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일제 잔재(1) 동학사 입구 ‘행공주군수김공갑순불망비’
해방 이후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잘못한 것 중 하나가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처단하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친일반민족행위자는 부귀영화를 위해 일제에 나라까지 팔아먹고 부끄러워하기는커녕 호의호식하더니 해방 이후에는 대부분 처벌은커녕 반성도 없이 미국에 빌붙어 떵떵거리며 살았다.
이제 와서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처단하자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그들이 저지른 일을 잊지 말고 그들과 일본제국주의가 남긴 잔재는 청산해야 한다. 내가 사는 곳의 친일반민족행위자는 누구인지 우리 지역의 일제 잔재는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이에 충남 공주 지역에 남아 있는, 청산했으면 하는 친일 잔재를 살펴보고자 한다.
공주 일제 잔재(1)_김갑순 불망비(동학사 입구 ‘행공주군수김공갑순불망비’)
계룡산 동학사는 대전(유성)과 가깝지만 행정구역상 공주시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25교구본사 가운데 제6교구본사인 마곡사에 딸린 말사이다.
동학사 매표소를 지나면 바로 왼쪽에 다리로 이어지는 길이 있고 계곡 옆으로 동학사로 올라가는 길이 있는데, 계곡 옆길로 조금만 더 가면 오른쪽에 길 가까이 튀어나온 커다란 바위가 있다.
계곡 옆길 오른쪽에 앞으로 튀어나온 이 커다란 바위를 잘 살펴보면 좁은 쪽에 세로로 새겨놓은 ‘해탈문(解脫門)’이라는 한자와 넓은 부분에 가로로 새겨놓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는 한자를 찾을 수 있다. 왼쪽으로 몇 발짝 더 올라가 고개를 살짝 들어 바위를 살펴보면 위가 둥근 비석 모양을 한 테두리가 눈에 들어온다.
예전에는 비석 모양과 글씨가 눈에 잘 띄었는데 그동안 닳아서인지 요즘에는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꼼꼼히 살펴보면 한자로 ‘행공주군수김공갑순불망비(行公州郡守金公甲淳不忘碑)’라고 새겨져 있다.
여기에서 ‘행(行)’은 실제 근무하는 관직에 쓰는 용어이고, ‘김공갑순(金公甲淳)’은 김갑순을 높여 부르는 말이며, ‘불망비(不忘碑)’는 잊지 않고자 세운 비석이라는 뜻이다. 종합하면 ‘행공주군수김공갑순불망비’는 당시 공주군수인 김갑순을 잊지 않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김갑순은 1906년 7월 공주군수로 부임하여 1907년 이후에는 노성군수를 지냈다. 좀 더 확인이 필요하지만 1910년 경술국치(한일합방) 전후에 공주군수를 한 것으로 보아 이 금석문은 1906년경에 새긴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공주군수 김갑순이 동학사에 큰 시주(기부)라도 했을까? 절로 들어가는 길목 커다란 바위에 비석 모양을 내고 그의 은덕을 잊지 않겠다는 글을 새긴 것을 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문제는 김갑순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점이다. 그는 관직을 이용해 재산을 축적하고 일제에 아부하며 부동산 투자로 엄청난 돈을 벌어 ‘공주 갑부, 충청도 갑부, 조선 갑부’가 되었다.
김갑순은 본관은 김해이고, 호는 동우(東尤), 본명은 순갑(淳甲)이며, 갑순(甲淳)은 뒷날 고종이 내려준 이름이다. 1872년 공주 계룡면 구왕리에서 김현종과 밀양 박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와 형을 일찍 여의고 소년가장이 되었으며 어머니가 국밥 장사와 행상을 하며 어렵게 살았다.
운이 따랐는지 의남매를 맺은 여인이 충청감사의 첩이 되자 그녀의 도움으로 하급 공무원 노릇을 하였다. 또 당시 사정이 딱한 선비였던 이용익을 도와준 적이 있었는데, 이용익이 높은 벼슬에 오르자 그의 도움으로 출셋길이 열려 봉쇄관(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일을 하는 관리) 등을 하면서 돈을 모았다. 모은 돈으로 군수 자리를 사 부여군수를 시작으로 공주군수 등 대한제국 관리를 역임하면서 세금을 초과하여 걷거나 횡령하는 등 더 많은 돈을 모았다.
한일합방이 되자 김갑순은 관직을 그만두고 공주를 중심으로 이런 저런 각종 사업에 손댔다. 공주에 배다리를 놓고 여객운수사업을 하였으며, 논산에 공중목욕탕과 극장을, 공주와 대전에도 극장을 지어 운영하고, 은행과 전기사업에도 관여하는가 하면 신문사를 인수 경영하기도 하였으며, 유성에 온천(호텔)을 개발하여 많은 돈을 벌었다. 또 번 돈을 바탕으로 부동산(땅)에 투자하였다.
특히 한밭(대전)에 경부선 철도가 들어서고 호남선 기점이 될 정보를 빼내어 이 지역의 땅을 대대적으로 사들였다. 대전시가지의 40%가 김갑순의 땅이었으며, 공주와 대전은 김갑순의 땅을 밟지 않고는 돌아다닐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였다. 김갑순도 경성(서울)에 갈 때면 “절반은 남의 땅을, 절반은 자기 땅을 밟고 다닌다”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사업이 잘되기 위해서는 일제의 협력이 필요하였던 만큼 김갑순은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며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다양한 공직(조선총독부 관직과 각종 단체 임원)을 맡았다. 친일행위를 적극적으로 하는 가운데 일제로부터 여러 차례 상을 받았으며, 일제의 보호와 협력 아래 그의 사업과 입지는 승승장구했다.
특히 김갑순이 운영한 유성 온천장은 대전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물론 일본 고위층과 교류하는 사교장 역할을 했다. 이곳을 이용하여 대전에 엄청난 땅을 사놓은 김갑순은 일본인과의 친교를 통해 충남 도청을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기도록 로비하면서 결국 1932년 도청이 대전으로 옮겨지자 엄청난 돈을 벌었다. 경부선 개통 이전에 1∼2전(錢)을 주고 산 땅이 100원 이상으로 뛰었으니 하루아침에 10,000배 폭등한 셈이다. 그가 소유한 땅이 대전 면적의 반이나 되니 엄청나도 한참 엄청난 어마어마한 떼돈을 벌었다. 일제강점기 관료이자 대지주인 김갑순은 ‘공주 갑부’가 아니라 ‘충청도 갑부’, 더 나아가 ‘조선 갑부’였다.
해방 후 김갑순은 미군정기 별 탈 없이 지내다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승만과 친일파의 방해로 반민특위가 해체되는 바람에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대법원에서 재판을 받았으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6·25전쟁 기간 대전을 점령한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악덕 부자’로 분류되어 인민재판을 받았으나 김갑순에게 신세를 졌던 마름(지주를 대신하여 소작권을 관리하는 사람)의 아들인 인민군 장교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후 별다른 처벌이나 반성도 없는 가운데 김갑순이 소유한 많은 땅은 1949년 농지 개혁으로 많은 땅이 유상몰수당하고, 1953년 화폐 개혁으로 남은 땅마저 가치가 떨어져 그의 가세는 크게 몰락하였다. 그래도 적잖은 부동산을 소유한 채 부유한 생활을 누리던 김갑순은 88세의 나이로 1960년 찹쌀떡을 먹다가 떡이 목에 걸려 죽었다.
동학사로 들어서는 입구에 세워진 ‘행공주군수김공갑순불망비’는 친일반민족행위를 한 김갑순에게 받은 고마움을 잊지 않겠다는 비석이다. 최근 비석 형태와 글씨가 흐려져서 눈에 잘 띄지도 않으니 그냥 두어도 괜찮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렇지 않다. 흐려져서 보이지 않아도 친일반민족행위자를 기리는 비석은 청산해야 할 일제 잔재다.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비석임을 밝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무슨 비석인지도 모르고 “비석까지 세웠으니 좋은 일한 사람일 것이다”라고 생각하기 쉽고, 결국 반민족행위에 앞장섰던 김갑순을 좋은 일 한 사람으로 여기는 꼴이 된다.
이제라도 ‘행공주군수김공갑순불망비’ 앞에 이 비는 친일반민족행위자 김갑순과 관련 있는 비석임을 밝히고, 김갑순의 친일행위를 간단히 소개하는 안내문을 설치하여 적어도 김갑순이란 자가 좋은 일을 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릴 필요가 있다. 아니면 따로 단죄비를 설치해 그동안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오히려 대접받아온 잘못된 현실을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행공주군수김공갑순불망비’를 통해 잊어서는 안 될 것은 김갑순의 공덕이 아니라 그의 친일행위이다.
전병철(humman) 기자
<2022-02-15>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