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인천 노동사 주목해야·(하)
‘노역을 하는 아이들은 밤마다 소리도 못 내고 울곤 했다…’.
1930년대 인천 지역 정미소·항만 노동자들의 저항과 투쟁(3월1일자 4면 보도=정미소·항만 노동자들 ‘애환’ 고스란히… 깊이있는 연구 필요)을 경험한 일제는 노동자들을 더욱 거칠게 탄압했다. 그러던 중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조선인 노동자들을 군수물자 생산에 강제 동원하기에 이른다.
인천 미추홀구 숭의동 한 주택가에는 일제 강점기 군수업에 종사했던 조선인 노동자들이 묵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택들이 남아 있다. 일제가 조선의 병참 기지화를 위해 군수업 노동자들에게 공급한 ‘영단주택’이다.
일제 군수물자 생산 ‘병참기지화’
동구, 공원 조성하며 역사속으로
1930년대 말부터 히타치(日立)제작소, 경성화학주식회사, 조선기계제작소 등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일본 기업들이 인천에 터를 잡았다. 지금의 인천 부평구, 미추홀구, 동구 지역에 군수물자를 만드는 공장이 들어서면서 많은 조선인이 강제 동원됐다.
인천지역 근·현대사를 연구하는 인천도시자원디자인연구소 장회숙 대표는 지난달 28일 답사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은 전쟁 물자를 만드는 데 동원돼 고통 속에서 극심한 착취를 당했다”고 말했다.
인천 동구 화수동에는 일제 강점기 군수업체인 조선기계제작소가 있었다. 1937년 인천 동구에 들어와 광산용 기계와 선박 기계를 주력으로 생산하던 조선기계제작소는 태평양전쟁 이후인 1943년 일본 육군의 잠수함 건조 명령에 따라 조선소로 전환됐다.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조선인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근로보국대’를 조직한다. 심지어 1938년 6월에는 어린 학생들까지 근로보국대에 편입시켰다.
당시 조선기계제작소에 동원된 근로보국대 합숙소는 2016년 동구청이 이 일대에 공원을 조성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공원에는 근로보국대에 끌려간 학생들의 참혹했던 삶을 기록한 안내판이 있다.
학생 참혹했던 삶 기록 안내판만
‘겨울 쇠붙이에 손가락 달라붙어’
강제동원자들 고령 증언 어려워
‘노동자의 길’이란 문구가 적힌 이 안내판에는 ‘일제 조선기계제작소는 전쟁 무기를 만드는 데 인력이 부족하니까 갓 중학생이 된 학생까지 동원해 근로보국대를 조직했다’ ‘겨울에는 쇠붙이에 손가락이 짹짹 달라붙을 정도로 추워서 동상에 걸리지 않은 애들이 없었다’ ‘노역을 하는 아이들은 밤마다 소리도 못 내고 울곤 했다’ 등이 기록돼 있다.
장 대표는 “근로보국대 합숙소는 일제 강점기 조선인 노동자 강제 동원의 역사를 증명하는 중요한 건축물”이라며 “합숙소가 철거되면서 일제 만행의 증거 하나가 사라진 셈”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이민우 운영위원장은 “항구 도시인 인천은 일제 전범 기업들의 군수물자 생산 거점이었다”며 “일제 강점기에 강제 동원됐던 노동자들은 고령이거나 돌아가신 분이 많아 더는 증언을 듣기가 힘들다. 인천시가 남아 있는 건축물이라도 보존할 수 있도록 조례를 제정하는 등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변민철기자 bmc0502@kyeongin.com
<2022-03-02> 경인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