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21) 전태일 열사의 분신
“주 저희의 하느님
온 땅에 주님의 이름, 이 얼마나 존엄합니까?
(…)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주십니까?
신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주셨습니다.” (시편 8,2.5-6)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마르코 2,27-28)
인간의 존엄과 평등은 모든 종교가 고백하고 온 세계가 공인한 천부적 권리입니다. 세계인권선언 24조는 노동자의 권익에 대해 “합리적 노동시간의 제한과 정기적 유급휴가를 포함한 휴식과 여가의 권리를 갖는다”라고 단언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존엄과 평등을 실현하는 과정이자 노동자들이 자신의 생존과 권리 보장을 위해 싸워온 역사이기도 합니다.
시편 작가는 만물의 영장인 인간을 예찬하면서도 겸허하게 인간의 한계를 고백합니다. 인간이 서로 돕고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사람은 생존을 위해 마땅히 일해야 하고, 동시에 적당한 때에 꼭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이것이 인식일의 규정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안식일을 하느님 안에서 쉬도록 명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 안에서 쉰다면 그것이 바로 아름다운 예배와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휴식이라는 라틴어 어원은 재창조(re-creatio)를 뜻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쉰다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참여한다는 신학적 의미입니다. 사람뿐 아니라 동식물과 자연에도 휴식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만연한 코로나 펜데믹도 자연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은 인간의 탐욕과 난개발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많은 이들이 지적합니다. 그러니 휴식을 빼앗는 것은 생존에 대한 위협이기도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도 편지
예수님 시대에 유다 종교 지도자들은 안식일 규정을 지나치게 기계적으로 해석해 오히려 사람을 안식일의 노예로 전락시켰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안식일보다 우선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종교법과 제도, 모든 체제보다 사람이 앞선다는 혁명적 가르침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목수의 아들로서 당대 민중들의 삶을 살았던 노동자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병든 자들과 소외된 이웃, 여성들에게 다가가신 해방자이셨습니다.
노동운동가라고 하면 대부분 격렬하고 전투적인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더욱이 1960년대의 끝에서 1970년까지, 자신이 노동운동가라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채 노동운동을 하다가 분신으로 생을 마감한 전태일 열사라면 대부분의 사람이 그런 선입견을 가질 법합니다. 하지만, 그의 행적은 그가 소박하고 온건하며 낙천적이었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그런 그가 그리도 격하고 비통한 죽음을 택한 것은 그것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린 기계가 아니다”는 전태일 분신
예수 십자가와 부활처럼 세상 바꿔
그러나 노동 현실은 여전히 암담해
해고 불안과 생명의 위험에 시달려
“나를 죽이고 가마”던 정신 살려야
전태일(1948~1970)은 그 시대를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처럼 하루하루 입에 풀칠할 것을 걱정하는 가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쌍문동 산꼭대기 여섯 평짜리 판잣집에서 여섯 가족이 모여 살면서, 온종일 동대문시장 주변을 거닐며 닥치는 대로 허드렛일을 했습니다. 열일곱 살이 되자 평화시장에서 재봉사 일을 시작했고, 눈과 손이 빨랐던 그는 금세 재단사가 되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의 꿈은 돈 많이 벌어 가족들을 호강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접한 노동 현실은 열악하다는 말이 사치일 정도로 참담했습니다. 다락방 구조로 이루어진 대여섯 평의 작업 공간을 노동자들은 ‘닭장’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곳에서 수십 명의 여공과 재단사가 얽혀 하루 14시간 이상을 일했습니다. 창문과 환풍기 하나 없는 공간에서 원단 먼지는 전선 위에 눈처럼 소복이 쌓였습니다. 열다섯 살 즈음의 여공들은 각혈을 토하는 것보다, 아픈 것을 들켜서 해고되는 것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청계천에서 쌍문동까지 걸어 다니며 아낀 차비로 여공들의 간식을 사주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고뇌하던 전태일은 우연히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됩니다. 초등학교 중퇴 학력의 그가 한문으로 쓰인 근로기준법을 읽기란 너무 힘든 일이었습니다. 한자 옥편을 찾아가며 한 자 한 자 글을 읽던 그는 자신이 바라는 모든 것이 이미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는 한 줄기 희망을 가집니다. 서울시청의 근로감독관을 찾아가고 노동청에 진정합니다. 언론사에 편지도 보냅니다. 한 번이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끈질기게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존경하는 대통령 각하, 옥체 안녕하시옵니까”로 시작하는 편지도 보냅니다. 그는 편지에서 “하루 14시간 노동시간을 10시간이나 12시간으로 줄여주고, 일요일은 제발 쉬게 해달라”라고 호소합니다. 당연히 편지는 전달되지 않았고, 노동청과 언론사는 무시와 조롱으로 일관했습니다. 온건하고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모든 방법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바꾼 불꽃
그는 뜻을 함께하는 친구들과 시위를 계획했지만, 번번이 경찰과 기관에 가로막힙니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1970년 11월 8일, 그는 친구들과 함께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계획합니다. 있으나 마나 한 근로기준법을 불태우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전태일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구호를 작성합니다. 그러나, 화형식을 하기로 했던 11월 13일, 계획은 새어나갔고 준비한 플래카드는 모두 빼앗기고 시위는 무산됩니다.
오후 1시가 조금 넘어 평화시장 뒷골목에 힘없이 앉아 있던 전태일은 온몸에 불을 붙인 채 큰길로 뛰쳐나옵니다. 그의 손에는 근로기준법이 들려 있었습니다. 그는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일요일은 쉬게 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를 외칩니다. 그리고 그날이 다 가기 전에 스물두 살의 전태일은 “내가 한 일을 헛되이 하지 말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습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보았습니다. 어린 여성 노동자를 위해 자신을 불살랐던 그는 우리 모두를 회개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2021년 12월 개봉한 애니메이션 영화 <태일이>의 부제는 ‘세상을 바꾼 불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로 인해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전태일의 분신에 가장 놀랐던 것은 대학생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이 민주화 투쟁을 하는 동안 어느 그늘에서는 어린 노동자들이 죽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전태일의 죽음은 우리나라의 노동 현실이 어떤지, 노동운동이 왜 필요한지를 알렸습니다. 대학생뿐 아니라 지성인, 정치인, 재야인사, 종교인들이 모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들 중에 문익환 목사님도 계셨습니다. 그는 전태일의 죽음 앞에서 큰 회개를 했다고 고백합니다.
가톨릭 교리는 어떠한 이유로든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회의 이후에는 이에 새롭게 접근합니다. 죽음은 영원과 만나는 순간으로 하느님의 영역이기에 자살한 분들을 위해서도 합당하게 장례미사를 봉헌하고 교회 묘지에 모실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사실 그분들 중에는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대의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1968년 소련이 체코를 침공했습니다. 일명 ‘프라하의 봄’ 때입니다. 그때 소련에 항거해 체코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분신한 청년들이 있습니다. 당시 교황 바오로 6세는 주일 삼종기도를 바치며 바티칸 광장에 모인 순례객들에 잠시 강론을 하셨습니다. 분신한 이 청년들을 기리며, 그 방법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불의에 항거하고 공동체의 선익을 위해 투신한 그 행업은 예수님의 죽음과 같이 고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유학 중이었던 저는 이 말씀을 듣고 크게 감동하였습니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이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
치나니
하느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아멘”
전태일이 분신하기 석 달 전, 삼각산의 건축 공사 현장에서 일할 때 쓴 일기 중 일부입니다. 당시 평화시장을 잠시 떠나 있었는데, 다시 돌아갈 것을 결심하며 쓴 글입니다. 1977년 2월 서대문 구치소에서 상고이유서를 쓸 때 저는 마무리로 이 대목을 인용하며 절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묵상했습니다.
전태일 증언자들의 변절
안타까운 일은 전태일과 함께 활동했던, 전태일 죽음의 증언자들이 변절했다는 사실입니다. 전태일이 분신했을 때 가장 먼저 달려왔다고 알려진 서울대 법대생 장기표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한국사회의 노동자들은 전태일 정신을 높이 평가하는 데 그쳐선 안 되고 그것을 체화해야 합니다. 어느 순간 노동운동은 순수함과 초심을 잃고, 단순한 임금 투쟁으로 변질하였습니다.
저는 모름지기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전태일을 가슴에 안고, 전태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태일 동상 앞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도록 노동 문화를 개선하는 것이 시대적 소명입니다. 더는 교회가 예수님을 팔아먹고, 절이 부처님을 팔아먹고, 노동운동가가 전태일을 팔아먹는다는 얘기를 들어서는 안 됩니다.
전태일은 일기장에 ‘태일피복’이란 회사를 만들겠다고 적었습니다. 그 회사는 8시간 일하고 일요일에 쉬는 회사입니다. 천장엔 형광등이 있고 넓은 창문과 환풍기가 있는 회사입니다. 기업주와 종업원이 공평하게 이윤을 나누고, 기업주는 종업원의 건강을 돌보는 그런 회사입니다. 정직하게 제품을 만들고 성실하게 세금을 내는 그런 회사…. 언젠가는 이 땅 위에 그의 꿈이 꼭 실현되리라 믿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떨어지고, 끼이고, 파묻혀서 죽어갑니다. 연간 1천 명 가까운 노동자가 목숨을 잃는다고 합니다. 전태일 죽음 후 50년이 흘렀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해고의 불안 속에 살아가고, 위험의 외주를 맡은 노동자들은 생명의 위험 속에서 살아갑니다. 정규직은 비정규직을 외면하고, 대기업은 외주업체의 등을 떠미는 행태는 하루빨리 개선되어야 합니다. 노동운동은 비록 조금씩이더라도 ‘함께’여야 합니다. 전태일은 ‘함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바쳤습니다.
거룩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는 십자가 죽음을 통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고백하며 사는 신앙인들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십자가 희생을 망각한 채 예수님의 부활만을 앵무새처럼 읊조리고 있는 기계적 신앙인이기도 합니다. 부활은 십자가와 고통, 고난과 죽음의 수락입니다. 어린 노동자들을 위해 자신을 불사른 전태일 열사를 생각하며 희생과 헌신의 고귀한 가치를 깊이 되새깁니다. 하느님, 지금 저희가 비록 예수님처럼 철저하게 살지 못하고, 전태일 열사처럼 감히 몸을 불사르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예수님의 가르침만은 제대로 깨닫고,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잘 간직해, 그 일부분만이라도 실천하도록 이끌어주소서. 이 모든 것을 성령 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함세웅 신부 _ 1968년 천주교 신부가 된 뒤 줄곧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일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1974년)을 주도하는 등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2012년 현역 은퇴 뒤에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연대의 발걸음을 계속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 현대사와 관련해 쓴 글과 붓글씨를 싣는다.
<2022-02-21> 한겨레
☞기사원문: 전태일 동상 앞에서 한 점 부끄러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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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연재]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