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문학가 임헌영과의 대화>
1월 말에 대화체의 책 한권을 받았다. 한양대 유성호 교수가 인터뷰어가 되어 임헌영 선생과 나눈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문학가 임헌영과의 대화>(한길사, 2021)라는 책이다. 작년 10월에 보낸듯한데 올 1월 말에 내게 도착했으니 3개월이 걸렸다. 이사한 주소가 확인되지 않아 그 전 주소를 거쳐 온 듯하다. 3개월을 거쳐 오느라고 수고한 이 책을 조심스럽게 펼쳐보았다.
리영희 선생과의 <대화>(한길사, 2005) 등으로 그 동안 대화체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임헌영 선생이 이번에는 인터뷰이가 되어 자신의 파란장장한 생을 회고하고 있는데 나는 줄을 쳐 가며 이 대화록에 푹 빠지게 되었다. 임 선생의 팔순을 기념하기 위해 기획된 듯한 이 책이 간행된 지 몇 달 되어 약간은 열기가 식은 듯하지만, 내가 감동한 이 책을 독자들도 일독해 주기를 ‘강추’하는 의미에서 때늦게 이 글을 초한다.
임헌영 선생(1941∼)은 나와는 세 살 차이로 그 동안 만날 기회가 많았다. 1978년 임 선생이 <월간 독서>의 주간으로 있으면서 ‘이 달의 좋은 책’을 선정하여 보급하려고 할 때 그 선정위원으로 손봉호 박현채 선생과 함께 참여한 것이 공적인 관계를 맺게 된 계기가 아닌가 한다.
덕분에 <월간 독서>에서 주관하는 강연에도 참여, 임 선생으로부터 따뜻한 격려를 받기도 했다. 그 무렵 내가 숙대신보사 주간으로 있었는데, 임 선생의 부인되시는 고경숙 선생이 숙대신보 편집책임자로 있어서 가정적으로도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20여년이 지난 후 임 선생이 민족문제연구소에 관계하고 내가 민족문제연구소 간행 <친일인명사전>의 초대 편찬위원장이 되어 약 2년간 자주 만나게 되었고, 2010년대 중반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파동 때에도 뜻을 같이한 적이 있었다.
임 선생의 대화록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을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게 된 데는, 무엇보다 비슷한 세대가 갖는 공감대가 거의 일치하고 있음을 먼저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세대이면서 내가 미처 몰랐던 사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고, 겉핥기로 지나친 사건들에 대한 심도있는 설명과 해석, 역사적 의의가 역사공부를 한 나같은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기 때문이다. 정작 이 책에 주목하게 된 까닭은, 이 책 초입에 나오는, 6·25때에 경험한 사건들이 나의 흥미를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6·25 때에 그의 아버지와 형님에 관한 기술은, 맥락은 전혀 다르지만, 나도 그 때에 아버지를 여의었고 막내 자형을 납치로 잃었으며 결혼한 후에는 큰 처남도 그 때 민족상잔의 희생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는데 이점이 동병상련의 아픔으로 클로즈업되었다. 무엇보다 전쟁이 한참 진행될 때 소년 임헌영이 소를 먹이러 가다가 인민군에게 그 소를 빼앗길 뻔 했던 이야기는 바로 나의 이야기와 일치, 그 때를 소환하는 큰 공감대를 이루었다. 나도 피난지에서 소를 먹이러 가다가 그 소를 아예 인민군관이 징발해 갔는데, 그 때문에 지금까지도 6·25를 회상하면 깊은 상처로 남아 있다. 그 소는 우리 집 소가 아니고 내가 피난하고 있는 주인집의 소였다. 아마도 이 책 첫 부분에 보이는 공감되는 이런 사건들이 이 책을 끝까지 정독하도록 한 기연이기도 하다.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문학가 임헌영과의 대화>는 내가 읽은 대화록 중에서 가장 알찬 내용을 담고 있다. 우선 임헌영 선생의 폭넓은 경험과 그것들을 일일이 기억하고 있는 총기에 놀란다. 어떻게 그 수많은 사건들을 지금 그 사건이 실현되고 있듯이 조리 정연하게 풀어낼 수 있을까,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육하원칙에 따라 일시 장소는 물론 원인과 경과, 그 역사적 의의까지 좍 풀어내고 있다. 인터뷰어가 어떤 질문을 하더라도 그는 거침이 없다.
문학평론가로서 문학작품을 거의 섭렵했을 것이라는 것은 이해할 만하지만 관련된 시대의 역사적 사건들까지 마치 컴퓨터에 저장해 놓은 것처럼 체계적으로 풀어내어 한국의 근현대사를 증언, 정리하고 있는 점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 책은 시대를 고뇌하는 한 문학평론가의 깨알 같고 준엄한 ‘역사 평론’이라고 이름 붙여도 좋을 것이다. 이 책은 단지 한국의 문학과 역사에 그치지 않고 세계 문학과 세계사로 그 지평을 넓혀가고 있어서 끝이 없다.
인터뷰이인 임헌영 선생은 유신 시절과 신군부 시절에 두 차례나 옥고를 치렀다. 이 고난은 그에게서 평론가, 학자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막아버렸다. 그러나 여기서 좌절하지 않고 옥고를 통해 응축시킨 문학과 역사에 대한 열정을 사상적으로 승화시키는 한편 해방 이후의 우리 시대의 과제인 친일청산 및 민주화운동으로 활동영역을 넓혀갔다. 유신 이후 우리 사회의 문화운동에는 물론 민주화운동에도 그의 기획과 실천이 닫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며, 그의 교제권은 정치권은 물론 문학 역사 예술 등 한국의 인문학 분야 전반에 광범하게 걸쳐 있다. 그가 목표로 한 친일청산의 과제는 <친일인명사전>의 편찬과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제반 연구와 운동을 통해 활성화하고 있다. 인터뷰어 유성호 교수의 질문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이기도 한 임헌영 선생은 친일파 청산의 과제와 관련, 이렇게 핵심을 꿰뚫으면서 답하고 있다.
“왜 친일파 청산이 중요하냐고 아직도 묻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한마디로 민족반역자는 단순한 범죄행위가 아니라 제국주의 파시즘의 이념에 세뇌당한 인류평화의 적이라는 점을 들고 싶어요. 그들은 일본에만 충성하는 게 아니라 미국이든 어느 나라든 침략세력에게 붙는 생리구조입니다. 나라 안에서는 당연히 독재와 독점, 반(反)평화를 지지합니다. 인류평화의 적이자 민주주의의 반대세력입니다. 우리가 친일청산해야 일본이 과거사를 정리할 것이며 그래야 동아시아에 평화를 이룩할 수 있습니다.”(이 책 654쪽)
덧붙이는 글 | 본 글은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의 SNS(페이스북)에도 게재되었습니다.
<2022-03-14>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시대를 고뇌하는 한 문학평론가의 깨알 같고 준엄한 ‘역사 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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