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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철원에 일제강점기 거리? “어린시절 본 만행 똑똑히 기억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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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사 앞 206억 들여 공사중
철원 최전성기 1930~40년대 주목
열차역·학교 등 재현 관광자원화

일제 수탈 역사, 미화될 우려도
독립운동단체 “왜색거리 복원 안돼”
“강원 첫 만세운동 현장 주목해야”

군 “항일 역사도 아울러 조성할 것”

철원 주민 이기인씨가 지난달 25일 강원도 철원군 노동당사 앞에 조성 중인 ‘근대문화거리 테마공원’에서 철원군에 왜색거리 조성을 중단해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수탈로 번성했다가 전쟁 통에 사라진 일본인 거리를 세금 들여 복원한다고요? 일본에서 알게 된다면 특종감입니다.”

지난달 25일 강원도 철원군 노동당사 앞에서 만난 주민 이기인(89)씨가 분통을 터뜨렸다. 힘겹게 걸음을 옮겨 노동당사를 등지고 선 이씨가 공사가 한창인 거리 쪽을 가리켰다.

도로 양쪽 1층짜리 건물 10여 동 유리창에는 ‘보통학교’, ‘의상실·양복점’ 등 글씨가 쓰여 있었다. 골목 안쪽으로 들어서자,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건축전문학교 출신 건축가가 설계했다는 철원역이 빨간 벽돌 모습 그대로 재현돼 있었다.

철원군이 1930~40년대 실존했던 철원역의 모습을 재현해 만든 역사.

역 오른쪽으로 일본강점기 정오를 알리는 대포였던 오정포가 우뚝 솟아 있었다. 보통학교, 철원역, 오정포를 뒤로하고 마주한 거리는 일제강점기를 재현한 영화 세트장과도 같았다.

이기인씨는 “어린 시절 왜놈들 만행은 똑똑히 기억난다. 쇠붙이는 물론이고 송진과 말먹이 풀, 짚으로 짠 가마니까지 샅샅이 뒤져 수탈해 갔다. 왜색거리가 만들어지는 걸 보고는 일제 악몽이 되살아나 잠을 설친다”고 한숨을 쉬었다.

철원군이 1930~40년대 이 일대에 실존했던 우편국을 재현한 모습. 철원군은 ‘신문물이 오가던 우편국에서 방문객이 직접 전보를 작성해 발송한 뒤 인근 전시관에서 받아보는 체험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식민지 시절 건물·시가지 재현

철원군은 오는 7월 완공을 목표로 2016년부터 7만여㎡ 터에 국비 76억원 등 사업비 206억원을 들여 ‘철원근대문화거리 테마공원’을 짓고 있다. 지역 대표 관광자원인 노동당사 앞에 철원역을 중심으로 1930~40년대 가장 번성했던 옛 철원 시가지를 재현한 철원거리와 철원역사전시체험관 등을 짓는 것이 뼈대다.

철원이 일제강점기인 1930~40년대 철원 시가지에 주목한 이유는 이때가 철원 역사에서 가장 번성했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지금 철원은 인구가 4만3천여명인 접경지역 소도시지만 당시엔 금강산선과 경원선이 분기하는 인구 10만명의 중부권 중심도시였다. 일제가 패망해 물러나고,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 일대 번성했던 거리는 폭파되거나 불에 타 없어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철원근대문화거리 조감도. 철원군 제공

하지만 일부는 옛 철원 시가지 조성이 일제강점기 미화로 왜곡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기획실장은 “일제강점기 흔적이 남은 군산과 목포 등은 관광지 역할도 하지만 일제 수탈을 비판하는 독립운동 역사관 등도 잘 갖춰 역사 교육 장소로 활용된다. 반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철원이 일제강점기 당시 건물을 다시 지어 관광지화하려는 것은 일제 식민지 미화로 해석될 우려가 크다. 이런 점에서 시대착오적”이라고 지적했다.

철원독립운동기념사업회는 사업 초기인 2018년 철원군과 군의회에 의견문을 보내 “철원이 추진하는 사업은 일제강점기 철원의 행정·상권 중심지에 일제가 조성했던 왜색문화를 되살리는 사업일 수밖에 없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이우형 철원독립운동기념사업회 연구위원장은 “노동당사 앞에 조성됐던 일본인 거리는 현해탄을 건너온 일본인과 친일 지주가 살던 곳이다. 철원근대문화거리는 일제강점기 화려했던 시가지의 주요 건물을 재현해 눈요깃거리로 돈 몇푼 벌어보자는 천민자본주의적인 발상”이라며 “왜색거리를 복원하면 이곳을 찾은 일본 관광객은 무슨 생각을 하겠느냐”고 비판했다.

철원군이 1930~40년대 실존했던 철원공립보통학교를 재현한 모습.
김용빈 철원독립운동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이 강원도 철원군 노동당사 앞에 조성 중인 ‘근대문화거리 테마공원’에서 사업의 문제점을 설명하고 있다.

철원근대문화거리 대신 ‘독립운동 거리’를 조성하자는 목소리도 있다. 철원근대문화거리가 조성 중인 이 일대는 일제가 만든 신도심이기도 하지만 1919년 3월10일 강원도에서 처음으로 항일 만세 운동이 전개됐던 역사의 장소이기도 하다. 철원 만세 운동은 춘천과 횡성, 홍천 등 강원도 전역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나게 된 시발점이었다. 지금도 주민들은 이곳을 ‘만세거리’라 부른다.

김용빈 철원독립운동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은 “철원지역 대표 독립운동가인 박용만 선생 생가터와 왕종순 여사 생가터, 민족정신을 가르치던 봉명학교 터 등 만세거리 수많은 역사적 현장이 외면받고 방치됐다. 지금이라도 사업을 전면 수정해 철원의 역사적 긍지인 독립운동 거리로 복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철원 노동당사 앞에 조성 중인 ‘근대문화거리 테마공원’ 모습.

철원군 “일제강점기 거리는 일부일 뿐”

철원군은 옛 시가지를 재현한 근대문화테마거리 외에 중심 건물인 상설전시관에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해방 이후 철원, 평화 중심지로 거듭난 철원의 미래 등을 관람할 수 있도록 계획하고 있다며 “일제 미화 의도는 없다”고 반박한다. 또 근대문화거리 옆에 독립운동 단체 등의 의견을 수렴한 추모공원도 조성해 독립운동가뿐 아니라 한국전쟁 희생자 등을 위한 추모 공간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전종덕 철원군 관광개발팀장은 “사업 초기 왜색거리 등 우려가 제기돼 시민단체 보고회 등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쳐 많은 부분을 수정했으며, 일제강점기 철원 모습도 있지만 이 시기만 중점을 두진 않았다”며 “철원의 자랑스러운 독립운동 역사까지 담아낸 역사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 운영하면서 추가로 조처하겠다”고 말했다.

글·사진 박수혁 기자 psh@hani.co.kr

<2022-03-11> 한겨레

☞기사원문: 철원에 일제강점기 거리? “어린시절 본 만행 똑똑히 기억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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