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기사

[오마이뉴스] 1920년대 일본이 남산에 한 짓은 끔찍하다

1456

남산 통치기구와 우리 민족 정신을 말살하려 남산에 세운 조선신궁

역사에 ‘만약’이란 게 없겠지만, 1860년대 시작된 근대가 우리 힘으로 이뤄졌다면 어땠을까를 늘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근대는 이식된 근대였습니다. 이식된 그 길을 서울에 남아있는 근대건축으로 찾아보려 합니다.[편집자말]

우리에게 남산은 어떤 존재일까? ‘우리 얼이 서린 산’이라 비견해도 무방할 것이다. 백두산과 더불어 오랜 관념으로 그리 굳어졌다. 수많은 사람이 오래전부터 불러 굳어진 노랫말 애국가 2절은 “남산 위에 저 소나무”로 시작하며 우리 기상을 드러내는 존재로 남산을 묘사한다.

환경결정론이라 할 수 있는 ‘풍수지리설’을 바탕으로 세워진 계획도시가 한양이다. 이때 남산은 계획 중심요소로, 내사산 중 주작에 해당한다. 이성계는 새 나라와 도읍 한양을 지켜 줄 수호신으로 목멱대왕(木覓大王)을 모시면서 정상에 국사당을 세운다.

▲ 한양 도성 일곽의 오늘날 멀리 외사산 중 하나인 삼각(북한)산이 보임. 그 아래로 내사산 중 사진 중앙에 백악(북악)과 좌로 인왕산, 우로 낙산이 이루는 도성 일곽 오늘날의 모습(남산에서 촬영) ⓒ 이영천

산은 또한 여러 이름을 가졌으나, 주로 목멱산이라 불렀으며 경복궁과 관계도 중요하다. 경복궁은 외사산 중 삼각산을 조산 삼고 백악산을 주산 삼아 앉힌 새 나라 법궁(法宮)이다. 남산은 경복궁 안산이다. 이렇듯 조선의 도성 한양에서 경복궁과 남산은 도시 조영과 핵심적 통치공간을 상징하는 장소성을 갖는다. 또한 남산은 국방통신인 봉수제 원점이기도 했다.

산에 오르면 도성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세가 순하고 부드러워 도성 사람들에게 일상으로 바라다보이는 친근감과 편안함을 줌은 물론이다.

왜성대와 남산대신궁

강화도조약으로 조선 최초 외국 공관, 일본 공사관이 돈의문 밖 청수관에 자리한다. 하지만 임오군란 때 불타 버리고, 제물포조약 후 금위대장 집을 2년간 임시로 사용한다. 교동에 새로 지은 공사관(1884.11)은 갑신정변 때 다시 불타 버린다. 일제는 한성조약에서 소실된 공사관 배상금 2만 원을 갈취하듯 빼앗아 간다.

▲ 일본 공사관 및 조선통감 관저 터 예장동 북측 끝단에 세워진 일본 공사관이자 조선통감 관저이던 자리의 지금 모습. 일본인들의 남산 지배는 일본 공사관이 들어서면서 부터 시작되었음. ⓒ 이영천

예장동 북측 끝단에 일본 공사관이 착공(1895)하자 남산에 일본인 집단 거류지가 생겨난다. 조선은 이들을 예장동 일원에 정착하도록 유도한다. 진고개에서 남산 서북서 기슭에 이르는 너른 공간이 점유된다. 공사관이 8년 만에 완공(1893)된다.

청일전쟁(1895) 후 일본인 이주가 급증한다. 그들은 자치기구 거류민단을 구성해 이권을 확보해가며, 풍치 좋은 남산 일대를 자신들 공간으로 만들어 갈 의도를 내비친다. 일본공원 조성이다. 일본 공사가 조선을 압박해 예장동 땅 1만㎡를 조차해 간다. 그곳에 ‘왜성대 공원(1897)’을 조성한다.

▲ 왜성대 공원 일본인들이 자기들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공간으로 조성. 통감관저 터 남측 남산 자락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 ⓒ 서울역사박물관

또한 일본인 정체성을 상징하는 신사를 구상한다. 왜성대 기세를 몰아 그들 조상 신 아마테라스를 모신 ‘남산대신궁’을 건립(1898)하기에 이른다. 정신적 구심이 세워진 셈이다. 신직(神職)은 신궁을 순수 민간신앙 주체로 세우려 한다.

하지만 일제는 신궁을 국가가 지정·보호한다는 ‘국가 신토’ 정책에 편입시킨다. 메이지 천황(1912)이 죽자 국가 신토를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취급하여, 국민을 통제·세뇌하는 주요 시설로 여긴다. ‘정신적 동화’다. 그 하나의 조치로 거류민단을 해체(1914)하고 대대적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한다. 거류민단이 누리던 특혜를 제거해 총독부 감독하에 두려는 의도다.

경성신사

강제 병합 후 일제는 조선의 국가 의례를 제한하거나 폐지 시킨다. 제단만 남기고 제사를 금지(1911)케 한 사직단이 대표적이다. 더불어 이(李) 왕가로 격하된 왕족에게 남산대신궁에 폐백(幣帛)을 바치도록 강요한다.

▲ 경성신사 참도 지금의 숭의여자대학교 안에 있었던 경성신사. 처음에는 남산대신궁으로 이름하다, 1916년 일제의 정신적 동화 정책에 따라 경성신사로 이름을 바꿈. ⓒ 서울역사박물관

1916년 들어 정식 신사인 경성신사로 바꾸고 조선인을 정신적 동화 대상으로 삼는다. 조선신궁 건립 전까지 임시변통 격 역할을 맡기며, 아마테라스 외 주신을 추가한다. 배경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주입과 종교적으로 한반도가 일제 영토임을 합리화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다.

이에 신직이 반발한다. 종교 자유와 천황제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일어난 대립이자, 국가 신토 자체 모순이다. 일본인 간에도 분열이 상당해, 충성심을 공고히 하는 단계까지 이르지는 못한다. 신사 갹출금은 하층민 반감을 불러일으켜 정신적 동화를 갉아 먹는 기제로 작동한다.

또한 신직은 일선동조론을 받아들이기보다 조선인을 ‘비문명적 존재’로 멸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신사는 조선인을 더욱 차별하고 배제하는 편법을 부린다. 이는 조선인이 신사에서 더욱 멀어지는 결과로 나타난다. 총독부는 결국 이 작은 신사 장악에 실패한 셈이다.

경성신사는 1936년에 이르러서야 국폐소사(國幣小社)로 승격한다. 1900㎡(1915) 면적이 20900㎡(1932)로 증가한다.

▲ 노기신사 유구 일왕 메이지가 1912년 죽자, 부인과 함께 자결한 일본군 장성 노기를 기려 1930년대 지은 신사의 유구. 리라초등학교 위 사회복지단체 남산원 자리에 있음. ⓒ 이영천

만주사변(1931) 후 대륙 침략이 노골화되던 시기 경성신사 아래 터에 노기신사가 들어선다. 전쟁을 염두에 둔 시점에, 천황을 따라 자결한 그의 죽음을 본받아 조선인도 천황과 일제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리라는 노골적 요구인 셈이다.

한양공원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남산자락에 통감부 청사를 새로 짓는다. 공사관을 통감 관저로 사용한다. 남산이 명실상부 조선 강탈의 핵심지역으로 변모한 것이다.

남산 서북서 일대가 이때 공원으로 변모한다. 일본 왕세자 방문(1907)을 계기로 숭례문 양측 성곽이 허물어진다. 일본인들이 한일 공동공원 개설 명목으로 남산 서북서 능선 1백만㎡ 차입을 청원(1908)한다. 친일파들이 그 땅을 무상으로 영구 대여한다.

이 땅을 차지한 일제 속셈은 따로 있었다. 이곳은 둘로 분리된 일본인 중심지를 연결하는 지리적 요충지였다. 남산기슭 왜성대 일원과 군사용으로 만든 용산역 및 군사기지로 조성 중이던 용산기지를 연계하는 지리적 결절점이기 때문이다.

▲ 한양공원 석비 친일파가 일본에 바친 광대한 토지에 일본인 위락시설 조성을 위해 만든 공원. 한양공원 친필현판을 고종이 내리고, 그 글을 가져다 1912년 석비를 세움. 지금의 남산 케이블카 승강장 위에 위치. ⓒ 이영천

1908년 봄 공원 조성에 착수하여 2년(1910.05) 후 2천여 명이 참석한 성대한 개원식을 치른다. 고종은 친필로 ‘한양공원(漢陽公園)’ 등의 현판을 하사한다. 공원 안에 ‘한양공원’ 비석(1912)이 세워진다. 한양공원은 남산에 국가 신토의 표본인 ‘조선신궁(1925)’이 들어서는 기반이 된다.

조선신궁

조선을 통괄하는 총본산 신사 건립이 시급해진다. 아울러 조선의 영구 통치기반을 다지는 총독부 청사도 새로 짓고(1916년 착공) 있다. 신사 위계를 결정하는 제신(祭神) 선정이 관건이다. 아마테라스와 함께 강점 직후 죽은(1912) 일왕 메이지를 택해, 내각 총리 대신에게 조선신궁 창립 청원(1918) 문서를 보낸다.

이듬해 3・1운동이 일어났다. 일제는 혼란스러운 조선을 종교 및 이데올로기적으로 수습할 당위성을 인식한다. 또한 큰 불안감을 느끼는 재 조선 일본인을 안심시켜야 할 필요성도 커진다. 이에 내각 고시 제12호(1919.07.18)로 조선신궁 창립을 허가한다.

▲ 조선신궁 지도 약 42.3만 평방미터(12.79만 평)로 조성된 거대한 조선신궁 평면도. 일제가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일선동조론(조선인 및 재 조선 일본인의 정신적 동화)을 이끌어 낼 목적으로 1925년 10월 15일 건립. ⓒ 서울역사박물관

지금의 청와대 자리를 터로 검토하나 남산 및 총독부 신청사와 공간구성 및 시설안배를 고려, 한양공원을 터로 선정(1918)한다. 이곳은 조망이 뛰어나 위엄과 권위를 드러내기에 더할 나위 없는 장소다. 메이지 신궁 건립을 감독한 ‘이토 츄타’ 동경대 교수가 설계를 맡는다.

▲ 완공 직전 조선신궁 조선신궁 본전과 상, 중 광장 모습. 멀리 경성(서울)역이 선명하게 보임. ⓒ 서울역사박물관

150만 원 예산으로 공사에 착수(1920)한다. 토목공사로 터를 넓히고 연못 물로 급수 문제를 해결하며, 참배 길을 내 지리적 한계를 극복한다. 지진제(1920.05)를 시작으로 일련의 신토 행사를 거쳐 진좌제(1925.10.15) 전 공사가 끝난다.

이때 남산 국사당도 인왕산 중턱으로 옮겨 버린다. 신궁보다 높은 곳에 있어 불경스럽다는 이유다.

▲ 조선신궁 항공사진 1930년대로 추정되는 조선신궁 항공사진. ⓒ 서울역사박물관

상중하 3개 광장을 구성, 각 광장에 서북서 좌향 건물을 앉힌다. 거대한 돌계단을 둔 참배 길 맨 아래 광장 입구에 큰 도리이(신전 상징물. 기둥을 세우고 가로 보를 얹은 門)를 세웠다. 경복궁 총독부와 신궁이 일직선에 놓인다.

신체(神體)를 일본에서 가져온다. 10일 도쿄를 떠나 12일 부산역에 도착한다. 진좌제에 맞춰 개장한 새 경성역으로 13일 신체를 실은 열차가 도착한다. 역 앞에 커다란 봉축문을 세우고 숭례문 및 신체가 지나는 주변 도로와 집들을 전등과 꽃으로 휘황하게 장식한다. 학생들이 동원되고, 평양항공대가 봉축 비행을 한다.

▲ 1920년대 남산 스카이 라인 남산 허리를 짓누르고 있는 조선신궁의 새하얀 참도(384 돌계단)가 경성의 시각적 경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사진. ⓒ 서울역사박물관

조선신궁이 경성 도시경관을 완전히 바꿔버린다. 조선인을 겁박하기에 충분하리만큼 위압적이다. 각종 제사가 행해지고 학생과 군인 등 조선인 강제 참배가 이뤄졌다.

해방 후 전국에서 신사가 파괴된다. 일부는 일본인이 정리한다. 조선신궁과 경성신사가 대표적이다. 총독부가 극비리에 신령을 되돌려보내는 승신식을 거행한다. 일본 신토 역사상 처음이다. 조선에 치욕을 안겼던 그들은, 거꾸로 치욕이 부담스러웠던지 산 사람보다 먼저 신을 도망치게 한 것이다. 비겁한 족속이다.

▲ 현재 남산공원 조선신궁이 차지하던 자리의 지금 모습. 앞에 높은 빌딩이 들어서 서울역 모습 등을 가리고 있음. 남산 성곽 복원 등으로 우리 정신을 찾는 주체적 시설로 변모 중. ⓒ 이영천

이 족속이 심어놓은 정신이 지금도 우리 안에 살아 꿈틀거린다. 치욕스러운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까닭이다. 그러나 아직 늦진 않았다.

이영천(shrenrhw)

<2022-01-01>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1920년대 일본이 남산에 한 짓은 끔찍하다

※관련기사

☞한겨레: [연재] 서울 근대건축 톺아보기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