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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차별과 혐오, 타향살이 아픔···주소 불명 작품에 ‘주소’를 부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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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조선인 미술사 발굴학자 백름

백름(白凜)은 ‘재일조선인 미술사’를 발굴한 학자다. 이 발굴을 ‘반전’이라고 말한다. “재일조선인 미술은 언급할 가치가 없고, 연구 대상도 되지 않는다는 판단”을 뒤집은 것이기 때문이다. 반전 계기는 1999년 일본 교토에서 열린 ‘아름전’이다. 재일조선인에게도 ‘미술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재일조선인 2세들이 중심이 돼 개최한 이 전시에 재일조선인 1세 화가의 작품들이 나왔다. “재일조선인 미술가 집단의 에너지에 감동했다. 고흐나 마네 같은 서양 미술인들은 알면서 재일조선인 미술가들은 이름도, 인생도, 작품도 왜 몰랐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김희려, 베트남 파병에 반대하는 어머니들(1961). 백름 제공

일본 조선대학교 교육학부 미술과 졸업을 앞둔 때다. 당시 이 학교 교수 리용훈이 ‘재일코리안 미술의 궤적’이라는 제목으로 강의했다. “리 선생님이 ‘재일조선인 미술사를 정리하는 연구자가 나와야 하는데…’ 하고 몇 번 말씀하셨다. 그때 ‘내가 해보자’고 마음먹었다”고 했다.

재일조선인은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국적을 부여받고 살다 1945년 해방 뒤 무국적자로 분류됐다. 남북이 분단하면서 ‘대한민국’ 지지자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지자로 나뉘었다. 재일조선인은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이나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조총련)에 각각 소속되거나 가입하지 않은 이들을 통칭한다. 이들은 남북한은 물론 일본 국적도 취득하지 않았다. 백름은 재일조선인이 “ ‘북한 사람’이 아니라 조선반도(한반도)에 뿌리를 두고 일본에 사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백름은 처음으로 재일조선인 미술가들의 집단 활동을 연구했다. 활동의 시작은 1947년 설립된 조선미술협회 결성이다. 이들은 “민족이 대립과 차이의 키워드가 아닌 공존의 키워드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활동했다.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나고 ‘재일조선미술회’가 설립됐다. 백름은 “조국에 새로운 르네상스를 불러오겠다는 큰 포부를 나눠 가졌다. 재일조선인 미술회는 ‘테마 제작’을 시도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한동휘, 가와사키 조선인부락(1960). 백름 제공

‘테마 제작’은 “어떤 사건이나 일이 벌어지는 상황을 공통 주제로 설정하고 작가 각자의 방법으로 제작하는 방법”이다. 1958년 테마는 ‘재일조선인의 생활’, 1960년은 ‘귀국’(1959년부터 시작된 재일조선인의 북한 귀국), ‘4·19혁명’ 등이다. ‘테마 제작’을 잘 보여주는 게 김희려(1926~2007)의 작품이다. ‘학살’ ‘밀항’ ‘베트남 파병에 반대하는 어머니들’을 1961년에 그렸다. ‘학살’은 4·19 때 저항하는 시민, 쓰러진 아들 옆에서 절규하는 어머니 등을 묘사했다. 참전하는 아들을 부여잡고 흐느끼는 어머니와 어두운 표정으로 베트남행 배로 이동하는 국군 모습이 ‘베트남 파병에 반대하는 어머니들’의 주 재현 대상이다. ‘밀항’은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밀항하는 이들의 불안한 표정을 묘사했다. 일제 수탈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거나 일제의 총동원을 피하려는 한국 남부지방 사람들이 일본으로 밀항하곤 했다. 재일조선인은 경상도를 고향으로 둔 이들이 많다. 제주·전라도 출신이 그 다음이다. 이들은 주로 강제 징용자이거나 그 후손이다. 백름은 “재일조선인 대부분은 한반도 남쪽에 고향을 두고 있다. (4·19 등) 한국의 민주화투쟁은 재일조선인이 당시 가장 관심을 가졌던 사회 사건 중 하나”라고 했다.

한우영, ‘궐기한 남조선 청년 학생들’(1960). 백름 제공
김희려, ‘학살’(1961). 백름 제공

이 작품들은 백름이 찾아낸 <재일조선미술가화집>(1962, 백령 편집)에 들어 있다. 재일조선인 미술가들 스스로 편집한 최초의 화집이다. 백령은 “1950년대 재일조선인 미술사를 다룰 때 가장 중요한 자료”라고 했다.

이 작가들은 어떤 활동을 했을까. 백름은 “1950년대 전반 많은 재일조선인 미술가는 개인 자격으로 일본 공모전에 출품했다. ‘전후 일본 리얼리즘에 영향받아 민중을 위한 미술 건설을 목적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당시 일본 리얼리즘 미술은 ‘전쟁터에서 돌아온 군인들의 생활’ ‘노동자의 파업’ ‘일본 미군기지’ ‘핵 군비 증강 반대 평화운동’ 등을 다뤘다. 재일조선인 미술가들은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일본 시민단체 주최 ‘평화미술전’에도 작품을 출품했다.

1959년 <조선미술> 제6호는 재일조선인 미술가들의 경향을 가늠할 자료다. 표현과 정치, 자본이나 권력과 예술 등에 대한 논의를 수록했다. 백름은 백령 등 재일조선인 미술가들의 미술철학 등도 조명했다. 백령은 “초현실주의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전환을 이루었다”고 평가받은 작가 겸 평론가다. 백름은 미술가들이 어디서 미술 교육을 받았는지도 좇았다. 재일조선인 미술가들은 주로 한반도 출신 유학생들이다. 대학에 못 간 이들은 오사카미술연구소 등지에서 공부했다.

재일조선인 미술은 현재진행형이다. 한동휘의 ‘가와사키 조선인부락’(1960)은 재일조선인 생활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가와사키 한인타운 안에는 조선인 징용마을인 사쿠라모토가 있다. ‘혐한’ 등 일본 극우의 타깃이 되곤 했다. 가와사키시는 2002년 ‘차별 없는 인권존중마을 만들기 조례’를 제정해 시행했다.

김창덕, 가난한생활(1960). 백름 제공

표세종(1929~ )의 대표작 ‘내년에는 우리학교에’(1958)는 민족학교 입학 전, 일본의 어느 길모퉁이에서 ‘조선’ 등 한글을 쓰는 아이들의 모습을 그렸다. 표세종의 아이들이 모델이다. 조총련계 민족학교는 최근까지 차별을 겪고 있다. 2006년 ‘홋카이도 조선초중고급학교’를 다룬 김명준의 영화 <우리학교>가 있다. 백름은 당시 김명준 초청으로 <우리학교> 상영회에 참여했다. 최근 개봉한 다큐멘터리 <나는 조선 사람입니다>도 민족학교 문제가 나온다. 이 영화는 “일본은 차별하고 한국은 외면한” 재일조선인 문제를 다룬다.

재일조선인들의 남북 간 교류 노력을 발굴한 것도 백름의 연구 성과 중 하나다. “조선반도 남쪽을 지지하는 사람, 북쪽을 지지하는 사람, 중립적인 입장에 선 사람이 4·19혁명을 계기로 모여, 두 번에 걸쳐 전람회를 개최했다.” ‘재일한국백엽동인미술부’ ‘재일코리아미술가협회’ ‘재일본조선문학예술가동맹 미술부’가 1961년 도쿄에서 두 차례 개최한 ‘연립전’이다. 같은 시기 열린 문화제에도 총련계와 민단계의 문화인이 참여했다. 이 교류는 지속하지 못하다가 1993년 12월에 가서야 민단·조총련계와 다른 해외동포 미술가들이 참여한 ‘코리아통일미술전’이 열린다.

김희려, ‘밀항’(1961). 백름 제공

백름은 “재일조선인 작품 연구는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고, ‘주소 불명’이었던 미술 작품에 ‘주소’를 부여하는 일, 즉 적절한 소장처(관리처)를 만들어주는 일”이라고 말했다. 2016년 ‘재일코리안 미술 작품보존협회’를 설립한 것도 연장선의 작업이다. 재일조선인 1·2세의 미술 작품을 발굴·보존하고, 전람회를 개최하는 게 주요 활동이다. 재일 미술가 활동과 후세대 교육지원도 맡았다. 오는 3월 ‘재일조선인 미술사 연구에서 만난 미술 선생님들’이란 제목의 판화전을 개최한다. 1940년대 말 이후 조선학교의 판화 교육 내용과 작품을 들여다본다. 아오야마 다케미, 정광균, 하상철 등 미술 선생 활동도 소개한다. 전래동화 그림을 그린 박민도 작품 세계도 연구 계획에 올렸다.

1962년(추정) 재일본 조선문학 예술가 동맹 미술부 제2차 정기총회 모습. 위 왼쪽부터 김희려, 백령, 한우영, 성리식. 아래 왼쪽부터 허훈, 리철주, 김창덕, 파악 안됨, 표세종. 리용훈 사진을 백름이 제공.

“재일조선인 미술 작품에 가치가 있는가” “평가할 가치가 있는가”. 백름이 연구 과정에 여러 차례 들은 말이다. 재일조선인 미술사를 연구하며 서양미술사 거장 연구자들의 생각에 좌우되지 않으려고 생각했다. 예쁜 그림 같은 일반적 미의 기준이나 얼마에 팔리는지 같은 자본주의 가치관으로 들여다보지 않으려 했다. 자료를 발굴·분석하고, 생존 작가와 유족 등을 대상으로 60여차례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렇게 찾아낸 의미는 “재일조선인 미술은 전후 일본에서 경험된 남북공동 역사의 표출이다. 민족미술사에서 ‘이민의 미술’ ‘타자의 미술’이 아니라 우리 민족으로 일궈왔던 미술”이다.

백름은 “제대로 보호받지 못했기에 세상에 나올 수 없었고, 그 결과 정당한 평가의 장에 등장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십수 년 실제로 작품을 보아왔던 나는 이를 가치 있는 작품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가치를 두고 “사회적 소수자의 삶, 기록되지 않은 자들의 삶을 찾아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일조선인 인권과 삶의 증거에 빛을 비추는 것”이라고도 했다.

표세종, ‘내년은 우리 학교에’(1958). 백름 제공

자신의 존재를 들여다보는 작업이기도 하다. 40대인 백름은 일본 시마네현에서 태어난 재일동포 3세다. 조부모의 고향은 경북 영천이다. 백름은 호쿠리 조선초중급학교, 아이치 조선중고급학교, 조선대 교육학부 미술과, 도쿄예술대학 미술학부를 나왔다. 주로 총련계 민족학교를 다녔다. ‘고향은 남한’, ‘총련계 학교 수학’이 백름이란 연구자를 이루는 국가 정체성 중 하나다. 백름은 “(내 조국은 남북한) 그 어느 쪽도 아니다”고 말한다. ‘재일조선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취지의 말이다. 자신의 연구도 “재일조선인의 정체성을 검증하기 위한 작업이 아니다. 연구대상이 된 재일조선인 미술가가 ‘한국 측 사람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 사람이다’, ‘(귀화) 일본인이다’ 같은 정체성과 연관된 것은 아니다. 이 연구는 조선반도에 뿌리를 둔 사람들이 타향에서 어떤 표현 활동을 하고, 어떻게 싸워왔는지, 누구에게 무엇을 호소하려 했는지를 생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재일조선인은 일본 식민지정책으로 생긴 존재다. 일제식민지라는 아픔을 경험했다. 일본에 와서 강제노동에 동원됐다. 조선반도가 자주적이고 평화로운 곳이 되기를 바라며 하루하루를 이웃 동포와 함께 견디며 살았다. 1·2세를 모시는 3세가 지금 살고 있다.” 그는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억울하게 일본에서 생을 마친 조부모들을 떠올리며 조선반도를 언제나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재일조선인 미술사 연구자 백름이 지난해 김복진 상을 수상한 뒤 일본 자택에서 촬영한 기념 사진이다. 백름 제공

재일조선인에 대한 오해와 편견은 여전하다. “한국인들이 우리 재일조선인을 보고 왠지 ‘모자란 사람’이라고 합니다. ‘일본에 살면서 조선반도를 그리워 하는 어딘지 좀 모자라고 도와줘야 할 사람들’이라고 인식하지요. ‘완전한 한국인이 아닌 사람’이라고 해서 심지어 제게 ‘한국인이세요? 일본인이세요?’라고 질문한 신문기자까지 있어요. 완전 마음 상했습니다. 굴욕적이었습니다.” 그는 “조선반도 평화를 생각하면서 살아왔는데 제가 사랑해야 할 조선반도에 사는 같은 민족은 재일조선인을 몰랐다”고 말한다. 재일조선인 미술도 ‘일본인화된 미술인’, ‘모자란 미술인’, ‘모국을 떠난 미술인’, ‘모국과 끊긴 미술인’로 인식하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재일조선인이 어떻게 생기게 되었고, 어떻게 살아왔으며, 지금 일본 사회에서 무엇을 경험하는지, 왜 조선인으로 살려는지를 살피는 입장에서 작품을 감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백름은 연구 업적을 평가받아 지난해 한국에서 김복진상을 수상했다. 김복진상은 서구 근대조각을 한국에 이식·정착시켰고,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토월회·카프를 주도한 김복진을 기리기 위해 2006년 제정됐다. 지난해 4월 일본에서 출간한 <재일조선인 미술사 1945-1962, 미술가들의 표현활동 기록>은 올해 한국에서도 번역 출간된다. 출판사 연립서가가 올해 출간을 목표로 번역 작업을 진행중이다. 연립서가 대표 최재혁·박현정은 도쿄예술대학에서 일본 동양미술사 박사과정을 보낼 때 백름과 만났다.

‘여성 연구자’의 어려움도 이야기했다. 백름은 경제·건강 문제로 연구를 그만두려고 했는데, 가장 고통스러운 게 ‘사회적 통념’이었다고 했다. “결혼도 하지 않고 언제까지 공부할 셈이니” 같은 말을 듣다 결혼 뒤에는 “아이도 안 낳고 연구만 하니”, 출산 뒤에는 “아이를 맡기면서까지 자료를 찾으러 돌아다닐 거야” 같은 말을 들었다. 최근에도 “결혼했는데 아직 연구하고 있냐”, “둘째는 안 낳냐”라는 말을 듣는다.

백름이 지난해 4월 일본에서 출간한 <재일조선인 미술사 1945-1962, 미술가들의 표현활동 기록>. 백름 제공

백름은 성별이나 출신에 상관없이 다양한 삶의 방식을 존중하는 사회에 관해 매일매일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여성 연구자들이 속을 상하지 않는 세상, 여성 연구자들이 마음 놓고 연구하고 자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고 있고 그런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도 했다.

김종목 기자

<2022-01-10> 경향신문

☞기사원문: 차별과 혐오, 타향살이 아픔···주소 불명 작품에 ‘주소’를 부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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