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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임금 체불액 최소 1조 4500억, 실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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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일본 전범기업을 한국에서 승승장구시키는 논리, 무엇이 문제인가

▲ 일본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들이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패소했다.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왼쪽)과 강제동원 피해자 대리인인 임재성 변호사가 8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선고공판을 마친 뒤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2022.2.8 ⓒ 연합뉴스

일본 전범기업들이 한국에서 계속 이기고 있다. 8일에는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68단독 박진수 부장판사가 주재한 재판에서 일본제철이 강제징용 피해자 유족 5명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

피해자는 1942년 2월 일본제철 가마이시제철소에 끌려가 노예노동을 했지만, 대가를 받지 못했다. 1989년에 세상을 떠났고, 유족들이 2019년에 법원 문을 두드렸지만 이번 결과에 이르렀다.

재판부가 받아들인 논리는 소멸시효 완성이다. 강제징용(강제동원·강제노역·강제연행) 피해자들이 일본을 상대로 배상청구를 하기 곤란했던 장애 사유가 2012년 한국 대법원 판결에 의해 해소됐으므로 2012년을 기준으로 소멸시효를 계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손해배상청구권 같은 채권의 소멸시효에 관해 민법 제766조 제1항은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의 청구권은 피해자나 그 법정대리인이 그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간 이를 행사하지 아니하면 시효로 인하여 소멸한다”라고 규정했다. 피해자 측이 가해자 및 불법행위 사실을 인지한 때부터 3년이 경과하면 시효가 소멸한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소멸시효를 2012년부터 계산해야 하므로, 유족들이 소송을 제기한 2019년은 소멸시효가 이미 완성된 뒤’라는 논리를 적용했다. ‘피해자의 손배청구권이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인해 소멸하지 않았다’는 2012년 대법원 판결로 인해 유족들이 권리구제를 받을 수 있게 됐으므로 2012년을 기점으로 소멸시효를 계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각종 논리와 법리의 난무

이는 일본제철이 법정에서 주장한 논리다. 이를 재판부가 받아들인 것이다. 일본제철이 이런 논리를 주장하는 것은 언뜻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1965년 청구권협정으로 모든 게 끝났다는 게 일본의 방침이다. 이를 부정하는 게 2012년 판결이다. ‘2012년부터 소멸시효를 계산해야 한다’는 일본제철의 주장은 2012년 판결을 인정하는 거나 다름없다. 또 불법행위 소멸시효가 2012년부터 계산된다는 일본제철의 주장은 자신들이 불법행위를 저질렀음을 인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대법원은 2012년에 위와 같이 판결하면서 일본제철 피해자 이춘식 등이 제기한 사건을 2심 법원으로 돌려보냈다. 2심은 대법원 취지대로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줬고, 일본제철이 이에 불복해 재상고심이 열리게 됨에 따라 “일본제철(신일철주금)은 피해자 4명에게 각 1억 원씩 배상하라”라는 2018년 10월 30일의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2018년은 이춘식 소송이 종결된 시점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유족들은 이춘식 사건이 2018년 10월 대법원 판결에 의해 완성됐고 이를 계기로 피해구제의 길이 열렸으므로 그때부터 소멸시효를 계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르면, 유족들이 소를 제기한 2019년은 소멸시효 완성 이전 시점이 된다.

이런 주장은 하급심 판례에 입각해 있다. 2018년 12월 광주고등법원 민사2부(최인규 부장판사)가 강제징용 손해배상청구소송 2심에서 2018년 10월을 소멸시효 기산점으로 인정했다. 이와 배치되는 판례도 있다. 작년 9월 서울중앙지법 민사25단독 박성인 부장판사는 2012년부터 계산해야 한다는 논리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2018년 대법원 판결 이후에도 전범기업들은 한국 법원에서 중요한 승리들을 거뒀다. 이 과정에서 법원이 다양한 논리나 법리들을 소개했다.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국가는 다른 나라 법정에 설 수 없으므로 대한민국 법원이 일본 국가를 재판할 수 없다’는 국가면제이론(주권면제이론)도 주목을 끌었다. 물론 이는 보편타당하게 인정되는 이론은 아니다.

일본과 체결한 협정을 이행하지 않는 것은 비엔나협약 제27조에 위배된다는 판결도 있었다. 하지만 강제징용 피해구제를 위한 조약이 체결된 적이 없으므로 비엔나협약 운운은 엉뚱한 것이었다.

피해자들의 청구를 받아주면 한일관계가 위태해지고 한미동맹마저 훼손된다는 판결도 있었다. 외교관계까지 챙기는 희한한 판결이 나왔던 것이다. 이번에는 소멸시효 완성론이 재차 주목을 끌었다. 앞으로 어떤 논리가 더 등장할지 궁금증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노예노동을 강요받고 돈도 못 받고 돌아온 사람들이 80년이 다 돼가는 시점에 ‘고작’ 1억을 청구하는 것을 ‘천리’에 어긋난다고 볼 수 없다. 그들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어주는 것이 오히려 천리에 부합한다. 그런데도 한국 땅에서는 그 천리가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고 있다. 각종 논리나 법리가 천리를 막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절대 변하지 않는 사실 : 가마이시 제철소에서 벌어진 일

이번에 주목을 끈 일본제철 가마이시 제철소와 관련해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를 살펴보면, 이제까지 그 천리가 얼마나 어그러졌는지 더욱 절감할 수 있다. 천리를 구현시키는 것이 얼마나 시급한지도 알 수 있다.

가마이시 제철소는 1924년 생인 이춘식 할아버지가 징용으로 끌려간 곳이다. 이곳에는 충남 출신이 특히 많았다. 2018년에 <인문학 연구> 제111호에 실린 노영종 국가기록원 학예연구관의 논문 ‘일제강점기 충남 지역의 강제연행 현황’은 일본 학계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가마이시 제철소의 조선인 노동자 615명 중 368명(59.8%)이 충청남도 출신으로” 가장 많았다고 설명한다. 이춘식 할아버지도 충남 보령 출신이다. 보령군에서는 30명이 끌려갔다고 한다.

가마이시에 끌려간 한국인들이 인권침해에 대한 배상금은 고사하고 강제노동에 대한 대가마저 받지 못했다는 안타까운 사연은 30년 전에도 보도됐다. 1991년 6월 21일 자 <동아일보> 기사인 ‘못 받을까, 받아낼까’에 그 사연이 실렸다.

이 기사는 일본 현지의 ‘조선인 강제연행 진상조사단’이 일본 공문서 분석을 근거로 제보한 내용을 소개했다. 이에 따르면, 그곳 한국인들은 일제 패망 뒤에도 한동안 그곳에 남아 임금 지불을 요구했다. 이들의 집단행동이 확산되자 일본 내무성은 이들의 요구를 ‘불법행위’, ‘악질’로 규정했다.

“1946년 2월 내무성 경보국(警保局) 공안과장은 ‘격증하는 불법행위는 계속 악질화하고 있고, 사업자 측은 져야 할 책임이 없음에도 불구, 불이익을 당하는 상황에 처해 있으므로 단호한 단속을 강화해야 할 것’이라고 각 지방경찰에 지시했다”고 기사는 말한다. 또 일본제철 본사가 각 제철소에 ‘한국인들이 임금을 요구하면 경찰과 협력하라’, ‘굴복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지시했다는 사실도 소개한다.

일본 정부는 임금 지급을 회피하기 위한 ‘합법적 방법’을 일본제철에 ‘귀띔’했다. 고마자와대학 도서관에서 발견된 자료에는 일본정부가 내린 다음과 같은 지침이 들어 있었다.

임금 지급에 관하여는 당장의 용돈으로서 필요한 정도의 현금을 본인에게 건네주고 잔금을 각인(各人) 명의의 저금으로 하여 사업주가 보관해둘 것, 이 조치는 선내(鮮內, 조선)와의 통신 두절에 의하여 어쩔 수 없는 것으로 하고, 장차 저금은 반드시 본인에게 준다는 뜻을 철저히 주지시킬 것.

한국인들의 요구를 피할 수 없는 정도가 되면 일단은 용돈 정도만 지급하고 나머지는 본인 명의의 통장을 만들어주겠다고 안심을 시켜라, 한반도와의 연락이 힘들어 비상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고 이해를 시켜라, 통장 금액을 반드시 지급하겠다는 확신을 심어주라 등등의 지침을 일본제철에 전달했던 것이다.

그런 뒤 일본정부와 일본제철은 공탁제도를 통해 ‘임금이 지급된 것’으로 처리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한반도로 돌아가 공탁 사실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공탁을 통한 지급 처리가 관철됐던 것이다.

그런 식으로 일본 국고에 남아 있는 돈이 1991년 당시의 한국 돈으로 약 1조 4500억여 원이 된다고 진상조사단은 설명했다. 가마이시제철소를 포함한 일본 각지에 연행된 한국인들이 받아야 할 총액이 최소한 그 정도는 된다는 것이다.

1949년 당시의 일본 정부가 인정한 ‘1945년 현재의 한국인 노동자’는 32만 9천 명이었다. 실제로는 1백 만을 훨씬 넘었지만, 일본 정부는 그렇게 인정했다. 이 32만 9천 명에 대한 임금이 5889만 엔으로 추정되고 이를 1991년 화폐로 환산하면 1조 4500억여 원이 된다는 것이다.

▲ 가마이시제철소가 있던 가마이시의 위치 ⓒ 구글

전범기업은 물론이고 일본정부까지 나서서 가마이시제철소 피해자들에 대한 임금 미지급을 관철시켰다. 피해자들의 투쟁은 1945년 직후는 물론이고 그 후에도 계속됐지만, 일본정부와 전범기업의 합작 그리고 한국 정부의 비협조로 번번이 무위로 끝났다.

2018년 10월 대법원 재상고심 판결을 보며 이제야 길이 열리는가 싶어 유족들 일부가 용기를 내어 법원 문을 두드러졌지만, 이달 8일 서울중앙지법은 ‘소멸시효 3년이 2012년부터 기산된다’는 이유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80년이 다 되도록 전범기업들은 승승장구하는 반면, 피해자 및 유족들은 번번이 고배를 마시고 있으니 이보다 더 천리를 거스르는 일이 또 있을까.

김종성 기자

<2022-02-09>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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