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영화 ‘미싱 타는 여자들’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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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영화 ‘미싱 타는 여자들’을 보고

백승문 양정고등학교 교사

2022년 1월 20일 개봉과 동시에 이 영화를 관람하였다, 영화 제작 소식을 계속 듣고 있었던지라 극장에서 개봉하기를 손꼽아 기다리던 참이었다. 1970년대 평화시장은 내게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으로 환기되는 공간이다. 문자 너머에 살아 움직이던 사람들의 모습을 당사자들의 육성으로 듣고 보는 마음은 그래서 더욱 각별하다. 어떤 때에는 문자언어가 힘이 세고 또 어떤 경우에는 음성언어의 힘이 세다. 이 영화에는 두 경우가 모두 들어 있다. 파주 통일동산. 높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자리잡은 미싱 세 대. 그곳을 향해 두런두런 걸어가는 세 사람. 하늘 높이 올라가는 웃음소리. 웃음으로 둘러친 사진틀에 눈물과 이야기가 시냇물처럼 흐르고 있는 그런 사진 한 장 같은 영화. 초등학교 졸업사진에나 있어야 할 소녀들이 노동교실 소풍 사진 속에 들어가 있는 걸 본 순간부터 이제 초로에 접어든 그 시절 소녀들이 한 자리에 서서 ‘흔들리지 않게’를 함께 부르는 순간까지 내내 눈물을 훔쳤던 것 같다.
 노동교실: “너 밥 먹을래, 노동교실 갈래?” 할 때 기꺼이 노동교실로 달려가는 사람들. ‘우리의 소원은 배움 / 꿈에도 소원은 배움’이라고 바꾸어 부른 가사. 밥보다 배움이 절실한 사람이 내 주위에도 있었다. 1977년 9.9사건이 벌어질 당시 나는 중1이었는데, 등장인물 중 한 분은 나보다 두살밖에 많지가 않다. 학교가, 그리고 교실이 무엇이기에?
 어떤 숙제: 1부터 10까지 한자로 쓰고, 은행에 가서 입금하고 출금하는 것을 해오라는 걸 숙제로 내준 국어 선생님. 실생활에 바로 적용할 수 있을 때 배움의 효과는 커진다, 배움의 내용이 여기에 국한되지는 않겠지만. 단계 너머엔 언제나 새로운 단계가 있다.
 이름: 몇 번 미싱사, 몇 번 시다로 쓰고 불리다가, 노동교실에서 처음으로 자기 이름을 썼을 때의 감정을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그리고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며 그 인물의 이름을 작은목소리로 살그머니 부르는 장면에서 내 가슴이 크게 두근댔다고 고백해야겠다. 지칭이나 호칭은 자신과 상대방과의 관계를 한눈에 보여준다. 이 영화 안에는 언니라는 따스한 호칭과 무슨 형사라는 딱딱한 지칭이 혼재한다.
 글: 글은 과거의 기억을 환기한다. 10대 때 쓴 글을 60대가 되어 다시 읽는다. 썼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먹고 있었는데, 40년도 더 지난 어느 날 불쑥 자기 앞에 그 글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 글을 읽을 때 반짝이던 눈망울, 잠시 흔들리던 시선, 잠길 듯 말 듯한 음성에서 등장인물들의 오롯한 감정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사진과 그림: 첫 여행의 설렘을 담은 사진들은 10대 20대 빛나는 청춘의 발랄함과 설렘과 즐거움을 소환한다. 사진과 그림 사이에는 노동교실 수호 투쟁을 전후한 인물들의 약간씩 결이 다른이야기가 들어 있는데, 화가의 손끝에서 다시 태어난 그림 속 인물들은 인터뷰 사이사이에 묻어나던 아픔이 어루만져진 모습이다. ‘이런 손끝들이 있어야 했었구나…’
 노래(음악): 투쟁가 노동가요가 만들어지기 이전 시기에 투쟁 현장에서는 어떤 노래를 불렀을까? 그래도 대중가요는 부르지 않았다며 뿌듯해하는 걸 보면, 소비되는 노래와 투쟁의 열기를 북돋우는 노래는 다르다는 인식이 확고했던 것 같다. ‘흔들리지 않게 우리 단결해…’, ‘뜻 없이 무릎꿇는 그 복종 아니라….’ 인터뷰에 응한 분들이 한 자리에 서서 ‘흔들리지 않게’를 합창하는 장면에는 형언할 수 없는 힘과 감동이 있다,
 눈물과 설움: 같은 나이인데도 학생들은 교복 입었다고 학생 요금 받고 여공들에게는 일반 요금 받더라는 이야기와, 똑같이 감옥에 잡혀온 건데도 여공들은 화장실 한 번을 마음대로 못 가게 하더니만 대학생들은 언제든지 가게 해주더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이 너무도 아팠다. ‘이런 시대를 살아왔구나. 학생이었던 나는 학생 아닌 또래들이 어떻게 사회를 겪고 있었는지를 모르고 있었구나. 그리고 누군가 적극적으로 노력한 사람들이 있어 이만큼이라도 바로잡힌 것이로구나.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엔 그런 분들이 늘 계셨겠구나….’
 연출: 사람이 만나는 자리에서는 꽃만 피는 것이 아니라 상처도 그만큼 생겨나는 게 세상의 이치 아니던가? 시간은 많은 것을 옅어지게 만들지만 옅어진다고 해서 없어지는 건 아니다. 잘못 건들면 덧들이는 것이 감정이다. 이숙희 신순애 임미경 세 사람뿐 아니라,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 누구도 영웅시하게 하지 않고, 그 시대 노동운동 전사의 영웅적 행동으로 미화하지도 않은 절제된 연출이 좋았다. 운동 현장 안에 있던 한 사람 한 사람씩 불러내어 그분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게 해주어 좋았다.
 인연: 이 영화에는 김선주, 신광용 두 분도 인터뷰이로 등장하는데, 2020년 1월에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진행한 ‘아리랑 로드 답사’ 때 중국 광동성에서 이분들과 함께 답사를 했더랬다. 신광용 선생은 영화 속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때 제2의 전태일은 여자였다고, 여성 조합원들이 엄청나게 싸웠다고, 그분들 모두가 전태일이라고.’
 해원: 모든 순간 때로는 웃음 짓고 때로는 핏대 올리고, 때로는 가슴을 두드리면서 나는 세상의 일면과 마주한다. 내가 경험한 모든 것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희미한 혈흔만 남긴 채 조금씩 바래가고 있다. 하지만 바래기만 할 뿐 사라지는 않을 이 혈흔은 언제든 나를(혹은 우리를) 다시 그때 그곳으로 데리고 갈 것인데, 지난날의 기억이 언제나 환한 햇살로 복원될 리는 없다. ‘미싱타는 여자들’은 해원(解冤)하는 영화다. 해원의 당사자는 일차적으로 등장인물이고, 그 다음으로는 그 시대의 일면을 살았던 나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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