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2주년이다. 전쟁 과정에서 남북한에 걸쳐 수많은 전사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군과 경찰에 의한 민간인학살과 함께 인민군과 좌익에 의한 학살도 자행되었다. 진주에서는 명석면과 용산리에서 국민보도연맹 가입자를 중심으로 많은 민간인학살이 있었다.
단디뉴스는 민간인학살 유해 공동발굴단에서 제1차~12차까지, 현재도 계속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는 김영희님의 글을 통해 전국각지 유해발굴 현장의 기록과 발굴을 둘러싼 사연, 증언록에 실린 생생하고 가슴 아픈 증언, 남겨진 과제 등을 15회에 걸쳐 연재할 계획이다.
연재가 한국전쟁의 기억을 되새기고 화해와 치유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 편집자 주 –
■피카소의 3대 반전작품에 대한 고찰
▶우석대학교 동아시아평화연구소 주최 학술 심포지엄에서
필자는 2021년 6월 22일 전주를 향했다. 우석대 동아시아평화연구소에서 주최하는 “북한지역 민간인 학살” 학술 심포지엄이 열렸기 때문이다. 익히 북한의 학살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좀 더 정확히 알고 싶었다.
학술대회는 북한지역 신천학살과 피카소 작품 ‘한국에서의 학살’에 대한 내용이었다. 학술대회에서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피카소와 북한의 민간인 학살과 무슨 관련이 있기에 ‘특별전 즈음에 학술대회’를 실시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학술대회를 마치고 바로 피카소 특별전을 가야지 했지만, 차일피일하다가 전시회 마지막 날 예술의전당에 들렀다가 내려오는 길에 대전 골령골 발굴장을 가볼 계획이었으나 전시 관람을 마치니 장대비가 쏟아져서 다음으로 기약했다.
▶피카소 특별전을 다녀와서
학술대회에서 대략적인 전시내용을 알고 갔지만 피카소 전시회는 생각보다 인파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다행히 개별 오디오를 나누어 주었기에 작품의 해석을 들을 수 있었다. 필자는 솔직히 피카소가 위대한 화가로 알고 있었지만, 작품이 추상적이라 이해도 어렵고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일단 다른 작품은 뒷전이고 〈한국에서의 학살〉의 작품을 빨리 보고 싶었다. 그러나 작품의 관람순서를 따라 유명한 작품인 ‘아비뇽의 처녀들’‘광대복을 한 폴’ 등등 감상으로 1시간 30분 정도 지났을까, 마지막 관람실에서《한국에서의 학살》 작품이 저만치 보였다.
하지만 관람객이 너무 많아서 한참을 기다리니 관람객들이 조금씩 빠져나간다. 필자는 그림 앞에 섰다. 110x210cm 정도의 아담한 크기의 합판에 유화로 그린 그림이 나를 압도하였다. 제목으로만 보면 한국전쟁을 연상케 한다. 뭔가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진다. 피카소가 3대 반전작품을 그렸는데 이 작품이 아주 유명하다. 그 이유는 전쟁을 주제로 그린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한국전쟁과 이번 특별전에서 전시된 ‘한국에서의 학살’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쉽게도 ‘게르니카’와 ‘시체구덩이’는 전시되지 못했다. 그럼 3대 반전작품을 자세히 살펴보자.
▶피카소의 3대 반전작품을 살펴보면
❶ 반전작품의 효시 《게르니카》 (1937년 작)
피카소의 반전작품의 효시⟨게르니카⟩는 그의 조국 스페인에서 일어난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프랑코 정권의 사주에 의한 나치 독일의 양민학살을 모티브로 한 작품으로 같은 해 파리만국박람회 스페인관에 전시된 작품이다. 프랑코파와 공화당파 싸움에서 프랑코파가 쿠테타를 일으킨다. 1937년 4월 독일 공군은 공화당파를 지지하는 지역에 있던 작은 도시 ⟨게르니카⟩를 융단폭격해 1,600여 명의 민간인이 죽었다. 순전히 신무기를 시험해 볼 요량으로 전략적 요충지도 아닌 게르니카를 초토화한 이 사건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피카소는 프랑스에서 이 소식을 접하고 분노가 치밀어 붓을 들게 된 것이다.
❷ 반전작품 《시체구덩이》 (1946년 작)
1946년 피카소(67세) 작품. 2차세계대전 동안 독일 나치 정권에 의해 자행된 역사상 최악의 전쟁범죄 유대인 집단학살의 비극은 다시 한번 피카소로 하여금 붓을 들게 만들었다. 바로 ⟨시체구덩이⟩이다. 이 작품도 단색 처리기법을 사용하였으며 나치 독일이 특정 민족에게 행한 비극적 만행을 이미지를 통해 고발하고 경종을 울린 작품이다.(주2) 이 작품은 홀로코스트 제노사이드에서 보듯이 여성, 어린아이, 노약자 등을 옷을 벗긴 채 구덩이 옆에 줄을 세워놓고 총살하면 시체가 구덩이로 떨어지는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❸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 (1950년 1월 18일 작)
■ 피카소의 3대 반전작품 중 ‘한국에서의 학살’에 대해 소상히 알아보자
▶먼저 피카소가 ‘한국에서의 학살’을 그리게 된 역사적 배경은
피카소는 1944년 10월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한다. 프랑스 공산당은 1950년 9월 피카소에게 저 머나먼 한국의 한국전쟁를 고발하는 작품을 그려달라고 요청한다. 피카소는 즉시 붓을 들어 1951년 1월 18일에 ‘한국에서의 학살’을 완성한다.(주4) 프랑스 공산당의 속셈은 한국전쟁에서 미군의 만행을 고발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완성된 작품을 보고 프랑스 공산당은 피카소에 거는 기대에 비해 애매하게 표현한 부분에서 실망한다. 작품에는 특정한 사건을 지칭하지도 않고 미군이라는 특정 군대도 직접 묘사하지도 않고 작품 속 배경이 한국의 자연도 아니었기 때문이다.(주5)
당시 피카소는 작품의 해석을 당하는 입장이 되었다. 반면 미국이나 우방의 시각은 조금 달랐다. 특히 미국은 이 작품을 보고 총을 쏘고 있는 군인을 미군임을 짐작해버린다. 그 이유는 피카소 작품을 미국 미술시장 거래선과 거래처를 샅샅이 파헤쳐 요주의 인물로 분류시키고 감시까지 하게 된다. 피카소는 은둔 아닌 은둔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1957년 75세 회고전이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열리면서 작품거래 금지령이 해제되었다.(주6) 이러한 상황에서 피카소의 작품은 한국에서의 전시도 80년대까지 금지되어 있었다.
▶한국전쟁 중 황해도 신천군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신천학살)
1950년 9월 중순부터 전세가 바뀌기 시작해 북한에게 매우 불리해졌고, 10월부터 38도선 북한에서 인민군이 후퇴하는 전선이 형성되자 10월 13일 황해도 신천지역을 비롯한 재령과 안악에서 국군과 유엔군이 이곳을 점령하기 전에 반공청년들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이 봉기를 전후해 인민군은 우익청년들과 기독교인 700여명을 죽인다. 이어 우익무장단체와 북한측간의 산발적인 전투가 벌어진다. 그 와중에 10월 17일 미군이 신천을 점령하고 북쪽으로 진격한 이후 신천은 치안이 부재지역이 된다. 이때 ‘반공청년단’(우익)이 공권력을 좌지우지하면서 ‘공산주의자’라고 의심되는 인민들을 살해하는 사건이다.(주7) 신천학살은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간 2만3천명(국제민주여성연맹 조사단의 자료제공)이 학살되었다. 신천학살은 기독교 청년들이 주도한 우익치안대와 미군에 의해 자행된 사건이다.
▶황해도 신천학살의 전모를 누가 조사하였는가
신천학살의 조사는 박헌영이 1951년 4월에 유엔에 신천학살을 제기한 영향인지 모르지만, 1951년 5월 ‘국제민주여성연맹’ 조사단이 북한지역에서 발생한 잔혹 범죄 행위를 현장조사한다. 17개국 여성들이 조사단을 꾸렸는데 여기에 참가한 여성들은 미국, 유럽, 아시아, 태평양, 아프리카에서 유엔군에 참가한 나라를 포함해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다. 조사단은 미군과 한국군은 일시적으로 점령기간 동안 시민, 노인으로부터 아동에 이르기까지 수천, 수만 명을 고문하거나 살해했다. 그들은 어떤 범죄로 인한 조사나 판결받지 않은 채 살해되었다고 조사 보고한다.
또 다른 조사단 ‘국제민주법률가협회’의 보고서는 대량학살과 같은 잔혹행위뿐만 아니라 화학무기 사용과 세균전에 관한 내용까지 기술한다. 1951년 9월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작전 상황에서 특정한 병원체가 세균전에 얼마나 효과적인지 대규모 실전 테스트 실시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주8)
북한이 신천학살뿐만 아니라 북한 전체 학살지를 국제 조사단 두 기관이 조사하여 객관적이고 정확한 조사와 자료를 볼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은 필자로서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남한정부는 국내외 모두 학살 사실을 은폐하거나 왜곡하는데 급급했을 뿐만 아니라 미군에게 자국민을 학살하라고 묵인하고 작전권까지 넘긴 지도자까지 있는 게 아닌가, 북한은 학살 전모를 북한뿐만 아니라 남한까지 세계에 알렸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당시 북한이 인권문제를 다루는 방법이 남한보다 우위에 있었던 셈이다.
▶신천학살의 전모를 증언한 황석영 작가 그리고 유태영 목사
먼저 황석영 소설가는 미국에서 유태영을 만나서 신천학살에 대한 전모를 듣는다. 물론 황석영 소설가도 신천이 할아버지의 고향이라고 한다. 장편소설 ‘손님’을 통해 한국전쟁 당시 황해도 신천군에서 벌어진 역사적 비극과 아픔을 세상에 알린다. 이 소설을 쓴 뒤에 남과 북의 국가주의자들로부터 맹공격을 받았다. 황석영 작가는 자료와 목격담을 모아 나가다가 귀국해서 투옥되면서 작업이 중단되었다고 한다. 소설‘손님’은 2001년 5월에 출간한다.
소설의 주인공 유태영(요섭)은 신천이 고향이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유태영은 19세 때 평양에서 공부하던 중 전쟁이 발발한다. 신천에 돌아와 인민군 징집을 피해 장독에서 숨어 지냈다. 형 유태연은 기독교청년단(우익치안대)을 주도해 공산주의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학살하는데 적극 가담한다.(주9) 그리고 두 형제는 1.4후퇴 때 누나, 조카, 형수를 남겨두고 남한으로 이주하여 1960년대 미국으로 이민 간다. 그 후 40여년의 세월이 흘러 1999년에 북한을 방문했더니 누나와 형수 모두 살아있었다. 북한이 가족에게 보복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예상 밖이었다. 유태영은 북한당국과 남한의 기독교인에 취한 태도는 다르다고 했다. 북한측이 우익치안대 가족을 보살펴준 것에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이에 비해 남한 기독교인들은 학살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 것을 지적했다. 유태영은 기독교가 학살에 대해 “죄의식도 가책도 후회도 없이 살아오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싶어 한성훈 교수에게 증언에 응했다고 한다.(주10)
▶피카소의 작품 ‘한국에서의 학살’과 북한의 신천학살은 무슨 관련이 있는가!!
남한에서는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이 신천학살이나 대전 골령골 학살의 배경으로 그린 작품으로 언론과 연구자들 중에서는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제법 있다. 피카소는 1950년 9월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1951년 1월 18일 완성한다. 신천학살은 1950년 10월 17일~12월 7일까지 (52일간) 벌어졌기 때문이다.
한편 주한미국대사관 소속 육군무관 에드워드(Bob,E Ecsards)는『한국에서의 정치범 처형 보고서』를 1950년 9월 23일에 미 육군 정보부에 보고한다.(주11) 또한 당시 영국특파원 기자 앨런 위닝턴이 대전 골령골 학살현장의 모습과 과정을 낱낱이 사진으로 촬영한다. 이런 사진들은 너무나 끔찍하고 사실을 토대로 현장에서 촬영한 것으로 매우 중요하게 여겨져 가능한 많은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판매용 팜플렛 형태로 발행되었기 때문에 세상에 공개되기까지는 시일이 걸렸다고 한다.(주12)
그리고 신천학살은 박헌영 외무상이 1951년 4월에 유엔에 미군의 신천학살에 대한 잔혹행위를 문제 제기하면서 세상에 알려진다.(주13) 신천학살이 세상에 공개되기 전에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은 완성된다. 제목은 한국전쟁을 묘사한 것처럼 보이지만 피카소는 하나의 사건을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실상행위 자체를 포괄적으로 고발함으로써 평화에 대한 그의 염원을 총체적으로 표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필자는 짐작해본다.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 작품은 신천학살이나 대전 골령골 학살의 배경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피카소가 한국전쟁 시기인 1950년 9월에 그림을 시작한다. 딱히 날짜를 맞추려면 맞지 않지만, 피카소가 ‘한국에서의 학살’의 완성이 1951년 1월 18일이다. 피카소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동안 한국전쟁은 절정을 치달고 있었고 프랑스 진보언론 『위마니테』이나 프랑스 공산당측에서 정보를 받고 있지 않았을까.
사실 ‘한국에서의 학살’은 공산주의의 선전에 사용될 목적으로 그려졌고 반미 선전의 작품이 분명하다고 미술평론가(알프레드)는 말한다.(주14) 그러나 그림 한 작품으로 한국전쟁의 민간인 학살을 세상에 고발하고 미국과 촉각을 세우며 대응한 그 용기와 대담성은 존경하고도 남을 만하지 않을까.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사건”을 처리하는 방법, 남한과 북한의 차이점
북한은 신천학살이 우익치안대와 미군의 합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인민재판에서 우익치안대(가해자) 4명만 처벌하고 사건의 전모를 접는다. 한편 신천학살의 모든 책임은 미군에게 있음을 주장한다. 북한은 대내외적으로 우익치안대의 활동을 광범하게 알리는 것 자체가 정권 입장에서 커다란 정치적 부담이었다고 한다. 또한 ‘신천박물관’은 전시와 사상교양의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특히 신천학살 희생자의 죽음을 국가 차원에서 애도함으로써 구성원들의 집단정신을 고양하는 목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남한은 보도연맹원과 부역혐의자로 희생된 분들의 가족들을 보호는커녕 가해자 은폐에 급급하여 72년이 넘도록 ‘가해자 없는 희생자만 남아 있는 형국’이다. 그리고 희생자 가족은 연좌제로 평생을 감시받고 멸시당하면서 살았다. 이제라도 제노사이드에 동조하고 명령에 충성했던 자들은 남은 인생을 반성하는 의미에서 진실을 밝혀주길 바래본다.
▶맺는말
세계사적인 제노사이드나 한국의 제노사이드나 그 뒤편에는 대부분 제국주의 국가들이 관련되어 있다. 약소국의 비애를 느끼게 한다. 위대한 피카소의 손으로 “세 반전작품” 중 두 작품은 유럽에서 일어난 전쟁을 배경으로 전쟁으로 인한 무고한 시민의 죽음이라는 인류의 가치는 전쟁이 아니라 평화라는 그림으로 전쟁을 고발하고 경종을 울리게 했다. 피카소의 사상과 마음이 따뜻하고 아름답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나머지 한 작품 “한국에서의 학살”은 유럽에서 멀리 떨어진 극동의 작은 나라 한반도에서 일어난 국지전 성격의 한국전쟁을 피카소가 작품의 주제로 삼았다. 냉전시대의 희생양이었던 한국전쟁은 이데올로기의 대립에서 비롯된 비극임을 작품에 잔뜩 담아 주었다.
3대 반전작품의 특징을 살펴보면 ‘게르니카와 시체구덩이’는 흑백으로만 유화 작품으로 완성하였지만 ‘한국에서의 학살’은 초록과 황색의 색채가 표현되어 ‘평화와 희망’을 더욱 강조했다. 미국이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고 가치를 최고로 인정해주는 미국 전시장 거래처에 대해 금지령을 내리고 본인 신상에 대한 위협했는데도 이를 감수하고 ‘한국에서의 학살’을 그린 피카소의 예술가로서의 대담성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끝으로 우리나라는 이제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그럼 인권 문제를 대하는 자세도 인권 대국의 대열에 우뚝 설 수 있어야 진정한 선진국다운 국격이 갖추어질 것이다.
다음달 25일 10회 계속
⟦주⟧
(주1) 전수미, 『피카소 picasso 탄생 140주년 특별전 어록』,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2021.4.25. 208~207쪽
(주2) 전수미 『피카소 picasso 탄생 140주년 특별전 어록』,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2021.4.25. 208쪽
(주3) 전수미 『피카소 picasso 탄생 140주년 특별전 어록』,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2021.4.25.209쪽
(주4) 전수미 『피카소 picasso 탄생 140주년 특별전 어록』,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2021.4.25.206쪽
(주5) 전수미 『피카소 picasso 탄생 140주년 특별전 어록』,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2021.4.25.206쪽
(주6) 전수미 『피카소 picasso 탄생 140주년 특별전 어록』,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2021.4.25.206쪽
(주7) 우석대학교 동아시아평화연구소,⟪6∙25전쟁과 이북지역의 민간인 학살⟫,2021.6.22.15쪽
(주8) 우석대학교 동아시아평화연구소,⟪6∙25전쟁과 이북지역의 민간인 학살, 2021.6.22.14쪽
(주9) 우석대학교 동아시아평화연구소,《6∙25전쟁과 이북지역의 민간인 학살⟫,2021.6.22.
(주10) 우석대학교 동아시아평화연구소,《6∙25전쟁과 이북지역의 민간인 학살⟫,2021.6.22.
(주11) 대전광역시 동구 『대전동구 낭월동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조사 보고서』, (재)한국선사문화연구원, 2012.11.29.
(주12) 대전광역시 동구 『대전동구 낭월동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조사 보고서』, (재)한국선사문화연구원, 2012.11.29.
(주13) 우석대학교 동아시아평화연구소 )⟪6∙25전쟁과 이북지역의 민간인 학살⟫2021.6.22.13쪽
(주14) 전수미 『피카소 picasso 탄생 140주년 특별전 어록』,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2021.4.25.207쪽
기자명 김영희(전직교사)/“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자원봉사자
<2022-02-28> 단디뉴스
☞기사원문: [학살된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 ⑨] “한국전쟁과 북한지역의 민간인 학살 그리고 피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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