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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송덕비 속 목민관… ‘조선 귀족’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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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서원과 선산향교 앞 송덕비로 남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김사철

▲ 선산읍 원리 남산 산비탈에 있는 금오서원 전경. 서원의 문루인 읍청루 오른쪽 담장 아래 금오서원 안내판 옆에 비석 머리(가첨석)가 보인다. ⓒ 장호철

며칠 전 선산읍 원리에 있는 금오서원(金烏書院)을 들렀다가 돌비 하나를 만났었다. 읍청루 오른쪽 담장 아래 금오서원 안내판 옆의 이 빗돌은 ‘부백김공사철송공비(府伯金公思轍頌功碑)’다. 부백(府伯), 그러니까 선산 부사 김사철(金思轍, 1847~1935)의 송덕비다.

금오서원 앞 송덕비의 주인공 선산부사 김사철

고을마다 줄지어 선 숱한 송덕비 중 하나겠거니 하고 지나쳤다가 나중에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선산향교 앞에 그의 빗돌이 하나 더 있다. 1892년 7월에 세운 ‘부사 김사철 교중유혜비(校中遺惠碑)’니, 이는 그가 ‘향교에 끼친 은혜’를 기린 비다.

선산 부사로 재임할 적에 선정을 베푼 데다가 향교에도 적잖은 이바지를 했다는 얘기다. 혹시나 해서 인터넷을 검색했더니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도 그의 이름이 올라 있다. 무심코 들여다봤는데, 김사철은 종1품 숭정대부 출신 조선 귀족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기록돼 있었다.

1910년 한일합병 직후 ‘조선귀족령’에 의거하여 일본 정부로부터 조선 귀족 남작의 작위와 함께 2만 5000원의 은사공채를 받았다. 1912년 8월 ‘귀족의 작위와 은사금을 받은 자로서 한일관계에 특히 공적이 현저한 자’로 인정되어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35년 2월 17일 사망할 때까지 조선 귀족의 작위가 유지되었으며, 사망 직후 일본 정부에 의해 특지로써 위 1급이 추승되어 종 3위에 서위되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사철’ 중에서

▲ 선산부사를 지낸 김사철. 강제병합 후 남작 작위를 받고 은사금 25000엔을 받았다. ⓒ 위키백과

본관이 연안(延安)인 김사철의 호는 유당(由堂), 경기도 수원 출신으로, 1878년(고종 15) 4월 별시 을과(乙科) 2위로 합격해 출사했다. 60세가 되던 1907년 2월 종1품 숭정대부에 올랐고, 같은 해 11월 규장각 제학에 임명되었으니 벼슬아치로서는 순조로이 입신한 셈이다.

그는 1890년(고종 27) 2월 정3품에 올라 9월에 선산 부사 겸 영남 좌우도 암행어사로 부임했고 이태 후인 1895년에 이임했으니 2년쯤 선산에 머물렀다. 1891년 금오서원이 퇴락한 것을 보고 서원을 중수하는 일을 시행하고 전토를 마련해 주어 선산 사림이 서원 앞에 송덕비를 세웠다.

선산향교 앞에도 그의 송덕비

▲ 김사철이 중건했다는 선산향교. 정문 뒤에 보이는 건물이 청아루다. ⓒ 장호철
▲ 선산향교 비탈에 세워진 김사철의 교중유혜비(오른쪽) ⓒ 장호철

선산향교 청아루(菁莪樓) 앞의 빗돌은 두 기로 왼쪽은 1868년에 세운 부사 김병우의 영세불망비다. 오른쪽 빗돌이 ‘행부사김후사철교중유혜비(行府使金侯思轍校中遺惠碑)’. 그가 ‘향교에 끼친 은혜’를 기린 비로 김사철이 선산향교를 중건하는 등 선정을 베풀자 1892년에 지역 사림이 세웠다.

여기까지만 보면 김사철은 선정으로 두 기의 송덕비가 세워진 훌륭한 목민관이다. 그러나 일제의 강제 병합 이후 그의 행로는 급전직하 친일 부역으로 치달았다.

김사철은 1910년 10월 7일, 조선귀족령에 따라 일제로부터 ‘남작’의 작위와 함께 이른바 ‘은사(恩賜) 공채금’으로 2만5000엔(현 화폐가치로 5억 원)을 받았다. 그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됐고, <친일인명사전>에는 ‘매국 수작’ 분야에 등재됐다.

작위와 은사금 받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김사철이 어떤 자격으로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일제의 <귀족록>에 따르면 일제가 조선 귀족을 선정할 때 염두에 둔 가장 큰 기준은 강제 병합 과정에서 판단한 ‘공로’였고, 여기에 대한제국 황실을 ‘배려’해 ‘이왕의 혈족 및 준(準) 왕족’을 포함했다고 했으니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뒤, 곧바로 병합에 크게 이바지한 조선인들에게 보상의 의도로 일왕의 칙명인 ‘조선귀족령’에 따라 모두 76명에게 작위를 수여했다. 윤택영, 이재완, 박영효 등 6명이 후작, 이완용 등 3명이 백작, 송병준 등 22명이 자작, 김가진 등 45명이 남작 작위를 받았다(아래 조선 귀족 일람 참조).

▲ 조선귀족 일람. 이들은 매국의 상급으로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다. ⓒ 장호철

조선 귀족은 일본 화족(華族)과 같은 예우를 보장받아, 국가나 왕실 의례 시 작위에 따른 지정 좌석에 앉을 수 있는 권리 등을 부여받았다. 또 자제는 무시험으로 경성유치원과 화족 학교인 가큐슈인(習學院)에 입학할 자격 그리고 결원이 있을 때 도쿄와 교토 제국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등의 특권을 보장받았다.

작위는 자녀에게 세습됐고, 경제적 지위를 보장하기 위한 ‘은사공채 증권’도 받았다. 76명의 귀족에게 배부된 은사금은 모두 452만9000엔(円), 현 화폐가치로 900억 원이 넘는 돈이 ‘매국(賣國)의 상급(賞給)’으로 주어진 것이다.

수작자들은 대부분 ‘의기도 당당하게 희열에 들떠’ 수작식에 참석했으나 김석진·윤용구·한규설·유길준 등 8명은 작위를 거절하고 이를 반납했다. “이들은 일제와 조선총독부의 작위 수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고, ‘덴노[천황(天皇)]’가 주는 작위 사령서도 거절했으며, 강제로 발부된 사령서도 반납함으로써 강제 병합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태도를 보여주었다.(이용창, 일제강점기 ‘조선 귀족’ 수작 경위와 수작자 행태)” 한편, 김가진(1846~1922)은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작위가 박탈됐다.

<매일신보> 1910년 10월 11일 자 기사 ‘서작자(敍爵者)의 희열(喜悅)’에는 김사철이 이용태, 정낙용과 함께 작위 수여가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다가 의외로 수작(受爵)이 확정되자 밤을 새워 큰 잔치를 열어 축하했다고 전한다. 그는 1911년 2월 총독 관저에서 거행된 작위 기록증서를 받는 ‘작기본서봉수식(爵記本書捧受式)’에 참석했다.

김사철은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고, 12월 정 5위(일본의 위계로 한국의 정5품에 해당함)에 서위(敍位)됐다. 1915년 8월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고 시정사업을 선전하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주도한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경성 협찬회의 정회원으로 30원을 기부했다. 이후 각종 기부에 참여하면서 그의 품계는 착실하게 상승했다.

1918년 9월에는 경성구제회(京城救濟會)에 50원을 기부했다. 1919년 12월 종 4위로 승서(陞敍)되었다. 1928년 11월에 정 4위로 쇼와(昭和) 천황 즉위 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29년 9월 식민 통치 20주년을 기념하여 조선 박람회가 개최되자 300원을 기부했다. 1935년 2월 17일 사망했다. 사망 당일 특지로 종 3위에 추서되었다. 작위는 장남 김석기(金奭基)가 이어받았다. – <친일인명사전> 중에서

야은의 절의 기린 서원 앞, 친일 부역자의 송덕비

야은 길재 선생을 모신 금오서원 담장 아래 세운 빗돌은 물론 강제 병합 이전, 김사철이 선산 부사를 지낼 때의 것이긴 하다. 그러나 그는 이후, 강제 병합에 협력한 공로로 일왕이 주는 작위와 거액의 은사금을 받았고, 장남이 작위를 세습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생을 마감했다.

▲ 금오서원 앞 김사철 송공비. 1891년 금오서원이 퇴락한 것을 보고 서원을 중수하고 전토를 마련해 주어 선산 사림이 세운 비다. ⓒ 장호철

사람들은 무심하게 빗돌을 읽고 지나가지만, 그 주인공이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고 은사금 2만5000엔을 받은 친일 부역자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거의 없다. 결과적으로 보면 야은 길재 선생을 모신 금오서원 들머리에 뒷날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된 자의 빗돌이 담장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금오서원 관계자와 전화로 확인해 보니 그는 김사철의 이력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구미시와 구미문화원에서 펴낸 <금석문으로 읽어보는 구미·선산 이야기>(2018)에는 이 빗돌을 설명하면서 김사철을 “1910년 일제에 병탄 당한 뒤 일제로부터 남작 작호를 받았다”라고만 기록돼 있다.

야은은 조선왕조 건설에 협력하기를 거부하고 낙향해 은둔의 삶으로 고려 왕조에 대한 충의를 지킨 도학자다. 그런데 뒷날 조선 귀족이 된 김사철의 빗돌이 서원 담장 아래 서 있으니, 이 시대의 부조화는 허전하고 씁쓸하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면 미래가 없다는 얘기는 진부한 명제 같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아픈 근대사를 잊고 무심히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가볍지 않은 성찰을 환기해 준다. 어느덧 해방 77년을 맞지만, 우리는 여전히 청산하지 못한 역사의 길목 어디쯤 서 있는 것이다.

장호철(q9447) 기자

<2022-02-19>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송덕비 속 목민관… ‘조선 귀족’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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