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18) 한일협정 반대투쟁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그러니 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또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주겠느냐?” (루카 16,10-12)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루카 18,4-5)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라”(마태오 10,16)라고 말씀하십니다. 중동 지방에서 뱀은 신령한 동물이면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사탄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사도들에게 사탄의 꾀를 지니라고 권고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사도들은 물론 지도자들 특히 정치인들이 지녀야 할 지혜입니다.
훌륭한 지도자는 작은 일에도 성실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살이에서 비록 불의한 재물을 사용하는 일이 있더라도 사명감을 갖고 임하라고 명하십니다. 책임감은 사명감에 기초하며, 구성원과 이웃을 위한 헌신을 지향합니다. 사명감, 책임감, 헌신이 공동체를 위해 지녀야 할 사도들의 필수 덕목입니다.
정치인 또한 사도들과 똑같은 사회적 책무를 지닙니다. 정치란 개인의 선익과 공동체 전체의 안전과 완성을 도모하는 봉사적 기구이기 때문입니다. 정치는 교회와 더불어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을 위한 동반자적 기능을 수행합니다. 정치인들에게 사회적 책임과 인류 구원에 앞장서며, 정의와 공동선을 실천하라고 요구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조선 말기 왕과 지배계층은 책임감을 다하지 못해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일본의 패망으로 해방을 맞았지만, 우리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단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침략국 일본에 대해 속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우리의 권리입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과 장면 총리가 강하게 요청했던 일제 침략 36년에 대한 합당한 배상을 박정희 대통령은 외면했습니다. 그가 온 국민의 절규와 반대를 무시하고 체결한 ‘한일협정’(한일기본조약)은 우리 민족의 목에 걸린 가시입니다.
이승만 정권은 일본에 강경했으나
박정희 쿠데타 정권은 저자세 일관
청구권 5억달러가 사과·배상금 아닌
굴욕적인 독립축하금으로 둔갑해
지금도 한일관계 진전에 발목 잡아
일본의 사과 한마디 없는 협정문
1951년에 시작해 1965년 6월 22일 타결되기까지, 한일간에 14년간 총 7차례에 걸친 회담이 이루어졌습니다. 일본에 강경했던 이승만 정권은 1951년부터 1958년까지 총 4차례 회담을 진행했습니다. 4·19혁명으로 집권한 장면 내각은 한일관계 개선을 천명하고 5차 회담을 재개했으나 5·16 군사반란으로 중단됩니다.
군사반란과 배신으로 민족사 앞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박정희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또한 경제개발과 미국의 쿠데타 승인을 받기 위해 전략적으로 한일협상을 재개하고 협상을 마무리합니다. 협상 타결 이후 한국과 일본 정부는 자국의 국회 비준을 받는 과정에서 청구권에 대해 각기 다른 입장을 보고합니다. 한국 정부는 식민지 문제에 대한 사죄의 대가라고 국회에 보고했습니다. 사실상 보상과 배상의 성격이라는 것입니다. 반면 일본 정부는 경제 협력과 원조, 독립축하금의 의미로 자금을 제공했다고 그 취지를 밝혔습니다.
사실 협정문 어디에도 일제강점기에 대한 사과나 불법 점령에 관한 내용은 없습니다. 해석에 많은 문제점을 지닌 엉터리 협정이었습니다. 협정을 체결한 지도 어언 50여 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식민지배에 대한 무효 선언, 독도, 일본 내 조선인의 지위, 사할린 교포, 약탈 문화재, 강제징용 피해자,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은 해결되지 않았으며, 갈수록 갈등만 증폭되고 있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당시 청년 학생, 시민, 정치인, 지성인들의 분노가 이해되고도 남습니다. 일제 식민지배에 이어 역사 전쟁에서까지 처참한 패배를 당했으니 그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참고로 협상 과정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일협정 청구권 협상 일지
●정부 대일배상조사심의회 설치(1949.2)
●제1차 한일회담(1952.2.15∼4.25) 한국은 ‘한일 간 재산 및 청구권 협정 요강 8개항’ 제시, 일본의 ‘대한 일본인 재산청구권’ 주장으로 결렬
●제2차 한일회담(1953.4.15∼7.23): 독도 문제와 평화선 문제에 이견
●제3차 한일회담(1953.10.6∼10.21): 어업(평화선) 문제와 청구권 문제를 둘러싸고 대립, 일본 구보타 망언(“일본 통치는 한국에 유익했다”)으로 회담 결렬
●제4차 한일회담(1958.4.15∼1960.4.15): 일본 기시 내각 출범에 따라 회담 재개
●제5차 한일회담(1960.10.25∼1961.5.15): 장면 내각, 이케다 내각 출범으로 회담 재개
●제6차 한일회담(1961.10.20∼1964.4): 61년 11월 박정희-이케다 회담, 조속한 시일 내 국교 정상화 합의에 이어 62년 10월 20일 김종필 · 오히라 메모
●제7차 한일회담(1964.12.3∼1965.6.22): 65년 2월 20일 기본관계 조약 가조인과 양국 외상 공동성명 발표, 65년 6월 22일 기본관계 조약과 청구권 협정 등 4개 협정 서명
●양국 국회 비준: 65년 8월 14일 한국 국회 비준, 65년 11월 12일 일본 중의원 비준, 같은 해 12월 11일 참의원 비준
●협정발효: 65년 12월 18일 비준서 교환(서울)과 제 협정 발효
이승만 정권에 의해 회담을 시작할 때부터 한국 대표단 인원 구성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일부 인사의 친일 행적으로 ‘협상이 제대로 진행될 수 있을까’라는 우려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초기 대표단들은 국민의 이러한 우려 때문에 협상에서 민족의 자긍심을 지키려고 더욱 노력했다고 합니다.
정권의 정통성에서 태생적 한계까지 지닌 박정희 정권은 6차 회담을 시작하면서 오로지 군사정권 집단의 목표에만 집착했습니다. 협정을 어떻게든 성사시키겠다는 의지가 구체적인 의제 설정이나 논의 과정보다 앞섰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협상 내용보다는 ‘돈’이 먼저였던 박정희 정권은 협상 과정 전체를 비밀리에 진행합니다.
굴욕 외교, 구걸 회담이라 비난하는 청년과 학생, 시민, 정치인, 지성인들의 격렬한 항의로 6·3 사태가 촉발되었고, 위수령과 계엄령을 선포한 상태에서 한일협정 서명을 진행합니다. 전형적인 반민족, 반민주주의 행태였습니다. 당시 청년 학생과 시민, 정치인, 지성인들이 바란 것은 민족의 과거와 미래에 대한 확신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일제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와 배상, 보상 요구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었습니다.
강제징용, 위안부 문제 풀어야
결론적으로, 한일협정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습니다. 침탈한 나라와 침탈당한 나라가 국교를 정상화하려면 침탈한 나라의 진정한 사과와 반성이 우선이라는 것이 인류 보편적 양심에 기반한 상식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를 줄 거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면 되겠어?’라는 대답이 돌아온 것입니다. 청구권은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로 합의됩니다. 그것도 보상이나 배상이 아닌 독립축하금이라는 명목입니다. 도저히 선열들께 고개를 들 수 없으며, 후손들에게 영원히 부끄러울 뿐입니다.
1965년의 한일협정은 2022년의 한일관계에서도 걸림돌입니다. 당시 청구권 자금을 5억 달러에 일괄 타결함으로써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보상이 원천 봉쇄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정통성 자격지심을 가진 독재자의 독단과 조급함이 세월이 가도 아물지 않는 상처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딸인 박근혜는 2015년 10억 엔의 기금 조성을 조건으로 일본과 위안부 문제를 전격 합의합니다. 아물지 않는 상처에 소금을 뿌린 격입니다.
해방 이후 한일협정이 체결되던 시대를 관통한 것은 냉전 논리입니다. 전후 처리를 위해 마련된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서 미국은 한국을 서명 당사국으로 참여시키려 했지만, 일본의 강력한 반발로 무산됩니다. 약소국, 그것도 남북으로 분단된 나라의 발언권은 보잘것없었습니다. 그러했기에 한일협정에는 ‘민족적 가치와 역사 복원’이라는 의제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했습니다. 지금 한일협정 전체를 파기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렇다 해도 지금과 같은 상태로 한일관계를 이어갈 수는 없습니다. 특히 강제징용 피해자,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문제는 하루라도 빨리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북한은 아직도 일본과 수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36년간 고통받았고 일본으로 인해 나라까지 분단되었으니 그것까지 보상해야 한다’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습니다. 국제 협약의 기준이나 외교적 언사의 적절성을 떠나, 그들의 당당한 자세만은 인정할 만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드러난 많은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가 북일 협상의 과정에서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북일 수교를 위해서라도 한일관계는 반드시 변화되어야 합니다.
한일관계는 누가 이기고 지는 문제로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감정적인 대응도 상황을 어렵게 만들 뿐입니다. 국제사회에서 우리나라의 위상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를 동력으로 담담하게, 당당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강제징용 피해자와 위안부 할머니들이 한 분 한 분 세상을 떠나고 계십니다. 제발 한 분이라도 더 살아 계실 때 역사의 실마리를 풀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책무입니다.
거룩하신 하느님, 저희는 민족사의 오점인 한일협정에 대해, 심장을 찢는 마음으로 뉘우치며 속죄의 기도를 올립니다. 순국선열들의 고귀한 삶을 되새기며 후손들을 위한 희생과 헌신의 삶을 다짐하오니 이 뜻과 기도를 갸륵하게 받아주소서. 다시는 같은 죄와 우를 범하지 않도록 저희 모두 굳게 결심하며, 가정과 이웃, 온 겨레를 위해 헌신하는 살신성인의 실천자가 되겠습니다. 또한 민족의 일치와 화합을 위해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이끌어 주시고 축복하소서. 성령 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함세웅 신부 _ 1968년 천주교 신부가 된 뒤 줄곧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일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1974년)을 주도하는 등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2012년 현역 은퇴 뒤에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연대의 발걸음을 계속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 현대사와 관련해 쓴 글과 붓글씨를 싣는다.
<2022-01-31> 한겨레
☞기사원문: 36년 식민지배가 ‘얼마면 되겠어?’로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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