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문 박물관 마을, 그리고 경교장과 홍난파 가옥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돈의문, 즉 서대문은 어디에 있었을까? 많은 사람이 서대문 로터리, 그러니까 지금의 서울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앞에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돈의문은 그곳이 아닌 정동사거리에 있었다. 서대문역에서 광화문 방향으로 약 400m 떨어진 곳이다.
정동사거리에 가도 그곳에 서대문이 자리했고 한양도성이 지나던 곳이라는 것을 알기는 어렵다. 네거리 한 견에 놓인 ‘돈의문 터’ 안내 팻말이 전부다. 일제강점기 전차 노선을 뚫고 주택지를 개발하기 위해 훼손한 돈의문과 인근의 한양도성은 작은 안내문으로 남았다. 그리고 그 후에 들어선 건물들도 거의 헐리고 일부만 ‘돈의문 박물관 마을’로 남아 있다.
돈의문 박물관 마을
1396년에 처음 세운 돈의문은 1413년에 폐쇄되었다가 1422년에 다시 세워 새문(新門)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래서 돈의문 안쪽 마을을 새문안골 혹은 새문안 동네로 불렀다. 지금도 인근에 새문안을 상호에 붙인 곳이 있다.
1915년 일제는 도로확장을 위해 돈의문을 철거했고 이후 한양도성도 훼철되며 집과 건물이 들어섰다. 새문안 일대는 1960년대와 70년대에 과외방 골목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주변에 명문 고등학교들과 유명 입시학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이후 새문안 도로변에 사무용 빌딩이 들어서며 인근 골목의 주택들은 식당으로 변신하는 곳이 많아졌다. 2000년대 이후 서울 도심 개발 붐으로 돈의문 박물관 마을이 자리한 동네는 ‘돈의문 뉴타운’ 지역으로 선정되었고 철거 후 근린공원으로 바뀔 뻔했다.
하지만 2015년 서울시는 돈의문 인근 동네가 근현대 서울의 모습을 간직한 역사적 가치가 있어 허물지 않고 보존하기로 한다. 기존 건물들을 보수해 돈의문 박물관 마을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돈의문 박물관 마을에 들어서면 1970년대로 돌아간 느낌을 준다. 인근의 현대식 건물들과는 다른 다소 예스러운 건물들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옛날 영화 간판이 걸린 극장 건물, 음악다방, 학교 앞 분식집, 그리고 여관 건물 등이 보인다.
박물관 마을이란 명칭에 걸맞게 여러 건물에서 전시가 이뤄지고 있고 체험도 이뤄지고 있었다. 골목 곳곳에는 예전 국가 시책을 느끼게 하는 표어들과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간판들도 붙어 있다.
돈의문 박물관 마을 건너에 강북삼성병원이 있다. 그 입구에는 근대 건축물 한 채가 자리하고 있다.
경교장, 백범 김구 선생이 최후를 마친 곳
돈의문 박물관 마을과 강북삼성병원 사이의 도로는 옛 한양도성이 지나던 곳이다. 도로를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끊어졌던 도성 자락이 인왕산 방향으로 다시 이어진다.
돈의문 바깥 동네는 한양 도심과 가깝고 중국으로 향하는 길인 의주로와도 연결돼 번창한 곳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중요한 곳이라 돈의문 바깥 가까운 곳에 경기감영을 두었다. 지금의 적십자병원 자리다.
백범 김구 선생이 최후까지 머물던 경교장도 돈의문 자리 바로 옆에 세운 건물이다. 원래 이 건물의 이름은 죽첨장(竹添莊)이었고 일제강점기에 광산업으로 큰 부를 축적한 최창학이 1938년에 세운 건물이었다.
친일파인 최창학은 해방 후 죽첨정을 헌납했고 이 건물은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이 숙소와 집무실로 이용하게 되며 경교장(京橋莊)으로 이름이 바뀐다. 경교는 서대문 인근의 다리에서 딴 이름이라고.
김구 선생이 암살당한 후에 경교장은 중화민국 대사관으로 이용되다 전쟁 후에는 월남대사관이 되었다. 1967년부터는 오랫동안 고려병원, 지금의 강북삼성병원 부속시설로 이용되며 변형되었다.
경교장은 2001년에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2005년에는 국가 사적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예전 모습으로 복원되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경교장 내부는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의 활동을 소개하는 전시장이다. 선생이 저격당할 당시 입은 옷도 볼 수 있는데 검붉은 혈흔을 지금도 확인할 수 있다.
암살의 배후로 남북통일에 대한 생각이 다르고 친일 부역자들 처리에 대한 생각이 달랐던 당시 정부 인사들, 심지어 미국 정보부대를 지목하기도 하지만 정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
지난 삼일절에 백범 김구 선생 후손들 소식이 들려왔다. 선생의 증손자와 증손녀가 서로 다른 대선 후보를 지지한다고. 증조부나 증손주들이나 나라 걱정하는 마음은 같을 테지만 각 진영은 자기편에 유리하게 해석하는 듯하다. 만약 백범 김구 선생이 지금 그 모습들을 본다면 어떻게 일갈(一喝)을 할지 궁금하다.
민족음악가? 혹은 친일음악가, 홍난파의 가옥
경교장을 나와 한양도성 순성길을 따라 걷다 보면 홍난파 가옥이 나온다. 아파트와 빌라가 들어선 동네에 자리한 고풍스러운 빨간 벽돌 건물이다. 빛바랜 흉상 덕분에 그 건물이 기념물이란 것을 알게 한다. 하지만 코로나19로 문을 열지 않는다는 안내가 붙어 있다.
1930년에 지은 이 근대 건축물은 원래 독일인 선교사의 집이었다고 한다. 근처에 독일 영사관이 있어서 이 일대가 독일인 주거지였다고. 지금은 이 건물만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데 2004년에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고향의 봄’으로 유명한 홍난파는 이 집에서 그의 말년 6년을 지냈다고 한다. ‘봉선화’로 일제에 짓밟힌 아픔을 노래한 홍난파는 민족 작곡가로 알려졌다.
하지만 홍난파는 흥사단 활동으로 고초를 겪은 후 전향서를 쓴다. 이후 홍난파는 일제의 대동아공영권을 찬양하는 음악 활동을 한다. 이러한 말년의 행적 때문에 홍난파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
홍난파의 후손과 일부 음악계에서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으나 사료에 기록된 그의 행적은 지워지지 않는다.
주변국과 우리의 근현대사, 그리고 미래
도시탐구 연재를 위해 취재하다 보면 도시, 특히 서울의 여러 구석에서 일본의 영향을 목격하게 된다. 일제강점기 시절 도시계획을 그대로 이어받은 도시구획이라든지 당시 새로 세우거나 해방 후 허물어버린 근대 건축물의 흔적이 그렇다.
심지어 역사에 기록된 인물이 살았던 건축물도 그 인물과 일본과의 관계까지 따져 바라보게 만든다. 이번 대선 과정에서도 각 후보의 일본을 바라보는 시각이 이슈가 되기도 했다.
그 시각들에 차이가 있지만 모든 후보는 주변국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을 것은 분명하다. 점점 파국으로 달려가는 유럽의 전쟁 소식이 주변국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어떻게 준비하고 대처하느냐가 후손에게 어떤 유산을 남겨줄 것인지 결정한다는 것을 우리의 가까운 역사뿐 아니라 먼 나라의 관계에서도 배울 수 있다.
<2022-03-08> 뉴스포스트
☞기사원문: [도시탐구] 일제가 철거한 돈의문과 옛 건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