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진짜 독립운동은 반제민족해방투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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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17일 연구소 회의실에서 임헌영 소장의 신년 인터뷰가 진행됐다. 이 자리에 <통일뉴스> 이계환 기자와 이승현 기자가 배석하였다. 1월 25일 <통일뉴스>에 게재된 임헌영 소장 인터뷰를 두 차례에 걸쳐 전재한다. 이 자리를 빌려 전재를 허락해준 <통일뉴스>에 감사드린다.-편집자주

이계환 : 오늘 <통일뉴스> 신년 인터뷰에 문학평론가이자 사회활동가이신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임헌영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반갑습니다.
◦ 임헌영 : 안녕하십니까. 임헌영입니다. 

지난해 말에 선생님께서 자전적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대화록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을 발간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책에 대해 ‘나는 문학으로 역사를 성찰하고 또 역사를 문학으로 조명한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이 책을 봤는데 제소감은 문자 그대로 ‘문학의 길을 통해 갔더니 역사의 광경이 나섰다’고 쉽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 예. 멋집니다.

저자의 문학적 삶을 제가 쫓아갔더니 갑자기 정치, 사회, 국제, 정세 등이 어우러진 역사의 광장, 역사의 현실과 마주친 기분이었습니다. 전자가 문학평론가로서의 삶이라면 후자는 사회활동가로서의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인터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서, 하나는 선생님의 문학평론가로서의 부분, 그리고 다른 하나는 표현이 어떨지 모르지만 사회활동가로서의 부분 이렇게 나눠볼까 합니다.
◦ 예 좋습니다.

신간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

먼저 문학평론가로서의 부분을 여쭤보겠습니다. 선생님 연세가 여든이 넘은 걸로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 아직도 정정하십니다.
◦ 비교적 내 연배에서는 건강에 아무 이상이 없고 운전도 하고 그래요.  

그렇습니까.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 이 책을 보니까 700쪽이 넘어요. 이 정도 두께의 책이라면 이제 대답은 하셨지만 어쨌든 그 과정이 지나가는 과정이었는데, 건강도 여기에 영향을 미쳤을 것 같은데 아무튼 건강하시니까 썼지 않았을까 싶거든요. 평소에 건강을 어떻게 유지하십니까?
◦저는 징역살이하면서 건강비법을 터득했습니다. 불교요가 입문을, 그걸 쓴 분이 일본 스님인데 그 스님이 굉장히 진보적인 사람이에요. 진보적인 사람이니까 역시 책을 잘 써요. 그래서 사진까지 다 넣어가지고 자세를 아주 자세히 설명했는데 그야말로 동양의 선과 같은 걸 한 겁니다. 그몸 체조를, 내가 연구해보니까 우리 국민체조, 순서가 시작도 숨 쉬고 마지막도 숨 쉬기거든요. 요가 원리를 가만히 보니까 국민보건체조가 보통이 아니에요. 요가 체조 그대로입니다.

그때도 뭔가 아는 사람이 만들었을 수도 있겠네요.
◦ 그런 것 같아요. 원래 국민보건체조라는 것은 미국에서 처음에 라디오 체조로 나왔답니다. 라디오에 나오는데 일본의 우체부 직원, 우리식으로 말하면 체신부 직원이라고 있잖아요. 그때 일본에서 체신부가 국민보험을 취급했어요. 그 직원이 그걸 연구하러 미국에 갔다가 우연히 그 라디오 체조를 본 거예요. 그런데 미국은 생명보험회사에서 그걸 보급하고 있었거든요. 그걸 일본에서 먼저 도입해가지고 우리나라로, 그때는 식민지 시대니까 우리나라로 와가지고 우리나라에서 자기들이 국민보건체조 이렇게 이름을 붙여가지고 한 것이거든요. 초등학교 때부터 운동장에서 그걸 했잖아요. 그걸 더 깊고 더 철저히 하는 게 단전 요가 기본체조예요. 

그럼 아주 어렵지는 않겠네요.
◦ 안 어렵죠. 국민보건체조 하고 요가 하고 거의 같은 순서예요. 사실 철학이라는 게 참 무서워요. 시원은 인도인데 결국은 중국을 거쳐서 온 건데 서양에서는 어떻게 그걸 알고 또 딱 맞춰 보니까 (체조랑) 똑같아요. 그래서 단전 요가를 했는데, 참 좋아요.

체조 효과는 선생님께서 직접 하셔서 건강하시니까 증명되는 것 같습니다.
◦ 그렇죠. 정말 좋아요.

이 책이 대화록으로 되어 있거든요. 선생님께서 기록자였던 2005년 리영희 선생님의 『대화』도 대화록이었거든요. 또 2020년에 나온 김정남 전 문민정부 교문수석의 『그곳에 늘 그가 있었다』도 대화록이었습니다. 본인이 직접 쓰는 자서전보다 상대방과 대화를 통한 자전적 기록에 어떤 장점이 있는지, 그쪽을 택하셨는데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 두 가지가 있어요. 첫째는 리영희 선생의 <대화>를 할 때 ‘아 나도 언젠가는 저 주인공이 돼 봐야 되겠다’는 생각. 리영희 선생을 제가 그리면서 나도 주인공이 돼 봐야지 하는데 마침 또 제가 쓰려고 보니까 너무 벅차요. 말로 하면 편하겠다 싶어, 그래서 해보니까 참 편하고. 또 글로 쓰기보다는 더 쉬워요. 독자들에게 다가가기가.

논리적으로 꽉 이어지지 않아도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장점이 있을 것 같아요.
◦ 그래서 <대화>를 하자고 그랬는데 마침 한길사에서 하자는 제안이 들어왔고 (대담자인) 유성호 교수가 ‘좋다’고 의욕을 갖고 해주고 그래서 삼박자가 다 맞은 거죠. 실제로 대담한 거는 한 서너 달이고 그 뒤에 정리하는데 2배 정도 해서 1년 걸렸어요.

그래도 상당하네요. 선생님께서는 평론가로 등장하기 전부터 카프문학에 대한 애정이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석사논문에도 카프문학을 다루려고 그랬는데 빠진 것 같기도 하고, 또 해금되기 전부터 납북자, 월북자 작가에도 관심이 많았고 또 『문학과 이데올로기』라는 평론집도 쓰셨습니다. 이렇게 보면 젊었을 때부터 이념문제에 관심이 꽤 많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런 이유라도 있었습니까?
◦ 대구 ‘10월항쟁’부터 집안에 삼촌들이 계속 징역살이하고 나오고 그런데다가 6.25를 겪으면서 아버지와 삼촌은 희생되고 그 다음에 나머지 삼촌들하고 우리 형님은 월북하고… 이렇게 되니까 그때 우리 집안은 울음바다였어요. 소년시절에 그런 걸 겪으니까 잊히지가 않아요. 이런 원인이 뭐냐. 그건 결국 이데올로기에요. 그래서 이대로 하다 보니까 정치적인 제국주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고, 미국이 어떻게 했냐는 것도 관심을 가지게 되고… 일찍부터 그냥 그게 본능이 돼버렸습니다.

문학을 하려고 보니까 그게 카프문학이에요. 월북했으니까요. 일제 때 식민지에서 문학을 한 작가들, 내가 보기에는 훌륭한 문학자들이 다 가버렸어요. 그래서 자료를 다 모았죠. 지금도 우리집에 가면 그때 우리나라에서 소개도 안 됐던 걸 제가 손으로 다 찾아가지고 정리했던 파일이 다 있어요. 그만큼 저한텐 대학과 대학원은 완전히 그런 거 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비슷한 처지라 하더라도 이문열 씨와 같은 작가의 경우는 부친이 월북했는데, 그분은 또 선생님과는 다른 길로 가는 것 같은데요. 아무튼 사람마다 경험에서 느끼는 것이 다르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드네요.
◦ 다른 길로 간 분들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분들하고는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연대감을 느껴요. 이문구라든가, 김성동이라든가, 정치적 입장은 다를 수 있지만 이문열 씨 같은 경우는 그래도 만나면 뭔가 동질감을 느끼죠. 아마 이문열 씨도 저한테 그럴 거예요. 이념의 문제이기보다는 우선은 핏줄 문제고 그게 결국은 분단사회에서 처한 입장에 따라서 생각이 달라지겠죠.

“한류가 일어난 것은 민족문학과 참여문학 덕분”

평론가로서 문학적으로 참여문학, 리얼리즘을 옹호하셨습니다. 한국사회의 현실 및 진로와 관련해서 그렇게 하시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사회 변화 및 사회 진보와 관련해서 참여문학과 리얼리즘의 긍정적인 역할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 한국의 민주화운동에서 참여문학과 리얼리즘 문학을 빼놓으면 민주화운동이 불완전해졌을 겁니다. 그러니까 문학이 그때는 오히려 제일 앞섰어요. 다른 모든 학문이 아직까지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때 문학은 민족문학을 주장했죠. 일찍부터. 8.15직후부터 하다가 6.25 이후로 완전히 민족문학은 ‘빨갱이문학’이라고 금지 당했는데도 금방 몇 년 만에 살아났잖아요. 그게 이제 참여문학이 되고 리얼리즘이 되고 민족문학이 되고 민중문학, 노동자·농민문학이 됐지요. 그 당시 지식인 중에서 비문학도라도 민주화운동 하던 사람들은 다 문학에서 눈을 떴습니다. 그만큼 문학이 앞섰죠. 그 점에서 난 참 좋은 노선을 선택했다고 봐요.

‘문학의 시대’, ‘문학의 전성기’라는 표현을 쓸 수 있을 정도였지 않나 싶네요. 문학을 통해 사람들이 각성됐지요.
80년대까지는 문학이 아주 막강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이른바 ‘문인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습니까. 책에 보니까 구속되었다가 형무소에서 일본 작가의 유미주의 소설에 푹 빠진 장면이 나옵니다. 제가 흥미 있게 봤는데, 참여문학과 리얼리즘 문학을 옹호하는 입장에선 선생님께서 유미주의 소설을 탐독하다니… 에피소드나 일탈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워낙 진지하게 말씀하셔서요. 일탈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진지하게 삶의 일깨움을 받은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아직도 그렇습니까.
◦ 저는 이전에는 사실 그런 작품을 뭐라 그럴까, 많이 보려고 하지도 않고 멀리 하거나 아니면 보더라도 비판하려고 보는 거였어요. 그런데 겨울에 추운데 있으니까 말이죠. 읽을거리는 없는데 웬만한 책은 다 마음에 안 들어요. 위로가 안 돼요. 근데 그걸 보니까. 아름다움의 절대세계. 황홀한 경지였어요. 그래서 유미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이래서 빠지는구나, 이해했죠. 그러나 제가 빠지진 않고, 다만 여기에 빠진 사람들에게도 나름대로 논리가 있을 수 있다는 걸 느끼게 된 거죠. 그 뒤에는 유미주의에 대해서 저도 전혀 무시하지 않고 한 유파로 그냥 인정해 주는 계기가 됐죠.

더욱 넓어진 계기가 되었던 것이군요.
◦ 제 문학관을 좀 넓혔지요. 오히려 이런 기법을 리얼리즘 문학도 도입해서 배워야 된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그렇게 하면 오히려 리얼리즘 독자들이 훨씬 넓어지고 공감대도 좋아지고…

2018년 8월 서울 용산구 청파로 한국순교복자수녀회 강당에서 열린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식에서 발언을 하고 있는 임헌영 소장. 왼쪽이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인 함세웅 신부.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실은 5층으로 된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물 3층에 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형무소에서도 그런 일탈 같은 데서 긍정적인 요소를 배운 것이 깊게 느껴졌습니다. 지금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으로 계십니다. 그 전신이 반민족문제연구소이고 반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문학론』을 쓴 임종국 선생의 유지에 따라 만들어지지 않았습니까. 아직 우리 사회에서 친일문제가 청산되지 않았고 또 친일문학도 잔재가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친일파를 두고도 ‘공이 과보다 크다’고 하면서 넘기려고 하고 또 친일작가에 대해서도 ‘문학작품과 삶은 별개의 영역이다’, 이렇게 치부하면서 면죄부를 주고자 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리고 친일문학을 한 김동인을 딴 ‘동인문학상’도 아직 건재합니다. 한국사회에 이런 현상이 많은데 어떻게 봐야 합니까?
◦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세계문학사에서 자기 민족과 나라를 팔아먹은 지식인이나 문학인이 이렇게 큰 소리 내는 것은 아주 희귀한 경우에요. 우리나라는 참 희귀해요. 그 얘기는 나중에 사회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 또 나오겠지만 어쨌거나 임종국 선생이 <친일문학론>을 내면서 상대적으로 출세도 못하고 고생을 하시다 돌아가셨죠. 그 정신을 이어받아서 만든 게 저희 연구소이죠. 임종국 선생은 파볼수록 더 위대해져요. 친일문제로 다시 돌아와서 말하자면, 때를 놓치면 다 이렇게 힘이 드는 것 같아요. 8.15때 했으면 깨끗이 끝나는 건데 그걸 놓치니까, 처음에는 친일파들이 가만히 있다가 한국전쟁 후부터는 자기들이 도로 애국자로 행세하고 독립운동가를 완전히 빨갱이로 몰아버려서, 이분들이 다 고생을 했지 않습니까. 독립운동가가 감시받고 탄압받았어요. 그런 역사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 않습니까? 친일파들은 이제 그냥 살아남은 정도가 아니라 큰 소리 치면서 도리어 감시자가 되었으니 일제 때와 똑같아요. 그래서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을 지낸 조문기 선생은 “해방된 거는 우리 민족이 아니라 친일파”라고 하셨는데, 너무 명언이에요. 친일파가 그전에는 일본의 지시를 받고 했는데, 8.15 이후에는 스스로 권력을 잡아가지고 독립운동 했던 사람들을 감시하고 집어넣고 탄압하고 이랬단 말이에요. 심지어는 죽이려고 하고… 그러니까 지금까지 와버린 거죠. 그동안 진행된 국민운동으로 인해 친일파 청산이라는 게 압도적인 다수의 국민적 찬성을 받고 있지만, 기득권층은 안 그래요. 기득권층은 오히려 궁지에 몰리니까 악을 쓰는 거예요. ‘식민지시대에 우리나라 근대화가 이루어졌다’, ‘그때 잘살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까지 나오고 그 비호를 받으면서 지금의 야당세력이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정치신조를 그대로 따라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건 엄정히 말하면 한국의 정치인이 아니죠. 그건 일본과 미국을 위한 정치인이지 우리 국민을 위한 정치인이 아닙니다.

동인문학상 보세요. <조선일보>가 하거든요. 이제 다른 중앙언론사에서 하는 친일파 문인들의 이름을 딴 문학상은 다 없어지고 이거 하나 남았습니다. 그래서 저걸 우리 연구소가 앞장서서 없애기 위해 작년에도 시위를 했어요. 저는 염려하는 것이 지금 젊은 세대들과 대학생들이 아주 오랫동안 식민의식에 젖은 교수들 밑에서 배우고 미 제국주의 문화에 너무 빠져 있다는 거예요. 제국주의는 그냥 문화만이 아니라 노래부터 생활습관 음식문화까지 다 바꿉니다. 젊은이들 입맛까지 다 바꾸고… 우리나라 방송에서 미국노래가 더 많이 나오잖아요. 술을 바꾸고 노래를 바꾸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일본이 쳐들어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술을 바꾼 거래요. 그 다음에 유행가를 바꿨어요. 그러니까 술과 노래가 중요한 겁니다.

젊은 세대들이 여간 정신을 안 차려서는 안 됩니다. 그야말로 우리나라는 문화혁명이 일어나야돼요. 이거 안 일어나면 정치개혁이 항상 실패합니다. 광화문에서 성조기 들고 시위를 할 정도로 세계에서 미 제국주의 문화가 가장 깊이 뿌리내린 나라가 우리나라 같아요. 참 큰일이에요. 젊은세대의 교육을 위해 한국사 시간을 더 늘리고 모든 고시에도 포함시키고 해야 합니다.

2009년 11월 9일 백범 김구선생 묘역 앞에서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공식 선언하는 (왼쪽부터) 김병상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윤경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일본 제국주의와 미 제국주의 문화가 지난 100년 동안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었으니 그걸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가 앞으로 우리의 과제가 되겠지요.
◦ 이거 엄청 큰 문제입니다. 굉장히 어려워요. 경제개혁은 정치를 잘하면 한 세대 만에도 많이 바꿔집니다. 미국도 부자나라가 된 게 얼마 안 됩니다. 정치개혁이나 경제개혁은 그렇게 되지만 문화혁명은 안 그래요. 적어도 3대까지는 가야 문화혁명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노인들이 식민지 시대와 6.25를 겪고 나서는 미 제국주의 문화에 완전히 세뇌 정도가 아니라 뼛속까지 스며 들어있지 않습니까. 중간에 공부 좀 한 민주화운동 세대들이 나오면서 이제 좀 고쳐지나 싶었는데, 그 뒷세대들이 또 노인들하고 똑같이 돼버리죠. 하도 제국주의 문화가 세게 나와 영향을 주니까 그렇게 된 거겠죠. 올바른 민주화 정착이 힘들고 남북통일도 지난한 과제라는 생각입니다.

그래도 좀 긍정적인 것은 30년 전보다는 한국사회에서 우리 주체문화를 살리고, 또 젊은이들에 의해 세계적인 케이팝, 케이문화 발전도 많이 되는 것 같아요.
◦ 긍정적인 면으로 한류가 일어난 원인이, 정부나 문화정책 입안자들이 그걸 알아야 되는데 사실은 그게 리얼리즘과 민족문학, 참여문학 덕분입니다. 거기에서 응용이 이뤄져서 영화, 그림, 드라마, 노래대로 다 발전이 된 거거든요. 사실 케이팝의 가사를 보면 완전히 우리가 주장하는 거예요. 리얼리즘 문학파들이 주장했던 사회비판적인 가사, 여기서 우리가 볼 때는 외국에는 그런게 없어요. 맨날 사랑타령만 하고… 그런데 케이팝을 들으니까 자기들이 스트레스 해소가 되는거죠. 그걸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 현주소를. 그걸 알아야 학교에서 올바른 예술교육을 시키게 되고, 올바른 예술교육을 받아야만이 제국주의적 문화의식에서 탈피할 수 있는 것이죠. 

‘6.15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남북해외 공동행사 준비위원회’가 20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 100년을 맞아 일제 침략사를 주제로 개최한 남북공동사진전에서 을사늑약 100년 남북해외공동성명을 낭독하고 있는 임헌영 6.15남측위 대일과거사특별위원회 위원장. [ 자료사진-통일뉴스 ]

“임화 같은 작가는 좀 복원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에 남북 문학인들 사이에서도 2005년인가로 기억합니다, 북한에서 ‘6.15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민족작가대회’가 열렸습니다. 당시 남북작가대회가 평양과 백두산, 묘향산 등에서 진행된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그때 선생님도 참여하셨죠. 그때 갔을 때 느낀 북한의 문학과 문학인의 특징과 수준이라고 할까요. 어땠습니까? 북쪽 작가들은 그때 처음 뵌 거죠?

◦ 북측 작가들은 처음 만난 거예요. 북은 그전에 갔다 와서 체험은 했지만 작가를 만난 거는 처음이었어요. 저는 북한문학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많이 봤기 때문에 아마 제일 많이 아는 편에 속했을 거예요. 사전 정보를 다 가지고 갔으니까요. 그랬는데 막상 대해보니까, 우선 문학이라는 게 우리 남한사회에서도 제일 앞서가고 다른 모든 분야보다는 좀 자유스러운 요소가 있는데, 북도 마찬가지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너무나 쉽게, 내가 읽었던 어떤 소설에 어떤 작가라고 하면 다 아니까 너무나 좋아요. 그런데 이제 관이 개입하면 안 돼요. 그게 아쉬웠어요. 왜냐하면 북에 대해서 나도 굉장히 긍정적으로 많이 보고 그렇게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런데 가면 좀 이렇게 풀어서 개인 대화를 해도되는데, 그래도 이분들은 공식 입장이 아니 아니면 자기의 견해를 말하지 않아요. (금강산) 삼일포 아시잖아요. 그쪽 회장하고 단 둘이 편하게 가면서 임화 이야기를 꺼냈어요. 당연히 그분도 나를 알고 나도 그 분을 알고 있었죠.

그래서 “정말로 이게 우리가 통일을 지향하고 민족문학을 하려면 임화 같은 작가는 좀 복원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랬더니, 그렇게 호의적으로 같이 얘기를 하다가 딱 정색을 하면서 “임 선생님 내 그래 안 봤는데 큰일 나겠네”라고 하는 거예요. ‘미제 간첩으로 처형된 그 문인을…’ 하는 반론이었겠지만, 내 뜻은 그게 아니고 ‘세월이 흘렀으니까 이제 복원해도 되지 않냐’는 뜻이었죠. “이광수는 복권하면서 왜 하지 않느냐. 나 같으면 이광수는 영원히 복권 안 시키고 임화 같으면 복권시키겠다”고 했더니 딱 “안된다”고 하더라구요. 어떻게 보면 북이 먼저 그런 걸 다 해버린다면 얼마나 멋집니까. 거꾸로 더 많은 가능성이 열려서 남쪽에서 볼 때도 ‘야 참 북이 대단하다’ 이래야 하거든요. 임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남로당 전체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그중에서 문학인만 그렇게 하기도 어렵다는 것은 인정하죠. 그렇게 이해는 하면서도 북이 남한의 문학독자들까지도 감동시킬 수 있느냐 하는 아쉬움 같은 건 좀 있었어요.

북한 문학 작품을 볼 때 뛰어난 작품이랄까 기억에 남는 작가라든지, 평가할만한 작가를 소개하신다면? 
◦ 우리나라에 지금 나와 있는 남대현이라든가 몇몇 사람들이 있죠. 어쨌거나 제가 볼 때 북한 문학은 1980년대 들어서서 확 달라져요. 그 다음에 2000년대 들어서서 좀 더 당성을 강화하는 쪽으로 나가다가 다시 또 상당히 현실생활 속으로 들어왔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우리가 주장했던 리얼리즘과 같은 주장이 북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어서 문학이 방송에 못지않게 인민들 속으로 들어가는 문학으로 변해가고 있지 않느냐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 대개 ‘고전적 리얼리즘’에서 ‘비판적 리얼리즘’, 그 다음 단계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죠.

동인문학상 보세요. <조선일보>가 하거든요. 이제 다른 중앙언론사에서 하는 친일파 문인들의 이름을 딴 문학상은 다 없어지고 이거 하나 남았습니다. 그래서 저걸 우리 연구소가 앞장서서 없애기 위해 작년에도 시위를 했어요.

제가 보기에 북의 소설은 1960년대까지 한국전쟁을 다룬 거는 우리보다 앞섰어요. 여기 평론가나 독자들이 그렇지 않다고 반론할 수도 있지만 제가 볼 때는 확실합니다. 왜 그러냐하면 한국전쟁을 다루면서 갈등의 대상을 미국으로 잡아요. 나는 그걸 보고 참 대단히 깊이 생각한 것이라고 평가합니다. 사실 우리끼리 막 싸우는 걸 그렇게 부각시킵니까? 나중에 우리 민족끼리 갈등할 때는 남한사람을 반드시 미국 앞잡이로 만들어서 그렇게 하죠. 미국 앞잡이가 아니면 뭐 하러 미워합니까? 같은 동포들끼리 그렇잖아요. 물론 예술적인 형상화 문제 같은 거는 좀 조금 떨어지는 것도 있고 문제가 없지 않지만, 민족과 역사를 사랑하는, 평화를 사랑하는 그 점에서는 상당히 깊이 고민한다고 생각했어요.

“민족이 밥 먹여 주냐?”, “그럼 민족이 밥 먹여 주지”

방금 말씀드린 2005년 남북작가대회 때 북측에서는 조선작가동맹이 나왔고 남측에서는 민족문학작가회의가 나와서 공동 주관한 걸로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 2007년인가요? 민족문학작가회의가 그동안 20년간 사용해오던 단체 명칭에서 ‘민족’을 빼고 ‘한국작가회의’로 개칭을 했습니다. 그때 그 이유가 ‘민족이라는 말이 좀 진부하다’ 라든지 또는 ‘서구에서는 민족을 보수로 인식한다’거나 ‘21세기인 지금 국제화 시대에 역행한다’ 이런 이유를 들었던 것 같아요. 민족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으로서 문학이 시대를 앞서가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이것도 그런 역할인가 어떤가, 이런 생각이 들어서 궁금했었거든요.
◦ 그때 저는 반대했어요. 근데 소수였어요. 아주 그냥 밀려가지고… 민족에 대한 비판에도 일리가 있어요. 그러나 너무 외국사람 눈으로 본 거예요. 제국주의 눈으로 보면 민족이라는 게 나치라든가 침략주의적인…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입니다. 항상 당했기 때문에 민족을 내세워야 일체감이, 딱 그냥 민족 그렇죠. 민족문학하면 딱 모이는데 수가 있어요. 그럼 뭐라 그래요. 한국문학, 남북한문학, 겨레문학 이런 걸로 안 되는 거예요. 딱 그냥 민족문학이거든요. 그래서 이제 한국적인 특수성을 살리고 거기에 초점을 둬야 되느냐, 아니면 유럽적 입장에 서야 되느냐 하는 건데, 왜 우리가 유럽적 입장에 섭니까. 민족주체성을 살려야겠어요. 우리 연구소도 민족문제연구소이고, 저는 지금도 그냥 민족을 그대로 주장하는 쪽입니다. 이게 문학만이 아니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민족이라고 말하면, ‘민족이 밥 먹여 주냐. 요새 누가 그런 말을 쓰냐’고 하는데, 아니 그럼 민족이 밥 먹여 주지, 누가 밥 먹여 줍니까. 일본이먹여줘요?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민족을 안 하면 누가 밥 먹여 주나요? 심지어 지금 유럽 학자들은 ‘식민지 시대’ 그런 말 쓰지 말자고 합니다. 식민지 시대에 있다는 걸 자랑도 아니고 굳이 밝힐 필요가 있느냐는 것인데요, 침략국 입장에서 우리가 ‘일제 식민지시대’라고 하면 듣기 안 좋겠으니까 그들의 눈으로 우리의 학술적인 술어까지 바꾸려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이상하게도 우리나라 일부 역사학계나 학계에서 통하고 있어요. 마치 식민시대라는 술어를 피하는 것이 학술적으로 앞서가는 것처럼 생각하는 거죠. 그건 앞서갈 필요도 없는 것이고, 진리는 영원한 건데 말이죠.

평론가로서 현대 한국 최대의 작가와 작품을 꼽는다면?
◦ 한 사람 뽑기는 참 어렵구요. 분단 이후 남한에서는 범민족적인 감각을 가진 게 그래도 박경리, 그 다음에 조정래, 황석영 같은 분들이 남북이 모두 다 좋아할 만한 작가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북에서는 이기영이나 최근 복권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한설야도 있고, 좋은 작가들이 많아요. 특히 카프 작가들의 소설이 참 좋아요. 그 작가들이 다 일찍 돌아가셔서 좀 아쉽긴 한데 어쨌거나 그 계열은 그래도 다 괜찮았어요.

선생님은 출판사나 잡지사에 있으면서 좋은 책들을 많이 만드셨는데, 남북이 함께 하는 책에 대한 구상도 하셨습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연세는 많으시지만 한반도 현실에 맞게 꾸려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남북 작가들의 문학 작품들을 보았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좀 들었습니다. 워낙 디테일하게 또 의미 있게 책들을 잘 선정하시는 것 같아요.
◦ 그런 편이에요. 제가 기자도 했고 잡지도 만들어 봤고 출판사 편집해 봤기 때문에… 비교적 그런 것 같아요. 디제이(DJ, 김대중 정부) 때인지 노무현 정부 때인지 모르겠는데, 문화예술진흥위원회에서 북한문학전집을 우리가 내자 하는데 허락을 다 받았어요. 편찬위원회를 만들어가지고 저도 그 편찬위원회에 들어가서 일을 했습니다. 재정문제도 부담이 없는 상태였는데 목록작품까지 해 가지고 마지막에 책을 낼 단계에서 안 된다고 해서 못한 적이 있어요. 그때 씨디(CD)를 만들어서 나눠줬는데, 그것도 잘 나오지 않았어요. 어쨌거나 여기서도 시도를 많이 했어요.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한일 국교정상화와 일본의 저속한 대중문화를 개방할 때에는 반드시 북한문화도 개방하라는 게 제 주장이거든요. 쉽잖아요. 어떻게 우리나라를 침략했던 나라의 문화는 다 받아들이면서 우리 민족의 문화는 안 받아들이냐는 것이에요. 우리나라에서 문화적인 측면에서 보면 민주주의라는 건 북한문화 100% 개방하는 그거에요. 김일성 주석의 <세기와 더불어>를 출판했다고 출판사 사장을 고발하는 이게 무슨 민주주의에요. 서독은 그러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통일이 된 거지. 서독만큼 하지도 못하면서 욕심만 많아가지고 말이죠. 지금은 남한 작가의 대표적인 작품인 <태백산맥>을 드라마로, 영화로도 못 만들잖아요. 박경리 <토지>처럼 1년 내내 어느 방송에서 계속 드라마가 나오게 되면 엄청나게 많이 볼 거예요. 조정래 작가한테 물어보니까 몇 군데에서 계약은 해갔는데, 결국 못하는 거예요. 민주주의가 뭐냐 이거예요. 허울이지. 민주주의라는 게 반민족주의자들이 있으면 그 생각을 고쳐야지 그들의 눈치를 보면서 영화도 못 만드는 게 무슨 민주주의냐 이거에요. 이게 내 불만이에요. 사실 이런 게 다 돼야 민주주의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미 1978년에 평론집 『문학의 시대는 갔는가』라는 책을 내셨어요. 지금에 비하면 그래도 그때 1970년대나 80년대가 문학의 전성기였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거든요. 그때는 젊은 세대가 시집을 갖고 다니고 전철에서 책도 읽고 말이죠. 그럴 정도로 문학에 대한 갈증, 열정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진짜 문학의 시대는 간 것 같아요. 책도 빈익빈 부익부 현상도 나타나고 있고…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젊은 세대를 독서로 끌어들일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 1978년에 제가 쓴 것은 유신 말기이지 않습니까. 1979년에 박정희를 그야말로 부하가 총을 쏴서 죽인 건데, 암살도 아니고 그냥 딱 죽여버린 거거든요. 신념으로. 그러니까 서거도 아니고..난 항상 박정희의 ‘죽음’이라고 표현하는데 역사적인 술어로. 그 바로 한 해 전이 1978년 아닙니까. 그때는 유신문화가 너무나 팽배하고 새마을문화가 성행하고 그랬어요. 정부에서 돈 다대주고 그랬거든요.

그런 것만 정부가 장려하고 진짜 문학은 탄압하고 그랬죠. 그런 아이러니를 ‘문학의 시대는 갔는가’라고 표현한 거죠. 지금은 산업화 사회가 돼가지고 멀쩡히 잘 살게 되니까 그 문학인들은 사회를 파악할 능력이 없어져 버렸어요. 적어도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소설가, 평론가라고 하면 사회와 역사, 정치 평론을 겸할 수 있을 정도로 안목은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워낙 정치가 혼잡하게 되어 버리니까 문학인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봐도 뭐가 뭔지 모를 정도로 자기 스스로 혼란에 빠져버려요. 지식인의 자격을 잃은 거죠. 그래서 이제 지식인으로서 문학인이기보다는 그야말로 그냥 문학인이야, 문학인이라는 말보다는 문예, 예기로서 즉 기술로서 문예인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소설이 없잖아요. 대작가가 안 나와요. 교육이 잘못된 거죠. 식민지문화 때문에 훌륭한 문학가 교육을 안 시킨 거죠.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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