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23) 자유언론 실천선언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마태오 10,26-27)
“너희는 저녁때가 되면 ‘하늘이 붉으니 날씨가 좋겠구나’하고,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흐리니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 한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징은 분별하지 못한다.” (마태오 16,2-3)
복음 선포와 자유언론은 하느님의 말씀, 곧 진리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기쁜 소식은 곧 바른 소식입니다. 따라서 복음과 언론은 구원과 소통이란 면에서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표현의 자유라는 인간 최고의 가치를 추구하는 종교와 언론은, 정의에 기초해 인류 구원과 완성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하느님의 도구입니다.
요즘 언론은 ‘기레기’라는 오명을 듣고 있습니다. 종이신문과 공중파 방송에서 인터넷과 모바일 기반의 매체로 언론 지형이 변하면서 소위 클릭질을 유발하는 언론과 언론인에 대한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지금은 그 어떤 언론인도 자기가 쓴 기사로 인해 어딘가로 끌려가 험한 꼴을 당할 거라 생각을 하진 않습니다. 언론자유를 위해 목숨 걸고 투쟁한 선배들 덕분입니다.
광고주 협박해 언론 탄압
1974년 1월 8일 대통령 긴급조치 1호가 발동되었습니다.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나 비방, 심지어 수정하자는 요구에 대해서도 일체 보도할 수 없었습니다. 이른바 기관원들이 신문사와 방송사에 상주하며 기사 내용을 일일이 검열하던 험악한 시절이었습니다. 그때는 툭하면 편집국장과 기자들을 불법 연행하고 협박했습니다.
그해 10월 23일 중앙정보부가 송건호 편집국장 등 간부 3명을 불법 연행하자, 동아일보 기자 180여명은 다음날 자유언론을 위한 3개 항에 결의했습니다. 첫째, 신문·방송·잡지에 대한 어떠한 외부 간섭도 배제한다. 둘째, 기관원의 출입을 단호히 거부한다. 셋째, 언론인의 불법 연행을 거부한다. 지금 보면 너무나 당연한 주장이지만, 그 당시에 이러한 선언은 목숨을 건 결단이었습니다.
다음날 <동아일보> 기자들은 ‘10·24 자유언론 실천선언’을 채택하고 철야농성 끝에 신문 1면에 3단 기사로 선언문을 보도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 후 전국의 언론인들이 궐기대회를 열어 선언문을 채택하고 언론자유 옹호를 결의합니다. 학생, 시민, 종교인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인권 회복과 구속자 석방 운동, 민주화 투쟁이 자연스럽게 언론계로 확산한 것입니다.
일찍이 1971년 5월에 <동아일보> 기자들을 필두로 전국의 기자들이 언론에 대한 외부 압력을 배격하는 선언문을 발표한 바 있었습니다. 1973년 11월에는 전국의 기자들이 두 번째 언론자유 수호 궐기대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결정적으로 1974년 ‘10·24 자유언론 실천선언’은 한국 언론사의 큰 획을 그으며 한국 민주화 운동의 분수령을 이루었습니다.
1974년 12월 26일, 정부는 <동아일보>에 대한 광고 탄압을 시작합니다. 광고주들은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무더기로 광고 계약을 해지하였고, 이에 <동아일보>는 12월 26일 자 신문 4, 5, 6면의 광고란을 백지로 발행합니다. 언론 탄압에 항거하는 새로운 방법이었습니다. 한국기자협회는 언론에 대한 압력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재야단체와 종교계는 광고 사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동아일보> 돕기 운동을 거국적으로 펼쳤습니다.
74년 기자들 자유언론 실천선언 뒤
박정희 정권이 동아일보 광고 탄압
시민들이 격려 광고로 응원했으나
사주는 기자 해고 등 자유언론 배신
자유언론 앞장선 기자 18명 해고
12월 27일에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그다음 날에는 기독교교회협의회가 정부의 언론 탄압 정책을 꾸짖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특히 정의구현사제단은 ‘암흑속의 횃불’이라는 제목으로 유신체제의 모순을 지적한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과 함께 그동안 언론에 전혀 실리지 못했던 각종 선언문을 요약하여 1975년 1월 4일 자 마지막 8면 전면 광고로(당시 신문은 8면 제작) 게재했습니다. 광고의 효과는 컸습니다. 마치 세상이 개벽한 듯했습니다. 그 후 어린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자유언론에 대한 염원과 소망을 광고란에 싣기 시작했습니다. 기도와 눈물로 채운 감동적 지면이었습니다. 그런데 1975년 1월 7일 <동아일보>와 장기 광고 계약 중이던 16개 대기업 광고주들이 ‘설명할 수 없는 사정에 의해서’라며 광고 게재를 중단하고 무더기로 해약했습니다. 또한 광고문을 게재한 민주회복국민회의 사무국장 홍성우 변호사, 가톨릭 노동청년 여회장 정인숙 등 수많은 민주인사가 불법 연행되었습니다. ‘1 육군 중위’라는 1단짜리 광고를 실은 사람을 찾겠다며 보안사까지 동원되고 광고국장이 연행되는 등 살벌한 분위기가 이어졌습니다. 1975년 2월 12일, 유신헌법에 대한 찬성만을 강요하는 국민투표에서 투표율 79.84% 중 찬성 73%의 지지를 확보한 정부는 2월 15일부터 3일간 긴급조치로 구속한 160여 명의 민주인사를 석방하면서 외형적으로는 유화정책을 펼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동아일보>에 폐간 압력을 엄청나게 가했습니다.
그해 3월 8일, 동아일보사는 경영난을 이유로 기자 등 18명을 갑작스레 해임합니다. 기자들은 ‘우리의 봉급을 인하하더라도 해임을 철회해 달라’라고 건의한 후 낮에는 신문을 만들고, 밤에는 농성하는 눈물겨운 투쟁을 전개합니다. 3월 17일 새벽, 결국 기자들은 정부와 사주가 동원한 폭력배들에 의해 쫓겨납니다.
온 국민이 성금과 함께 광고로 힘을 보탰지만, <동아일보>는 끝내 국민의 뜻을 배신하고 정부에 굴복한 것입니다. 당시 민주회복국민회의 대변인이었던 저는 함석헌 선생, 공덕귀 여사, 이태영 변호사, 문동환 목사, 김철 선생 등을 모시고 <동아일보> 김상만 사장을 두어 차례 찾아가 격려했습니다. 1975년 1월 만남에서 김상만 사장은 “국민들의 성원에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힘주어 말했으나, 그해 3월 기자 해임 소식을 듣고 달려간 우리에게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죄송합니다”란 말만 반복했습니다.
우리는 “회사가 어렵다면 기자들이 봉급을 인하하겠다고 하고, 우리 국민들도 이렇게 격려광고로 동아를 지지하고 있으니 자유언론을 지켜야 한다”라는 호소와 함께, 그의 부친 김성수 님의 행업까지 언급하면서 조심스럽게 그러나 강한 어조로 그에게 윤리적 압력을 가했습니다.
그는 거듭 “말 못 할 사정이 있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라고만 말했습니다. “정부의 압력 때문입니까?”라는 한 분의 질문에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날 비굴한 인간의 모습, 우리의 자화상 그리고 우리 민족과 현실의 한계를 직시하며 매우 안타깝고 슬픈 마음으로 자유언론의 죽음을 지켜보았습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오히려 사도 교회의 외연 확장이라는 성장을 이끈 사실을 떠올렸습니다. 탄압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저기 흩어짐으로써 예수님의 가르침은 울타리를 넘어 더 넓은 곳으로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감옥에 가거나 해직된 기자들은 언론이 아닌 다른 영역으로 진출합니다. 대표적인 곳이 출판계입니다. 그들로 인해 그동안 금서로 인식되던 다양한 책들이 번역되어 퍼져 나갔습니다. 해직 기자 중 정계에 진출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새로운 자리에서 열심히 노력했고, 나름대로 역사의 순기능을 해냈습니다.
다만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 복권된 그들이 ‘왜 언론 개혁에 더 나서지 못했는가’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이 앞섭니다. 물론 정치권과 언론 사주 간의 묘한 뒷거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그때 그들은 언론 폐단의 뿌리를 뽑지 못했고, 문제는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오늘날 언론인들은 글 쓰는 기계가 되었습니다. 가짜 뉴스가 판치는 것보다 그것에 대한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다는 것이 더 아프고 무서운 현실입니다.
자유언론 모독한 양승태 대법원
언론은 이미 우리 사회의 최상층 기득권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견제는 더 어려워졌습니다. 우리 시민이 한층 더 깨어나 두 눈을 부릅뜨고 언론을 감시해야 할 이유입니다. 요즘 세상에 기자 정신을 왈가왈부하는 것이 순진한 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저는 끝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동아일보>의 ‘자유언론 실천선언’을 비롯해 언론 운동에 앞장선 분들, 중앙정보부 등 기관에 끌려가 고통받은 언론인들, 그리고 해직 기자들은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은인입니다. 우리가 매년 10월 24일을 ‘자유언론 실천 기념일’로 삼아 기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언론자유 투쟁은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박근혜 정권 당시 동아투위에 대한 양승태 대법원의 판결은 사법농단이며 자유 언론과 민주 시민에 대한 큰 모독입니다. 2014년 대법원 제2부 주심 신영철 대법관의 동아투위 손배소 판결, 2015년 대법원 제2부 민영일 대법관의 판결, 그리고 2014년에 이용훈 전 대법원장이 동아일보 창립자 김성수 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 취임한 것마저도 법관들의 인맥과 동아일보사 간의 깊은 유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사법, 입법, 행정, 언론 등 모든 분야에서 근원적인 개혁이 이루어지길 염원하며 기도합니다.
거룩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말 못 하고 듣지 못하는 이들을 온전히 치유해 주셨습니다. 신앙의 표현과 자유를 회복하고 보장해 주신 하느님의 크신 구원 행업입니다. 그러나 불의한 정치인들의 만행과 불법으로 세상 곳곳에서는 여전히 신앙과 자유 언론이 침해당하고 있습니다. 자유언론을 위해 헌신한 기자들과 가족 동지 모두의 좋은 뜻을 확인해 주시고 축복하소서. 또한 불의한 독재자들을 퇴치해 주시고 의로운 이들의 신념과 자유를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소서. 악마의 화신인 위선자들과 거짓 언론인, 사주들을 송두리째 뿌리 뽑아 건강한 말씀의 문화 속에서 기쁨과 희망, 평화와 일치를 이루도록 저희 모두를 바르게 이끌어 주소서. 성령 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함세웅 신부 _ 1968년 천주교 신부가 된 뒤 줄곧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일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1974년)을 주도하는 등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2012년 현역 은퇴 뒤에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연대의 발걸음을 계속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 현대사와 관련해 쓴 글과 붓글씨를 싣는다.
<2022-03-07> 한겨레
☞기사원문: 유신정권에 굴복 ‘동아’ 사주는 “죄송”말만 거듭했다
※관련기사
☞한겨레: [연재]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