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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곡기 끊어 순국한 독립운동가와 ‘민족가수’ 백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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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111주기 자하 장기석(1860~1911) 선생을 기리며

▲ 해동청풍비와 박씨 부인 기열비가 있는 비각. 성주군 벽진면 봉계리에 있다. ⓒ 장호철

1월 5일은 자하(紫下) 장기석(張基奭, 1860~1911) 선생의 순국 111주기였다. 1세기하고도 10년이 더 지났으니 역사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졌던가. 나는 자료를 뒤져 그의 삶을 돌이켜보다가 그 주말에 성주 벽진의 집실 마을을 다녀왔다.

감옥에서 27일간 곡기 끊어 순국

선생을 알게 된 것은 2년 전, 순국 102주기를 맞은 칠곡의 독립운동가 만송 유병헌(1842~1918) 선생을 기리는 기사를 쓸 무렵이다(관련 기사 : “일왕 머리를 베었어야” 법정서 일갈한 선비의 사연). 경술국치 이후에 자정(自靖) 순국한 분 가운데서 이웃 고을 성주 출신인 선생의 함자를 발견하면서였다.

자하 장기석은 국권을 잃은 이듬해인 1911년 1월 5일,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그 전해 성주경찰서를 거쳐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때부터 27일간, 일제의 위협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식음을 거부하며 저항한 끝에 순절한 것이다. 7년 뒤에 같은 방식으로 같은 장소에서 이웃 칠곡의 선비 만송도 곡기를 끊어 순국했다.

경북 성주군 벽진면 봉계리 집실(가곡 家谷)에서 태어난 자하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몹시 가난하게 살았다. 스물넷에야 칠곡군 기산면 평복리의 함양 박씨와 혼인한 것도, 38세에 이르도록 공부를 하지 못한 것도 가난 탓이었다. 날로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통탄하던 그는 서른아홉 살(1898)이 되어서야 학문의 길에 들어 마흔셋에 사서 육경을 통달하고 후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 경북 성주군 벽진면 봉계리 집실마을. 자하 장기석 선생은 인동장씨 집성촌인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 장호철

1910년 경술국치를 앞두고 그는 “독립 국민이 어찌 오랑캐의 백성이 되겠느냐? 제군들은 충의에 신명을 바쳐야 한다”라고 말한 뒤 문하생들을 돌려보내고 두문불출했다. 그러나 8월에 나라가 일제에 강제 합병되면서 대한제국은 역사 저편으로 사라졌다.

11월 3일, 일왕 메이지(明治)의 생일을 축하하는 이른바 천장절(天長節) 경축식 초청장이 성주군수와 경찰서장 이름으로 그에게 전달됐다. 그는 당연히 이를 거부했는데, 며칠 뒤에 일제는 ‘국경(國慶) 반대자’라며 그에게 성주경찰서에 나오라고 명령했다.

그는 순사가 전달하는 호출장 뒷면에 “내 목이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원수 놈의 부름에 발을 옮길 수 없다(我頭可斷, 足不可移)”라고 써서 순사를 되돌려 보냈다. 이에 경찰서장은 수십 명의 일경을 보내 그를 묶어서 데려갔다(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순사에게 목침을 던져 중상을 입혔다고 기록하고 있고, 일부 자료에는 순사의 얼굴에 화로를 던졌다고 돼 있다).

“내 목은 베어도 내 뜻을 꺾을 수 없다”

1910년 12월 7일, 성주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된 그는 심문에서 “나는 조선 사람이요. 일본 국왕은 우리의 국적이다. 합방하던 날 죽지 않은 것은 동포가 단합하여 너희 놈을 격멸하기 위함이다”라 하면서 모든 심문을 거부했다.

12월 9일, 대구형무소로 이감된 장기석은 손톱과 발톱을 다 뽑히는 잔혹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내 목은 베어도 내 뜻을 꺾을 수 없다”라고 하며 일제가 주는 모든 음식을 거부했다. 이듬해 1월 5일, 곡기를 끊은 지 27일 만에 그는 옥중에서 순국했다. 향년 51세.

이튿날 장의차가 대구 시가지에 나올 때는 모든 점포가 문을 닫고, 남녀노소가 거리에 나와 통곡하니 그 수가 1만여 명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나라가 망하는 과정을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으나, 백성들은 그의 죽음과 저항의 의미를 분명하게 인식했던 것이다. 1911년 3월 8일, 경북 도내 유림 만여 명이 모여 거행한 장례식에는 만장(輓章)이 1000여 개, 제문도 100여 수에 이르렀다.

25년 후인 1936년, 전국 유림이 모여 선생의 충의와 절개를 기리고자 자하가 살던 집실 자양산 아래에 빗돌 하나를 세웠다. 이 빗돌이 중국 수양산의 ‘백이숙제(伯夷叔齊) 백세청풍비(百世淸風碑)’를 본뜬 높이 3.2m, 너비 1.1m, 두께 45cm의 ‘海東淸風(해동청풍)’비다.

▲ 해동청풍비. 1936년 전국 유림이 자하의 충절을 기려 백이 숙제의 “백세충풍”비를 본떠 세운 빗둘이다. 이듬해 일제가 파괴한 흔적이 비신에 역력하다. 1946년김창숙과 김구가 주도하여 다시 세웠다. ⓒ 장호철

이듬해인 1937년 4월 26일, 성주경찰서는 유족에게 “장기석은 평생 일본을 반대하였으며 해동청풍비는 조선 민족 사상을 고취하는 것이므로 파괴한다”라고 통보했다. 그러자 일찍이 장례일에 묘터에서 자결하여 부군을 따르려 했던 부인 박씨는 그날 밤, 비석 뒤 뽕나무에 목을 매 죽음으로 일제의 만행에 항거했다.

일제, 백세청풍비를 파괴… 부인은 죽음으로 저항

이튿날 무장한 일경 10여 명이 석공을 데리고 와서 ‘해동청풍비’를 부수어 근처 냇가에 버리고 갔다. 일제는 자하를 기린 빗돌이 민족 사상을 북돋울 것을 두려워한 것이었으니, 그 졸렬함이 이와 같았다.

버려진 빗돌이 복구된 것은 해방 후인 1946년이다. 도내 유림과 지역 인사의 발의로 파괴된 비편을 모아 쇳조각으로 이어 해동청풍비를 다시 세웠다. 빗돌 뒷면에는 수습 복원의 경위를 심산 김창숙이 짓고, 백범 김구가 쓴 비문을 새겼다. 또 박씨 부인의 충렬을 기리고자 해동청풍비 앞에 위당 정인보의 글로 ‘박씨 부인 기열비(紀烈碑)’를 세웠다.

▲ 1946년 백세청풍비를 복원하며 세운 “박씨 부인 기열비”. 백세청풍비를 파괴한다는 일제의 기별을 받고 비석 뒤에서 자결한 함양 박씨를 기린 비다. ⓒ 장호철

해방 뒤 정부는 선생께 1963년 대통령 표창, 1977년에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을 추서했다. 자양산에 묻혀 있던 선생의 유해는 2007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벼슬길에 오른 적 없는, 일개 유생인 그는 ‘오랑캐의 백성’ 되기를 거부하고 일제에 저항했고, 감옥에 갇히자 곡기를 끊어 그 여생을 거두어버렸다. 자하의 우국충정과 절의(節義)를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어 먹다 아사한 백이숙제에 비기고 말겠는가.

심산과 자하의 고장 성주에 ‘백년설’ 노래비가 세 곳이다.

성주는 자하 말고도 심산 김창숙(1879~1962, 1962 대한민국장)과 그의 스승 이승희(1847~1916, 1977 대통령장) 같은 쟁쟁한 독립운동가를 낳은 고장이다. ‘모자상봉’ ‘위문편지’ ‘즐거운 상처’ ‘혈서 지원’ 등 모두 11곡의 군국가요를 불러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대중가요 가수 백년설(1915~1980)도 성주 출신이다.

그는 성주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심산이나 자하는 몰라도 ‘나그네 설움’의 백년설을 모르는 성주사람은 아마 없으리라. 워낙 유명한 유행가를 불러서지만, 성주 읍내에 세 군데나 세워진 백년설 노래비가 곳곳에서 그의 존재를 환기해 주기 때문이다.

▲ 백년설을 기리는 노래비와 흉상. 맨 왼쪽부터 성밖숲 노래비(1992), 성주고 교정의 흉상과 노래비(2009), 성주이씨 유허지에 세운 노래비(2011). “민족가수”는 흉상 앞에 세운 추진위원회 빗돌에 새겨진 글귀다. ⓒ 장호철

성밖숲은 읍성 서문 밖에 조성된, 수백 년 묵은 왕버들 59그루가 자라고 있는 천연기념물이다. 이 숲의 들머리에 군민들의 모금과 군비 지원으로 백년설 노래비가 세워진 것은 1992년이다. 친일 문제가 논란이 되기 이전이라, 이 비는 말썽 없이 세워질 수 있었다.

민족가수 백년설? 그것은 ‘민족’에 대한 능멸이고 폄훼다

그러나 2009년 성주고 총동창회가 모교에 노래비와 흉상을 세우려 할 때 백년설의 친일 이력이 소환되면서 군내 시민사회단체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시민단체에서는 “정녕 학교에 비와 동상을 세우고 싶다면 선비 정신과 절개의 상징인 해동청풍비와 교육자 장기석 선생의 동상을 세울 것을 강력하게 권”했다. 그러나 백년설의 노래비와 흉상은 예정대로 성주고 교정에 세워졌다.

돌아오는 길에 성주읍성에 들렀다가 읍성 옆 성주이씨 유허지에서 세 번째 백년설 노래비를 만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백년설 노래비는 성주이씨 역대 문인들의 시를 새겨놓은 시비 공원에 세워져 있었다. 백년설(본명 이창민)이 성주 출신으로 고려말 문인 이조년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백년설은 노래비와 동상을 세운 이들에게는 보관문화훈장(2002)에 빛나는 ‘민족 가수'(성주고 동상 앞 ‘동상 건립 추진위원회’ 빗돌의 글귀)가 될지 모른다. 그러나 ‘민족’이라는 말은 “일장기 그려 놓고 성수(聖壽)만세 부르고” “나랏님의 병정 되길 소원합니다”라고 노래한 친일 부역자에게 함부로 붙이는 값싼 수사가 아니다. 더구나 청소년들이 공부하는 학교에 세운 ‘민족가수 백년설’은 민족에 대한 능멸이고 폄훼다.

‘민족’이란 ‘오랑캐의 백성’ 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자기 목숨을 거둔 자하와 일경의 고문으로 다리가 마비돼 ‘벽옹(躄翁)’이라 자칭한 심산 같은 분에게나 붙일 수 있는 겨레 공동체의 기림이요, 그 당당한 정체성의 존엄한 이름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 블로그 ‘이 풍진 세상에’(https://qq9447.tistory.com/)에도 싣습니다.

장호철(q9447)

<2022-01-23&gt;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곡기 끊어 순국한 독립운동가와 ‘민족가수’ 백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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