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의 히,스토리] 이완용 내각 법부대신 조중응… 광복회, 재산 국가귀속 신청
3·1절 하루 전날인 2월 28일, 광복회(회장 직무대행 허현)가 눈을 번쩍 뜨게 할 만한 내용을 발표했다. 거물급 친일파의 재산을 찾아내 국가귀속 신청을 했다는 것이다.
광복회는 28일 자 보도자료에서 “103주년 3·1절을 맞이하여 이완용 내각의 법무대신으로 임명되어 체포한 의병장과 을사오적 암살단을 종신형과 유배형으로 처벌하고, 이완용과 함께 ‘합병조약’을 주도한 대가로 자작 작위를 받은 조중응의 재산을 그의 후손들이 급조하여 만든 조씨 종중 명의로 교묘히 둔갑시켜 숨겨놓은 경기도 남양주시 소재 2필지(면적 116,500제곱미터, 공시가 52억 상당)를 찾아내어 법무부에 국가 귀속을 신청하였다”라고 발표했다.
허현 광복회장 직무대행은 “광복회의 친일재산 국가귀속 (신청) 성과는 민족정기와 역사 정의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3·1 운동의 헌법 이념과 역사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마지막 1필지까지 환수할 것”이라고 보도자료를 통해 다짐했다.
조중응은 누구인가
보도자료 속의 ‘처벌’은 ‘주청’으로 수정돼야 한다. 현대식 표현으로는 ‘구형’이나 ‘건의’였다. 대한제국 시절의 일이었고, 처벌권은 고종 황제에게 있었다. 보도자료 속의 사건이 언급된 1907년 7월 3일 자 <고종실록>에는 법부대신 조중응이 한 일을 “주(奏)”라는 한자로 표기했다.
조중응이 한 일은 의병들을 처벌해달라고 고종에게 아뢰거나 주청하거나 상소하는 일이었다. 친일파가 주도권을 잡은 뒤였으므로 실질적 의미에서는 조중응 같은 친일파들이 의병들을 처벌했다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조중응은 현대 한국인들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친일 행적의 규모나 수준에서는 이완용에 별로 뒤지지 않는다.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 체결에 가담하지 못해 이완용·박제순·이지용·이근택·권중현이 포함된 을사오적에는 끼지 못했지만, 군대 해산을 초래한 1907년 정미 7조약(한일신협약, 제3차 한일협약)과 공식 멸망을 가져온 1910년 한일병합조약(경술국치) 체결 때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래서 7인의 정미칠적(이완용·조중응·송병준·이병무·고영희·이재곤·임선준)과 8인의 경술국적(이완용·조중응·박제순·윤덕영·민병석·고영희·이병무·조민희)에는 이름을 올렸다. 이완용처럼 ‘3관왕’이 되지 못하고 박제순과 함께 ‘2관왕’에 그쳤지만, 을사오적에 끼지 못한 데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 그의 친일 인생을 추적하다 보면, 그가 실질적 3관왕과 다를 바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을사오적에 끼지 못한 이유
조중응은 철종 임금 후반기인 1860년 한성부(한양은 별칭)에서 태어났다. 만 18세 때인 1878년 성균관에 들어갔고, 2년 뒤 소과(1단계 과거시험) 1차 시험인 초시에 급제했다. 반드시 최종 시험까지 급제해야만 관직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상황에 따라서는 소과만 급제하고도 가능했다. 조중응은 3년 뒤인 1883년 서북변계조사위원에 임명됐다. 하지만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1882년 임오군란 때 청나라 군대가 파견돼 한양 시민군을 제압해준 대가로, 그 뒤 12년간 조선은 청나라로부터 고강도 내정간섭을 받았다. 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 이후로 경제 방면에서는 일본의 침투가 가장 두드러졌지만 정치·외교·군사 면에서는 청나라의 침투가 압도적이었다.
그 같은 1882년 이후 시기에 조중응은 꽤 대담한 행동을 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제3권은 그가 1885년경에 “‘러시아에 대비하고 일본과 친교해야 한다’는 북방남개론(北防南開論)을 주장”했다고 설명한다. 청나라가 내정간섭을 하는 상황에서 일본과의 동맹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유배형을 가게 된 그는 1890년에 특사로 석방됐다. 그로부터 4년 뒤 그에게 인생 역전의 기회가 생긴다. 동학혁명(동학농민전쟁)이 벌어지자 일본이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군대를 파견한 것이다. 6월 9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 이 군대는 한성부로 진격해 동학군 사령부가 아닌 경복궁부터 점령했다. 그해 7월 23일(음력 6월 21일)의 일이다.
이때부터 조중응은 승승장구했다. 사신단의 일원이 되어 일본을 다녀오고, 정 3품인 외무아문 참의가 되고 외부(외교부) 교섭국장이 됐다. 그렇게 뻗어나가다가 1896년 2월 뜻밖의 사태로 좌절을 겪는다. 고종이 일본의 간섭을 피하고자 경복궁 인근의 러시아공사관(아관)으로 몰래 파천하는 바람에 친 러시아 세력이 급부상한 데 따른 결과였다.
아관파천으로 인해 그는 일본으로 달아나야 했다. 아관파천 이후에도 일본의 영향력은 상당했다. 그럼에도 그의 망명은 필수적이었다. 아관파천 때문에 친일 내각인 제4차 김홍집 내각이 붕괴하고 김홍집이 광화문에서 백성들에게 피살을 당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조중응이 조선에 남아 있었다면 그 역시 무슨 일을 겪게 됐을지 알 수 없다.
10년간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그가 다시 귀국한 것은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넘어간 뒤였다. 1906년 7월에 그는 귀국했다. 을사오적에 끼지 못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한국인들의 분노를 피해 망명생활을 하던 중에 을사늑약이 강요됐기 때문에, 끼고 싶어도 낄 수 없었던 것이다.
외부 국장급이 된 것이 1895년이고 친일 외교노선을 주장하다가 귀양까지 간 경력이 있기 때문에, 아관파천이 없었다면 1905년 무렵에는 장관급이 돼 있었을 수도 있다. 장관급이 되어 어전회의에서 을사늑약 체결을 주도했다면, 그 역시 3관왕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다채로운 친일 행각
그 뒤 아주 집중적이고도 열심히 친일 노선을 걸었다. 광복회 보도자료에도 언급됐듯이 의병들에 대한 형사처벌도 그가 주도했다. 더 나아가, 정미칠적과 경술국적이 되는 데 필요한 ‘스펙’들도 열심히 충족했다. 고종을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시키고 차관급 일본인들이 정부 운영을 주도하도록 하고 국권을 일본에 넘기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의 친일 행각은 국권 침탈 이후에도 끊임이 없었다. 일본 귀족 작위를 얻게 된 그는 식민지배를 원활하게 하고자 한국 관습을 조사해 총독부에 제공하는 활동도 했다. 어린아이들에게 일본어를 보급할 목적으로 유치원 창설 작업에도 가담했다. 친일 행각을 일일이 열거하면 끝이 없다.
변함없는 충성의 대가로 상도 많이 받고 돈도 많이 받았다. 일례로, 강점 이전인 1907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았고, 1910년 강점 직후에는 중추원 고문 자격으로 죽을 때까지 연봉 1600원을 수령할 권리를 받게 됐다. 1911년에는 일본으로부터 은사공채 10만 원을 받았다.
이봉창 의사가 만 14세 때인 1915년에 취직한 제과점에서 식사 제공에 월급 7~8원이 나왔고, 1917년에 취직한 약국에서 숙식 제공에 월 기본급 10원이 나왔다. 1920~1924년에 용산역에서 정식 역부(驛夫)·전철수·연결수로 근무할 때는 월 40~48원을 받았다. 고급 엔지니어도 연봉 600원을 받기 힘들었던 것이다. 조중응이 받은 연봉 1600원의 가치를 알 수 있다.
받기만 한 게 아니라, 주기도 했다. 강점 이전부터 그랬다. 일례로, 1908년에는 조선 및 타이완 침략 사업을 응원하고자 일본 동양협회에 100원을 기부했고, 강점 직전인 1910년 3월에는 한국 병합 작업을 응원하고자 정우회에 경비를 지원했다. 강점 이후인 1914년에는 경성군인후원회에 돈을 기부했다. 일본군 후원 활동도 했던 것이다.
그는 일본과 관련된 경조사에는 꼭꼭 참석했다. 일례로, 안중근 의사가 의거를 한 1909년 10·26 사태 이후에는 이토 히로부미 추모 활동을 주도했고, 1915년에는 다이쇼 일왕의 즉위 대례식에 참석했다.
그렇게 활동이 잦았기 때문에 일본에서 기념품을 들고 들어오는 일도 있었다. 1910년에는 일왕 생일잔치에 갔다가 술병을 받아왔다. <친일인명사전>은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 연회에 초대받아 천황이 주는 주병(酒甁)을 받고 돌아왔다”라고 설명한다.
그는 일본의 은혜에 감사하는 공식 발언도 꽤 많이 했다. 1911년 8월 29일에는 ‘한국 병합 1주년’을 기념하는 글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기고했다. 일본 제후가 된 순종 황제가 1917년에 일왕을 알현하고 돌아오는 치욕을 감내했을 때는 <매일신보>에 글을 써서 “우리 조선인 전체의 영광”이라고 감격해 했다.
같은 해에 <반도시론>에 실은 글에서는 ‘죽을 사’와 ‘물건 물’까지 써가며 “조선인은 사물(死物)이라”, “정신이 없는 국민의 망함은 당연하고”, “일본에 병합된 것이 행복”이라는 등등의 망언을 했다.
이완용 못지않은 친일파였다. 본인에게는 불행하게도, 후손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이완용의 유명세에 밀려 ‘1등 친일파’가 되지는 못했지만, 3·1 운동 5개월 뒤인 1919년 8월 25일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일본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죽는 순간까지 일본에 충성하고, 죽는 순간까지 일본으로부터 연봉을 받았다. 그의 작위는 장남 조대호에게 계승됐다.
정미칠적·경술국적 조중응은 친일 악행으로 재산을 축적했고, 그 재산은 자손들에게 상속됐다. 우리 국민들이 이제라도 그 재산을 환수하는 것은 당연하다. 국민들의 의지를 반영하는 이 재산 환수 절차가 광복회의 신청을 받은 법무부에서 공명정대하게 진행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게 된다.
김종성(qqqkim2000)
<2022-03-03>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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