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비슷한 시절을 겪었으리라 생각되지만, 소싯적에 “면장질도 알아야 하지”라는 표현을 무시로 내뱉는 동네어른들의 대화를 참으로 많이 귀동냥했던 경험이 있다. 이런 말이 언제부터 통용 되었는지가 궁금하여 옛 자료를 확인해보았더니, 1960년대의 신문지상에 “알아야 면장(面長)”이라는 구절을 아예 속담(俗談)의 하나로 치부해놓은 기사들이 심심찮게 등장했던 것이 눈에 띈다.
한참 세월이 지나고 “알아야 면장”의 어원이 바로 그 시골 면장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순간 적잖이 당혹감과 허탈감을 감추지 못했던 기억도 새삼스럽다. 이는 <논어(論語)> 양화편(陽貨篇)에 “공자께서 아들 백어에게 이르기를 ‘너는 「시경(詩經)」의 주남과 소남을 배웠느냐? 사람으로서 주남과 소남을 배우지 않으면 담장을 바로 마주보고 선 것과 마찬가지니라’(子謂 伯魚曰 女爲周南召南矣乎 人而不爲周南召南 其猶正牆面而立也與)”고 한데서 나온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고문헌 자료에 불학면장(不學面墻)이라거나 불면면장(不免面墻)이라거나 하는 구절도 곧잘 사용된 흔적이 발견되며, 특히 <중종실록(中宗實錄)> 중종 13년(1518년) 7월 2일 기사에는 평안도절도사 이장생(平安道節度使 李長生)의 서장(書狀)에 ‘면면장(免面墻)’이라는 용어가 직접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면면장’은 문맥에 따라 면장면(免墻面)이나 면장벽(免墻壁)이라는 표현으로 대체되기도 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면장(面長)이라는 존재 자체가 이 땅에 등장한 것이 대략 120년 남짓한 세월이 흐르기 전의 일이었으므로, 근대시기 이후에나 생성된 신식용어(新式用語)가 금세 속담처럼 녹아들기도 쉽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무튼 면(面) 제도와 관련한 자료들을 찾아보니, ‘면장’이라는 표현이 공식적으로 드러난 것은 갑오개혁(甲午改革) 직후의 시점인 것으로 드러난다.
갑오개혁 전후 시기의 면(面) 기관 조직 변천 대조표
그 이전 시기에는 대개 집강(執綱)이니 풍헌(風憲)이니 약정(約正)이니 하는 식으로 부르다가 갑오개혁 때에 이를 ‘집강’으로 통일하였다. 실제로 1895년 10월 16일에 작성된 내부대신서리 유길준(兪吉濬)의 「향약판무규정(鄕約辦務規程)」 청의서를 보면, “제2조 면(面, 坊社도 같음)에는 집강(執綱) 및 서기(書記), 하유사(下有司), 면주인(面主人) 각(各) 1인(人)을 치(置)하여 좌(左)같이 정(定)함”이라는 내용이 포착된다.
그러나 이 규정이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지는 못하였는지 종전의 관례가 우세한 형편이 지속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갑오개혁 직후(1896년) 시점의 상황에 대해서는 <지방제도조사(地方制度調査)>(1906년 발행 추정)에 수록된 「면장면임 동장동임직무권한(面長面任 洞長洞任 職務權限)」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정리되어 있다.
일(一). 면장(面長, 혹은 ‘면집강’이라 부름)은 해면내(該面內) 유성망 해사리(有聲望 解事理)하는 사족중 노성인(士族中 老成人)으로 본군수(本郡守)가 선정(選定)하고 해면내 각동민인(該面內 各洞民人)이 취회(聚會)하여 권점선정(圈點選定)도 함.
일(一). 면임(面任, 혹은 ‘풍헌’이라 부름)은 군수(郡守)의 명령(命令)을 승(承)하여 소관면내 각동장(所管面內 各洞長)에게 지휘(指揮)하며 범계(凡係) 요역 부세 등 사항(徭役 賦稅 等 事項)으로 각동장 동임(各洞長 洞任)을 견솔 동칙(牽率 蕫飭)하며(하략).
그러다가 1906년 10월 16일에 재가된 칙령(勅令) 제60호 「조세징수규정(租稅徵收規程)」에 “제7조 지세(地稅) 및 호세(戶稅)는 면장(面長)에게 납입고지서(納入告知書)를 발행(發行)함”이라는 구절이 포함되면서 ‘면장’이라는 존재는 비로소 제도화의 단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때 ‘집강(執綱)’, ‘존위(尊位)’, ‘참수(站首)’와 같은 옛 명칭은 일체 혁거(一切 革祛)되고 모든 면(面)에는 ‘면장(面長)’을 두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라는 것도 이미 통감부(統監府)가 들어선 상태에서 일제의 위세가 최고조에 달한 때에 이뤄진 것이므로 면 제도의 정비와 면장의 기능과 위상은 태생적으로 그들의 식민지배전략과 고스란히 맥을 같이 하는 결과물이기도 했던 것이다. 경술국치 직후에는 조선총독부령 제8호 「면(面)에 관한 규정」(1910년 10월 1일 제정)이 만들어졌고, 곧이어 1914년 3월에 단행된 행정구역 통폐합 과정에서 ‘면’의 숫자 자체가 대폭 감소하게 되면서 그만큼 면장 결원 지역이 줄어든 결과 자연스레 면장의 직위는 완전 충원 상태에 다다랐다.
일제강점기 면(面)과 면장(面長) 관련 법령의 주요 변천 연혁
1917년 10월에는 「면제(面制)」가 시행되면서 이에 동반하여 ‘상담역(相談役)’을 둘 수 있는 지정면(指定面) 제도가 등장하였고, 1920년 10월에는 다시 면협의회(面協議會; 임명제)가 설치되는 등의 변화가 뒤따랐다. 곧이어 1931년 4월에는 「읍면제(邑面制)」로 전면 개정됨에 따라 기존의 지정면은 대부분 읍(邑)으로 승격되었고, 이때 읍회(邑會)의 신설과 더불어 기존의 면협의회(面協議會)도 전면 선출제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매일신보> 1917년 8월 19일자에 수록된 「군수 후보자 추천(郡守 候補者 推薦)」 제하의 기사는 이러한 지정면 제도가 이른바 ‘내지인(內地人, 일본인) 출신’의 면장과 군수를 배출하는 통로가 되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내(來) 10월 1일로부터 면제(面制)를 실시(實施)할 터인데 지정면(指定面)의 면장(面長)은 내지인(內地人)을 채용(採用)하기로 내정(內定)한 결과, 지정면을 관할내(管轄內)에 유(有)한 군(郡)의 군수(郡守)도 동시(同時)에 내지인(內地人)을 채용(採用)할 터인 바 시등인(是等人)의 선정(選定)은 본부(本府) 급(及) 도부군(道府郡)에 재직자중(在職者中) 판임관 고급(判任官 高級)으로부터 10명(名)을 선정(選定)할 터인데 각도(各道)에 공(共)히 후보자(候補者)를 본부(本府)에 추천(推薦)케 한다더라.
그런데 일제강점기의 면(面)과 면장(面長)에 관한 제도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그 말미에 이르러 단연 두드러지게 포착되는 것은 이른바 ‘거물면장(巨物面長)’의 존재이다. 이와 관련한 직접적인 내용은 <매일신보> 1943년 3월 27일자에 수록된 「면장(面長)의 지위(地位)를 중요시(重要視), 제일선 행정(第一線 行政)을 쇄신(刷新), ‘거물면장(巨物面長)’을 전선(全鮮)에 배치(配置)」 제하의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국체본의(國體本義)에 투철하여 도의조선(道義朝鮮)을 건설하는 것을 조선통리(統理)의 최고 목표로 하여 결전하 생산전력(生産戰力)의 결정적 증강을 기하고 있는 고이소 총독(小磯總督)은 총독이 생각하고 있는 일이 그대로 제1선 행정기관에까지 침투하여야 되는 것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고 지방순시를 할 때에는 바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일정에도 들지 않은 면사무소와 주재소의 전격 시찰을 하는 것도 제1선 행정기관의 실정에 접하려는 열성에서 나온 것이다. 총독부의 모든 시책을 직접 백성에 전달하고 지도하는 기관은 실로 면직원과 주재소 순사이다. 면과 주재소가 표리일체가 되어 민중지도에 유감이 없다면 행정은 훌륭한 성과를 거둘 것이고 전력은 비약적으로 증강될 것이다. 총독이 면민의 지도자인 면장의 지위를 중요시하고 훌륭한 인물이 많이 면장이 되기를 바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총독의 이와 같은 의도를 받아 총독부에서는 각도를 독려하여 면장의 인선은 특히 신중히 하기로 되었는데 이번 새로이 도지사, 참여관 등을 지낸 ‘거물면장’을 전선 5, 6개 면에 배치하여 그들의 진두지휘(陣頭指揮)에 의하여 면직원과 면민의 발분을 재촉하는 동시에 일반면장의 모범이 되어 제1선 행정에 청신한 기운을 넣기로 되어 지금 인선을 하고 있는데 내월 1일 소관 도지사로 하여금 발령케 할 예정이다. 이번의 ‘거물면장’에는 도지사를 지낸 사람이 1명, 참여관을 지낸 사람이 4, 5명 되는데, 군수를 지낸 면장은 과거에도 있으나 도지사급 면장은 시정 이래 처음 되는 일로서 그 출현은 고이소 통리의 결전적 의도를 말하여 성과가 지금부터 크게 기대되는 바이다.
이른바 ‘거물면장’ 5인의 임명 내역(1943년 4월 1일자)
이에 따라 1943년 4월 1일에는 실제로 강원도지사 출신의 김시권(金時權)을 비롯하여 안종철, 홍종국, 이종은, 김병욱 등 5인이 ‘거물면장’ 최초의 사례로 면장에 임명되기에 이른다. 특히 이들의 동향에 대해서는 <매일신보> 지상을 통해 「거물면장 치적보고 탐방기」(1943.8.19~23; 5회 연재)와 「거물면장좌담회」(1943.9.9~15; 6회 연재) 등의 형태로 세세하게 알려졌는데, 이처럼 이들의 존재는 전시체제기 일선행정의 모범 사례로서 일제의 선전도구로 널리 활용되었다.
언젠가 친일관료 가운데 군수(郡守)였다가 퇴직 이후 직급이 훨씬 낮은 면장과 읍장 또는 부읍장을 지낸 이들이 전부 몇 명 정도나 되는지가 궁금하여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2009)을 뒤져가며 하나씩 집계를 해보았더니, 모두 합쳐 100명 남짓한 숫자에 이른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1912년 5월에 온양군수에서 물러난 강원로(姜元魯)가 그 이듬해 5월에 경남 진주군 진주면장이 된 것이 가장 빠른 사례인 것으로 확인된다.
또 한 가지 특이한 것으로 이른바 ‘조선귀족(朝鮮貴族)’으로 남작(男爵)의 신분이었던 이완종(李完鍾, 창씨명 宮村完一, 1884~1947)과 같은 이는 장기간에 걸쳐 경북 김천의 석현면장(1926.5~1934.3)과 지례면장(1934.4~1942.7)을 지낸 경력을 지녔던 것으로 드러난다. 그는 조부 이건하(李乾夏, 1835~1913)와 부친 이범팔(李範八, 1866~1919)에 이어 3대째 ‘남작’의 신분을 이어오고 있던 상황이었다.
여기에서 보듯이 전직 군수 노릇을 한 이가 면장으로 자리를 옮긴 사례가 워낙 수두룩했던 탓인지, 이들을 일컬어 ‘거물’이라고 지칭하지는 않았다. 이를 테면 ‘거물면장’은 그 자체가 전시체제로 접어든 일제가 물자와 인력의 강제동원을 포함한 전력증강(戰力增强)에 대비하는 한편 일선행정을 더욱 독려하고 옥죄기 위한 비상수단의 하나로 도입했던 특수한 시대적인 산물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 일제의 패망기로 접어들게 되자 이번에는 ‘거물구장(巨物區長)’의 개념까지 등장하게 된다. <매일신보> 1944년 5월 24일자에 수록된 「부락(部落)의 지도자(指導者)로 구장(區長)에 거물(巨物)을 배치(配置), 말단행정강화(末端行政强化)의 신포진(新布陣)」 제하의 기사는 그 배경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말단행정의 발본색원적인 개선 없이 조선통리의 실적을 거둘 수 없다고까지 고이소(小磯) 총독은 제일선 관공리의 분기를 채찍질하는 중이거니와 이 같은 중대방침에 따라 총독부에서는 금년도부터 지방단체직원, 읍면장, 구장 등의 대우를 여러 가지 방면으로부터 개선하는 동시에 읍면장과 동시에 구장에도 거물(巨物)을 배치하기로 방침을 결정하고 각도에 통첩을 보냈다. 작년부터 시작된 군수와 면장의 거물배치는 일선행정수행에 큰 효과를 드러내고 있는 터이거니와 부락연맹 이사장인 구장에도 거물을 배치하여 종래 잘못하면 ‘읍면장의 신바람군’으로 혼동되던 악폐를 일소하고 완전한 부락의 지도자로서 희망을 가지고 봉공할 수 있도록 하기로 된 것이다.
…… 이렇게 물질적으로 대우를 개선하는 동시에 지방단체직원에 대한 자치공로 표창을 구장에게도 그대로 적용하기로 방침을 결정하였으며 이밖에도 적당한 기회에 별개로 군수 혹은 도지사가 우수한 구장을 표창하여 그들의 사기를 올려주도록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금후에는 거물면장의 예에 따라 명망가요 실제적인 인물을 전형하여 거물구장을 배치하는 동시에 이 거물구장 밑에는 부구장(副區長) 혹은 서기 등 보조역을 두어 최말단의 행정기구를 강화하기로 된 것은 이것이 고이소 통리의 성격이 완전히 반영되는 것으로 그 성과는 크게 주목되는 바이다. (하략)
일반적으로 일제강점기에 면장(面長)을 지낸 이들이 과연 친일파의 범주에 포함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들이 식민지배체제의 말단하수인에 불과했다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그렇다고 이들이 친일부역의 책임에서 전적으로 자유롭다고 보는 것도 역시 온당치 않다는 견해가 여전히 우세하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일찍이 해방 직후 입법의원(立法議院) 특별위원회에서 「부일협력자(附日協力者), 민족반역자(民族叛逆者), 전범(戰犯), 간상배(奸商輩)에 대한 법률 초안」을 제정할 때에 도출된 한 가지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여기에는 “행정부문의 모든 관공리(동장, 이장, 구장, 정회장, 정이사장 및 서기, 면장, 읍장, 면읍사무소의 일체 직원, 군수, 부윤, 도사, 도지사 및 참여관, 군부읍도청의 일체 직원, 총독부 내의 일체 직원, 기타 일체 관공리 및 관속 등)”를 포괄하여 부일협력자로 규정한 바 있다는 사실이 진즉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면장에 관한 얘기를 하노라면 가장 특징적으로 포착되는 부분의 하나는 각 지역마다 ‘면장’ 및 ‘읍장’의 기념비나 송덕비 건립이 크게 유행하기 시작한 때가 바로 일제강점기라는 사실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개인별 행적마다 다소간 평가가 달라질 수도 있을 테지만, 그들 가운데 비석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도 좋을 만큼 친일의 굴레와는 무관했던 이는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