가 없었더라면 윤봉길 의사도 없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 의사는 서서히 잊혀 갔습니다.
[한시준/독립기념관장 : (독립운동은) 성공한 것보다 성공하지 못한 것들이 훨씬 많거든요. 목표로 했던 일왕을 죽이지 못했다고 해서 실패한 것으로, 역사적인 가치가 덜한 것으로 그런 생각들을 갖기 때문에…]
건국훈장 2등급인 대통령장에 머문 이 의사의 훈격부터 윤봉길 의사와 같은 1등급 대한민국장으로 올리자는 주장도 좀처럼 힘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세기 전 식민지 청년으로 살며 취업도, 집 장만도, 결혼도 못 한 채 요즘 N포 세대 못지않은 좌절과 울분을 맛보았던 모던보이, 윤봉길이 따르고자 했던, 그러나 정작 윤봉길의 그늘에 가려 조명받지 못했던 이봉창의 삶과 정신.
이제라도 우리 후손들이 기리고 새겨야 하지 않을까요.
(영상취재 : 조창현·이승환, 영상편집 : 김인선, CG : 홍성용·성재은·전해리, 제작 : 비디오머그, 자료 : 이봉창 역사울림관)
임상범 기자doongle@sbs.co.kr
<2022-01-07> SBS
☞기사원문: ‘뜻은 못 이뤘지만’…이봉창 재평가 목소리
비디오머그: 일제의 심장, 일왕을 노린 식민지 청년 이봉창! [이봉창 1부]
비디오머그: 독립운동가 굿즈를 만드는 개념 청년들의 유쾌한 덕질 [이봉창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