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소설 「자유부인」에도 등장하는 중화요리점 ‘아서원’의 내력 역관 홍순언의 일화가 얽힌 ‘곤당골’ 지역의 공간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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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비망록 78]

소설 「자유부인」에도 등장하는 중화요리점 ‘아서원’의 내력
역관 홍순언의 일화가 얽힌 ‘곤당골’ 지역의 공간변천사

이순우 책임연구원

 

평안북도 용천 출신으로 본명이 정서죽(鄭瑞竹)인 소설가 정비석(鄭飛石, 1911~1991)은 일찍이 신의주중학교 재학 시절인 1929년 6월에 ‘신의주고등보통학교 학생결사사건’으로 검거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0월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은 전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러한 그가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와 문단에 본격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것은 1935년 정초의 일이다.
이때 그는 <매일신보> 1935년 신년현상독물(新年懸賞讀物) 장편소설(掌篇小說, 콩트) 부문에 「여자(女子)」로 입선하면서 등단하였고, 잇따라 <동아일보> 1936년 신춘문예에서 단편소설 「졸곡제(卒哭祭)」가 선외(選外)로 뽑혔다. 그리고 다시 <조선일보> 1937년 신춘문예에서도 단편소설 「성황당(城隍堂)」이 1등에 당선되는 것으로 서서히 문단에서의 입지를 넓혀갔다.
그러나 1938년 7월 24일 경성부민관에서 열린 ‘전향자단체’인 시국대응전조선사상보국연맹(時局對應全朝鮮思想報國聯盟)의 결성식에 신의주보호관찰소 소관의 전향자 대표로서 출석하였고, 특히 1941년 10월에 <매신사진순보(每新寫眞旬報)>의 편집기자로 들어간 이후에는 일제패망의 순간까지 노골적으로 친일 성향의 글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 기간에 그가 남긴 친일작품과 기고문이라는 무수한 흔적들로 인해 자기의 이름이 <친일인명사전>(2009)에 수록되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아무튼 그는 해방 이후 본격적으로 대중소설가의 면모를 과시하였는데, 아무래도 이 시기의 대표작이라고 하면 <자유부인(自由夫人)>이 아닌가 싶다. <서울신문> 1954년 1월 1일부터 8월 9일에 걸쳐 총 215회로 연재된 이 소설은 한국전쟁의 여파로 어지러워진 시대상황과 허물어져가는 가정윤리, 그리고 향락적인 사회풍조를 파격적으로 묘사하여 큰 논쟁을 야기하면서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랐고, 그 이후 「자유부인」(1956)과 「속편 자유부인」(1957)이라는 영화도 잇따라 제작되어 더욱 유명세를 떨쳤던 작품이었다.
언젠가 이 책의 옛 판본을 하나 얻어다가 그 내용을 살펴본 적이 있었는데, 줄거리야 익히 전해들은 바와 같지만 소설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그 시절 서울 지역의 여러 이색적인 공간들을 곧잘 접할 수 있었다는 대목은 나름 흥미로웠다. 예를 들어, 남산동 1가에 있는 댄스홀 ‘엘씨아이(LCI, 해군장교구락부)’라든가 댄스파티장으로 나오는 ‘창경원 수정궁’, 이른바 ‘사랑의 언덕길’로 묘사한 ‘영성문 고개(덕수궁 선원전 구역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돌담길)’, 그리고 주인공 장태연 교수가 내심 연모하던 한글강습회 여제자의 결혼식장으로 나오는 ‘운현궁예식장’ 등이 바로 그것들이었다.

<조선일보> 1956년 6월 6일자에 게재된 수도극장의 영화 「자유부인」 개봉안내광고이다. 소설이건 영화건 바로 이 자유부인의 도입부에 ‘중화요리점 아서원’이 배경지로 등장한다.

그리고 또 한 군데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은 을지로 1가 지금의 롯데호텔 자리에 있던 중화요리점 아서원(中華料理店 雅叙園)이다. 이 소설의 첫 대목에 대학동창모임인 화교회(花交會)의 점심회합이 열리는 아서원으로 나가기 위해 여주인공 오선영 여사가 자기 남편에게 외출 허락을 구하는 장면이 등장한다.이곳은 일제강점기 이래로 서울 장안의 사람들이 해마다 송년회와 신년연회를 벌이는 공간으로 즐겨 찾았고, 각종 환영회나 축하회 또는 피로연과 출판기념회 등 일상적인 모임은 말할 것도 없고 여러 단체의 창립총회나 정기총회가 벌어지거나 국내외 귀빈들을 대접하는 음식점으로도 곧잘 애용하였다. 해방 이후 시기에도 이러한 위상에는 전혀 변함이 없이 각 정당과 사회단체의 무수한 정치인과 지명인사들이 회합하거나 담판을 벌이는 장소로도 빈번하게 신문지상의 관련보도에 오르내리곤 했던 곳이었다.
이곳의 내력이 궁금하여 관련 자료를 뒤져보았더니, <매일신보> 1918년 2월 21일자에 개업안내 광고 하나가 수록된 것이 퍼뜩 눈에 띈다. 이를 통해 그 유명했던 중화요리점 아서원은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는 곳”이라는 뜻에서 취한 상호(商號)이며, 개업일자는 1918년 2월 19일(음력 정월 초10일)이었던 것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경성부일필매지형명세도>(1929)를 통해 옛 곤당골 일대의 주요 공간 배치 상황을 살펴보면, 각각 (1)은 아서원과 반도호텔이 들어서는 ‘황금정 1정목 181번지’ 구역, (2)는 원구단 황궁우(조선호텔 구내), (3)은 석고단(총독부도서관) 구역, (4)는 조선식산은행 본점, (5)는 미츠이물산 경성지점 자리이다.

 

여기에는 이곳 아서원의 소재지가 ‘황금정 1정목(지금의 을지로 1가) 181번지’로 표시되어 있다. 이를 단서로 삼아 1912년에 임시토지조사국(臨時土地調査局)에서 작성한 <토지조사부(土地調査簿)>를 뒤져보니, 이 지번의 면적이 무려 1,861평(坪)이나 되고 소유주는 이용문(李容汶, 1888~?)인 것으로 드러난다. 그는 내부협판(內部協辦)을 지낸 이봉래(李鳳來, ?~1916)의 둘째 아들이며, 그 시절 경성에서 손꼽을만한 부호(富豪)의 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아서원은 이 너른 구역의 전체를 다 차지했던 것은 아니고 동쪽 끝 모퉁이의 일부 구역만 빌려 사용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황금정 1정목 181번지’는 그 자체로 근현대사를 망라하여 다양한 문화역사적인 이력들과 공간변천사가 만만치 않게 축적된 지점이었다.
예를 들어, 경성부 편찬, <경성부사(京城府史)> 제1권(1934), 506쪽에는 임오군란(壬午軍亂, 1882년)의 전개과정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 폭도(暴徒, 구식군인을 일컫는 표현)는 다시 궁궐을 벗어나 현 경운동 천도교회(現 慶雲洞 天道敎會)의 남린(南隣), 한일은행운동장(韓一銀行運動場, 경운동 61번지)에 있던 영의정 흥인군 이최응(領議政 興寅君李最應)의 집에 난입하여 이를 부수었고(이최응은 다음날 결국 숨졌다), 또 황금정 1정목 현 지나요리점 아서원(現 支那料理店 雅叙園, 181번지) 건물의 서린(西隣)에 있던 이조판서 민창식(吏曹判書 閔昌植)의 집을 습격하여 그를 죽였다.

 

여길 보면 민창식의 집이 아서원 서쪽으로 붙어 있는 자리에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지번상으로는 결국 두 곳이 모두 동일한 구역에 속하는 셈이고, 이는 곧 ‘황금정 1정목 181번지’도 임오군란의 격랑이 휩쓸고 간 역사현장의 하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 이후 시기에 이 자리의 주인으로 등장하는 것은 이른바 ‘백정교회’로 일컫던 ‘곤당골교회(인사동 승동교회의 전신)’이다. 이 교회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인 새뮤얼 무어(Samuel F.Moore, 牟三悅; 1860~1906) 목사가 1893년 6월에 설립하였으며, 1898년에 이곳이 불타면서 ‘홍문섯골교회(지금의 삼각동소재)’로 합쳐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여기에 나오는 ‘곤당골’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의 역관(驛官) 홍순언(洪純彦, 1530~1598)이 명나라 청루(靑樓)에서 만난 원씨(袁氏) 여인에게 도움을 준 일화에서 비롯되었는데, 그에 대한 자세한 연유는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 김지남(金指南)의 <통문관지(通文館志)>,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유본예(柳本藝)의 <한경지략(漢京識略)> 등에 두루 수록되어 있다.

카를로 로세티가 남긴 <꼬레아 에 꼬레아니(Corea e Coreani)>(1904, 1905)에 수록된 최초의 주한 이탈리아영사관 전경이다. 원구단 황궁우를 바로 등진 자리에 있던 이곳은 원래 곤당골교회이자 무어 목사의 사택이었고, 그 이후 시기에 대한중앙도서관 임시사무소와 사립봉명학교가 차례대로 들어서게 된다. (자료제공 : 이돈수 한국해연구소장)

 

이 여인은 훗날 예부시랑(禮部侍郞) 석성(石星)의 계실(繼室)이 되었으며, 그러한 인연과 배경으로 홍순언은 종계변무(宗系辨誣; 명나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태조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로 잘못 기록된 사실을 바로잡는 일)의 공을 세웠는가 하면 임진왜란이 터지자 명나라에 청병(請兵)하는 일도 훨씬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홍순언이 조선으로 돌아올 때 원씨 부인이 비단 10필에 정성껏 ‘보은(報恩)’이라 수놓은 것을 보내오고, 이에 사람들은 그가 사는 동네를 ‘보은단동(報恩緞洞, 보은단골)’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게일 목사의 서울지도>(1902)에는 지금의 을지로 1가에 해당하는 지역에 ‘곤당골’이라는 지명이 또렷이 표시되어 있다. 조선시대 역관 홍순언의 일화에서 비롯된 이 동네이름은 보은단골 → 고운담골 → 곤담골 → 곤당골의 형태로 바뀌어 왔으며, 고운담골은 이를 한자로 미장동(美墻洞)이 되므로 이를 다시 줄여 미동(美洞)이라 적기도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보은단골은 소릿값이 변하여 ‘고운담골’이 되고 다시 이것이 축약되어 ‘곤담골’에 이어 ‘곤당골’로 정착되기에 이른다. 이를 한자어로 바꾸면 ‘고운담골’이 미장동(美墻洞)으로 표시되므로, 이를 또 줄여 ‘미동(美洞)’으로 적곤 했다. 그러니까 근대시기에 이르러서는 대개이 지역을 ‘곤당골’ 내지 ‘미동’으로 일컫는 것이 보통이었다. 곤당골교회를 뒤이어 이 자리를 물려받은 주체는 이탈리아영사관(伊太利領事館)이었다. 일찍이 우리나라가 이탈리아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것은 1884년의 일이지만, 정작 외교공간의 설치는 17년이라는 세월을 훌쩍 넘긴 1901년 12월에 와서야 겨우 실행되었던 것이다. <더 코리아 리뷰(The Korea Review)> 1901년 12월호에는 이탈리아영사관의 개설소식을 알리는 내용이 이렇게 남아 있다.

새로 부임한 이탈리아영사 프란체시티 디 말그라(Francesetti di Malgra)가 이달 14일 궁정에 나가 신임장을 제정했다. 이탈리아와 한국간의 관계는 지금까지 영국공사관을 통해 수행되어 왔으나 이제부터 이탈리아는 직접 대표하게 되었다. 디 말그라는 최근에 무어 목사가 퇴거한 곤당골의 집을 차지하고 있다.

 

이로써 이탈리아영사관은 곤당골 무어 목사의 사택을 그대로 물려받아 개설되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더구나 <디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 독립신문 영문판)> 1898년 10월 22일자에 수록된 북장로교 연차총회 관련보도에 회합장소를 “무어 씨의 거주지 안에 있는 곤당골교회(the Kontangkol Church in the compound of Mr. Moore)”라고 적고 있으므로 이 교회가 있던 구역이 곧 이탈리아영사관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이 저절로 확인된다.
이곳에 있던 이탈리아영사관이 미처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서소문 쪽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자, 이곳을 차지한 새로운 주인으로 나타난 사람은 앞서 잠깐 언급한 이봉래(李鳳來) 이용문(李容汶) 부자(父子)였다. 이들이 정확하게 어느 시점에 이 지역을 매입한 것인지는 확인할 도리가 없으나, 일찍이 <황성신문> 1906년 2월 19일자에 수록된 한 장의 광고를 통해 대략 그 시기를 가늠할 수 있다.

[광고(廣告)] 대한중앙도서관 임시사무소(大韓中央圖書館 臨時事務所)를 경성 남서 회현방 미동 6통 6호(京城 南署 會賢坊 美洞 六統 六戶) 이용문 씨가(李容汶氏家)로 정(定)하였사오니 첨군자(僉君子)는 조량(照亮)함.

 

<황성신문> 1906년 2월 19일자에 수록된 대한중앙도서관 임시사무소 개설광고이다. 여기에 나오는 ‘미동 6통 6호’는 곧 이용문(李容汶)의 소유지였던 ‘황금정 1정목 181번지’와 동일한 공간이다.

 

<매일신보> 1912년 3월 29일자에 수록된 ‘미동(美洞, 곤당골)’ 소재 ‘사립봉명학교’의 생도 모집광고이다. 이 학교의 설립자는 이용문의 부친인 이봉래(李鳳來)이며, 중화요리점 아서원과는 동일 지번 내에 동서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다.

 

여기에 나오는 대한중앙도서관은 윤치호(尹致昊), 이봉래(李鳳來), 민형식(閔衡植), 이범구(李範九), 백상규(白象奎) 등이 주축이 되어 설립을 추진했던 최초의 근대도서관이었다. 이러한 사실로 비춰보건대 우리나라에 근대식 도서관 제도가 도입되고 정착되는 과정을 탐구하는 이들에게는 바로 이 자리가 남다른 의미로 다가오지 않을까 충분히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다.
이와 더불어 이봉래 이용문 부자의 소유로 바뀐 이곳에는 1908년 이후 사립봉명학교(私立鳳鳴學校; 설립자 이봉래, 1909년 4월 8일 인가)가 들어선 사실이 확인된다. 내무부 학무국 학무과에서 펴낸 <(명치 43년 10월 말일 현재) 경성부내 사립학교현상일반(京城府內 私立學校現狀一斑)>을 보면, 이곳의 교사평수(校舍坪數)는 114평에 불과하나 교지평수(校地坪數)가 1,450평이나 되는 것으로 적고 있으므로 이 학교의 소재지가 ‘황금정 1정목 181번지’ 구역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확실하다.
더구나 <매일신보> 1918년 2월 21일자에 수록된 아서원 개업안내광고에 “황금정 봉명학교 동린(黃金町 鳳鳴學校 東隣)에 개업(開業)하온 바 …… 운운”하는 것으로 봐도 아서원과 사립봉명학교는 동일한 구역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이 학교는 아서원이 개업할 당시까지는 존재했던 것이 분명하지만, 그 이후의 어느 시점에 폐교가 된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이전을 한 것인지는 잘 가려지지 않는다.
사립봉명학교가 사라진 이후에는 ‘황금정 1정목 181번지’ 구역이 작은 단위로 분할되어 그 안쪽에 30여 채나 되는 셋집이 들어서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이곳의 주인이던 이용문은 그 사이에 자신의 거처를 낙산 자락에 있는 ‘충신동(忠信洞) 25번지’로 옮겨가고, 따로 동익사(同益社; 황금정 1정목 96번지, 1922년 3월 18일 상호설정등기)라는 업체를 만들어 임대사업에 대한 관리를 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조선공산당 비밀결사사건과 관련하여 창당 장소인 중화요리점 아서원의 전경이 함께 소개된 <매일신보> 1927년 9월 13일자의 보도사진이다. 왼쪽 아래에 보이는 동그라미 형태의 도안은 조선공산당 마크이다.

 

중화요리점 아서원과 관련한 내력을 정리하다 보니, 이곳이 바로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결성이 이뤄진 공간이라는 사실도 결코 빼놓고 얘기하기가 어렵다.
조선공산당 창립총회는 1925년 4월 17일 오후 1시에 아서원에 모인 김재봉(金在鳳), 김약수(金若水), 유진희(兪鎭熙), 권오설(權五卨), 김상주(金尙珠), 진병기(陣秉基), 주종건(朱鍾建), 윤덕병(尹德炳), 송봉우(宋奉瑀), 독고전(獨孤佺), 홍덕유(洪悳裕), 조봉암(曺奉岩), 김찬(金燦), 조동우(趙東祐) 등에 의해 이뤄졌다. 이들 가운데 조동우, 조봉암, 김찬 3명을 역원전형위원(役員銓衡委員)으로 선출하고, 이들로 하여금 중앙집행위원 7명(김재봉, 김약수, 유진찬, 주종건, 조동우, 정운해, 김찬)과 검사위원 3명(윤덕병, 송봉우, 조봉암)을 선임하고 기타 주요사항을 결정하는 것으로 마감되었다

 

<경성일보> 1931년 3월 5일자의 특별광고에 등장한 중화요리점 아서원의 내부 모습이다. 조선공산당 관련 보도사진을 제외하면 실제로 아서원의 모습을 담은 옛 사진자료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이와 같은 비밀결사에 관한 사실은 엉뚱하게도 1925년 11월 22일 밤 신의주 경성식당 2층에서 신만청년회(新灣靑年會) 측의 결혼식 피로연이 열리던 때에 공교롭게도 아래층에서 회식을 하고 있던 신의주경찰서 순사 일행과 시비가 붙어 이것이 집단구타사건으로 번지는 와중에 들통이 나게 된다. 이에 일제경찰에 의해 보복내사와 압수수색이 벌어진 끝에 고려공산청년회 관련 비밀문서가 발각됨에 따라 조선공산당 결성 사실도 저절로 노출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사건에 관한 예심과 공판이 벌어지면서 뒤늦게나마 관련 소식이 신문지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그때마다 중화요리점 아서원의 모습을 담은 보도 사진도 함께 지면을 장식하곤 했다. 지금 우리가 접하고 있는 아서원의 옛 사진자료라는 것도 이렇게 생성된 것이 사실상 전부이다시피 하므로, 어찌 보면 드물게나마 이러한 흔적들이 남게 된 것은 전적으로 조선공산당 사건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상황에서 ‘황금정 1정목 181번지’ 일대의 공간변화가 극적으로 일어나게 된 계기는 바로 조선빌딩(朝鮮ビルデング; 1936.5.12. 착공, 1938.4.27. 준공)의 등장이다. 이 이름은 좀 생소할 수도 있겠지만, 임대사무실을 겸하여 호텔의 용도로 지은 이 건물(지하 1층 지상 8층 높이)안에 ‘반도호텔(半島ホテル; 6~8층을 사용)’이 있었으므로 조선빌딩은 곧 반도호텔을 가리킨다. 약간 특이한 것은 반도호텔은 막 건축공사가 개시되자마자 1936년 10월 1일에 법인설립등기를 하면서 처음에 그 명칭을 ‘주식회사 신조선호텔(新朝鮮ホテル)’로 정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5개월여 만인 1937년 2월 25일에 상호(商號)를 ‘주식회사 반도호텔’로 변경하였는데, 다분히 기존의 관영호텔인 ‘조선호텔(朝鮮ホテル)’을 염두에 둔 조치로 보이지만 이에 관한 자세한 내막은 확인되지 않는다.
<조선중앙일보> 1935년 5월 11일자에 수록된 「아서원 중심지대(雅叙園 中心地帶)에 3백만 원의 대삘딩, 명후년(明後年)에 완성(完成)할 설계(設計)」 제하의 기사에는 아서원 일대 2,044평을 조선식산은행 방계회사인 ‘성업사’로부터 매수하였다고 적고 있는데, 이것으로 보면 오랜 세월 이곳의 주인이던 이용문이 그 사이에 여러 셋집들로 분할되어 있던 ‘황금정 1정목 181번지’ 구역을 처분한 상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당시 조선빌딩 측에서 이 지번의 인접지도 동시에 사들이면서 지번통합을 한 탓인지 반도호텔의 소재지는 통상 ‘황금정 1정목 180번지’로 표기된다는 점이 달라졌다.

<매일신보> 1936년 12월 12일자에 수록된 북경요리 아서원의 신축낙성 재개업 광고이다. 이 당시 ‘황금정 1정목 181번지’ 일대를 차지한 노구치 재벌의 조선빌딩 즉, 반도호텔 신축공사와 관련하여 부지문제가 충돌되어 아서원은 원래의 자리에서 비껴나 새로 건물을 지어야 했던 상황이었다.

 

‘황금정 1정목 181번지’ 일대에 들어선 조선빌딩(朝鮮ビル)의 전경을 담은 사진엽서이다. 조선빌딩의 상층부에 반도호텔이 들어있으므로, 조선빌딩은 곧 반도호텔과 동일한 표현인 셈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이러한 조선빌딩의 건축과 맞물려 아서원도 부지문제로 인해 기존의 위치에서 자리를 옮겨 새로 건물을 짓기로 하고 1936년 4월에 기공하여 그해 연말인 12월 16일에 재개업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때에 신축한 건물은 반도호텔의 동쪽 옆이면서 안쪽으로 들어간 지점에 자리하게 되었으나, 그 이후의 광고문안을 보면 주소지는 여전히 ‘황금정 1정목 181번지’로 표기된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옛 ‘황금정 1정목 181번지’ 구역의 대부분을 차지한 반도호텔은 일제가 패망하고 미군진주와 더불어 미군정(美軍政)을 총괄했던 제24군단사령부(HQ XXⅣ Corps) 및 미군장교숙소(위관급)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다시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에는 한미행정이양협정(韓美行政移讓協定, 1948.9.11. 조인)에 따라 반도호텔은 미국 측이 계속 사용(차관변제액 상쇄조건)할 것으로 선택한 토지 및 건물 목록에 포함되었다. 곧이어 1949년 3월 23일에 초대 주한미국대사로 무쵸(John Joseph Muccio, 1900~1989)가 임명되면서 이곳 반도호텔은 최초의 미국대사관이 들어서는 공간으로 변신하였다. 이러한 인연 때문인지 나중에 무쵸 대사가 이임할 때 한국에 대한 그의 공적을 기린다 하여 서울특별시장이 반도호텔 앞길을 ‘무초로(武楚路)’로 명명했다는 기록도 눈에 띈다.
한국전쟁 시기에는 부산으로 피난하였다가 1952년 7월 서울로 환도하면서 미국대사관은 반도호텔 길 건너편에 있는 옛 미츠이물산(三井物産, 을지로 1가 63번지) 건물로 터를 옮겨 설치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전쟁통에 건물 일부가 파괴되는 피해를 입은 반도호텔을 한국정부가 재매수하고 이곳은 국군 1201건설공병단의 손으로 1년여에 걸쳐 복구 수리되어 1954년 9월 15일에 호텔의 용도로 재사용되기에 이른다.
특히, 자유당 정부 시절에는 이기붕(李起鵬, 1896~1960) 민의원의장(民議院議長)이 반도호텔에 사무실을 두고 이곳에서 당무회의나 정치협상 또는 선거대책협의 등을 주관했던 일이 잘 알려져 있다. 또한 1960년 민주당 정부 때는 장면(張勉, 1899~1966) 총리가 별도의 관저를 마련하지 못해 역시 반도호텔에 임시집무실을 두었으며, 5.16군사쿠데타를 맞이했던 장소도 바로 이곳이었다.
1963년 8월 1일에는 교통부 직영호텔들(서울 2곳, 지방 7곳)의 관리권 이양에 따라 반도호텔과 조선호텔이 동시에 국제관광공사(國際觀光公社, 1962.6.26. 설립)의 소유로 넘어왔고, 다시 세월이 흘러 국영기업민영화방침에 따라 1974년 6월 4일에 일반공개경쟁입찰을 통해 반도호텔은 결국 호텔롯데 측에 매각되었다. 이보다 앞서 1969년 2월 18일에는 반도호텔과 이웃하던 중화요리점 아서원 구역도 롯데제과주식회사로 팔렸으나 아서원 쪽 주주들 간의 대지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이 일어나는 통에 판결 번복이 거듭되면서 무려 5년간 소송전이 벌어진 결과 1974년 4월 9일에 이르러서야 대법원 확정판결로 소유권 이전등기가 완료될 수 있었다.

결국 오랜 내력의 아서원과 반도호텔 자리를 포괄한 구역은 3년 5개월에 걸친 공사기간을 거쳐 지상 38층에 지하 3층 규모의 ‘호텔롯데(1978.12.22. 일부 개관, 1979.3.10. 전관 개관)’가 들어선 상태로 바뀌었다. 지금은 호텔앞 을지로쪽 도로변에 ‘고운담골’ 역사문화유적 표석(2000년 서울특별시 설치) 하나가 달랑 남아 있을 따름이지, 근현대 시기에 걸친 무수한 역사현장으로서 옛 ‘황금정 1정목 181번지’ 일대에 이토록 켜켜이 쌓여 있는 굴곡들과 공간변천사를 개략적으로나마 알려주는 설명장치가 이 주변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은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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