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25) 유신 병영국가 고발한 김상진 열사
“아, 용사들이 싸움터에서 쓰러졌구나.
요나탄이 산 위에서 죽었구나.
나의 형, 요나탄, 형 생각에 나는 가슴이 미어지오.
형은 나를 즐겁게 해 주더니
형의 그 남다른 사랑
어느 여인의 사랑도 따를 수 없었는데
아, 용사들은 쓰러지고
무기는 사라졌구나.” (2사무 1,25-27)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히브 12,4)
죽음 앞에서 우리는 모두 진지하기 마련입니다. 존재 양식의 질적 전환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의 과거를 생각하고 영생을 기리는 추모와 애도는 그 자체가 감동입니다. 전쟁 중에 사망한 절친한 벗 ‘요나탄’에 대한, 여인의 사랑을 능가한다는 다윗의 칭송과 그 깊은 우정은 바로 아가페 곧 헌신의 초월성을 의미합니다. 이웃과 공동체를 위해 산화한 순국선열과 민주영령들을 정성껏 기리고 칭송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1975년은 여전히 억압과 공포로 뒤덮여 있었지만, 민주화에 대한 국민적 열망과 청년 학생들의 항거 의지 또한 높아진 한 해였습니다. 이를 잠재우기 위한 술책으로 박정희 정권은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 국민투표를 공포했습니다. 그러나 오직 찬성만 가능한 일방통행식의 정치 연극이었습니다.
국민투표로 형식적 지지를 만들어낸 유신정부는 며칠 후 화해라는 명목으로 민청학련 구속자들을 대거 석방함으로써 정치적 국면 전환을 꾀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더욱 치밀한 공작으로 민주인사들을 탄압했습니다. 특히 동아와 조선투위 기자들을 무더기로 해직시키기도 했습니다.
시신 강제 화장한 뒤 보도 금지
이에 대학가를 중심으로 ‘독재 타도’를 외치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습니다. 1975년 4월 고려대학교를 비롯한 일부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고, 4월 8일 인혁당 재건 사건의 연루자 8인에게 사형선고를 한 지 17시간 만에 형을 집행하는 등 충격과 혼란의 나날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던 중 가슴 아픈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4월 11일 수원에 위치한 서울대학교 농대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입니다. 서울대 축산과 68학번 김상진 군입니다. 당시 서울 농대는 황연수 학생회장이 구속된 상태에서 시위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11일 오전에도 학내 집회가 예정되어 있었던 터라, 농대 대강당 잔디밭에 수백 명의 학생들이 모였습니다. 이날 시국성토대회의 세 번째 연사로 등장한 김상진 군은 준비한 선언문을 읽어내려갔습니다.
“더 이상 우리가 어떻게 참을 수 있으며 더 이상 우리가 저들에게서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어두움이 짙게 덮인 저 사회의 음울한 공기를 헤치고 죽음의 전령사가 서서히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을 우리는 직시하고 있다. (중략) 탄압과 기만의 검은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라! 나는 이제 자유와 평등의 민주사회를 향한 결단의 깃발을 내걸어 일체의 정치적 자유를 질식시키는 공포의 병영국가가 도래했음을 민족과 역사 앞에 고발코자 한다.”
선언문 낭독이 끝나갈 때쯤 김상진 군은 자결을 시도합니다. 학생들이 황급히 병원으로 옮겼으나 그는 다음날 숨을 거두고 맙니다. 당시 상황이 녹음되어 있어 지금도 김상진 군의 육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또한 선언문의 제목이 ‘학우들에게 바치는 나의 유서’였음도 밝혀졌습니다. 그의 선언문에는 당시의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숨 막히는 공포,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을 그는 ‘검은 바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온몸으로 검은 바람을 거부했고 몸을 던져 바람을 갈라 길을 냈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두려움이 없는 청년, 학생을 가장 두려워했습니다. 김상진 군의 죽음이 또 다른 시위로 이어질까 두려워했던 정권은 하루도 되지 않아 그의 시신을 강제로 화장해버립니다. 아울러 언론에 보도 금지 조치를 취합니다. 하지만 <동아일보>에 실린 1단 기사로 그의 죽음은 널리 알려졌고, 전국에서 추모 집회가 열렸습니다. 저는 김상진 군의 소식을 며칠 뒤에야 들었습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발표한 성명서로 인해 4월 11일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었기 때문입니다. 4월 18일에야 가톨릭학생회 지도신부단 주관으로 ‘김상진 군 추모미사’를 조촐하게 명동성당에서 봉헌했습니다. 그리고 22일에는 민주회복국민회의 주최로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대규모 추모행사를 개최하기로 했습니다. 추모행사에 많은 학생과 윤보선 전 대통령도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그들은 결국 성당에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경찰이 미도파백화점 앞부터 성당 마당까지 들어와 이를 원천 봉쇄했기 때문입니다.
박정희 유신독재 치닫던 75년 4월
서울대 농대 시국성토대회 연설때
“무릎꿇고 사느니 서서 죽을 것” 다짐
정권은 김상진 추모행사도 원천봉쇄
박정희에 간곡한 호소 글도 보내
김상진 군이 세상을 떠난 후 학우들에게 보내는 글 외에 또 하나의 글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바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글로 ‘대통령의 결단을 촉구합니다’란 제목이 붙어 있었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쓴 글인데도 그 깍듯한 표현에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그는 ‘위대한 지도자의 진정한 용기는 영광의 퇴진을 위한 숭고한 결단에 있다’라고 하면서 박정희의 혁명공약을 언급하기도 합니다.
“각하께서 5·16 직후 발표하신 혁명공약에서 민정 이양을 선포하셨을 때, 우리 국민은 정의로운 혁명가에게 갈채를 보냈고, 삼선에 출마하셨을 때 우리 국민의 얼굴은 어두웠으며, 유신헌법이 공포되었을 때 국민의 눈동자는 두려움으로 가득 차 감히 입을 열고자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김상진 군은 박정희의 양심에 일말의 기대를 걸었던 듯합니다. 애국애족과 헌법 정신을 일깨우면서 국민의 두려움과 절망을 살펴봐 달라고 간청합니다. ‘자신과 같은 무고한 희생이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진실로 엎드려 바란다’라고도 썼습니다. 하지만 박정희에게 김상진 군의 간청은 닿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한 젊은이의 죽음은 빨리 덮어 버려야 할 사건이었을 뿐입니다.
정부의 탄압은 가혹했습니다. 더구나 월남이 패망하자, 북한의 남침 도발 등 전쟁 분위기를 고조시키며 전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습니다. 국회도, 재야도, 교회도 모두 침묵할 수밖에 없는 비통한 시기였습니다. 김옥선 국회의원의 용기 있는 발언, 긴급조치 9호 이후 유신 철폐를 외치며 당당하게 감옥에 가고 법정에 선 청년 학생들, 특히 천주교 정의구현 청년전국연합 회원들의 저항운동이 민주화의 열기를 전해 준 마지막 보루였습니다.
전태일 후 민주주의 위한 첫 죽음
1970년 전태일 열사의 자기 헌신 이후, 공개적으로 민주주의를 위해 죽음을 택한 사람이 김상진 열사입니다. 당시 질식시키는 공포를 깨기 위해 많은 젊은이가 피를 흘렸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공부해 좋은 대학에 들어간 앞날이 유망한 젊은이들이었습니다. 현실에 질끈 눈 감아 버리면 미래가 보장되는 데도 그들은 차마 그러지 못했습니다. 김상진 열사도 다음과 같은 처절하고 선명한 선언을 하며 자신을 먼저 내던졌습니다.
“역사는 이러한 사태를 원치 않으리라. 그러나 우리는 하늘이 무너지고 또 무너지더라도 불의가 우리를 핍박하더라도 무릎 꿇고 사느니 차라리 서서 죽을 것임을 재천명해야 하리라.”
김상진 열사는 현재 경기도 이천의 민주화운동 기념공원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옛 서울 농대가 있던 경기상상캠퍼스에는 김상진 열사 기념 표석이 서 있고, 김상진 열사 기념사업회가 추모사업을 펼치고 있습니다.
저는 당시의 모든 청년, 학생 열사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안위와 빛나는 미래를 버리고 공동선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이는 역사적으로는 순국선열의 행업과 이어지고, 신학적으로는 예수님의 희생과 맥을 같이 합니다. 민족의 평화와 안녕, 공동선을 위해 ‘나’를 버리고 ‘우리’를 위해 헌신하신 모든 분을 기억하며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지금 이 시대에도 온전한 민주주의를 갈망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 안에서 지성과 양심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갈 것을 다짐합니다.
거룩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불의에 맞서 싸운 청년 학생들의 열정을 되새깁니다. 특히 공포의 병영국가를 종식시키기 위해 자신의 몸을 바친 김상진 열사의 결단과 호소를 깊이 묵상합니다. 노동자의 자유를 위해 몸 바친 전태일 열사, 학문과 사상 그리고 정치적 자유를 외치며 산화한 김상진 열사, 이 두 청년은 1970년대의 어둠을 밝힌 등불이며 침묵과 굴종에서 벗어나라는 경종입니다. 이 두 청년의 헌신을 통해 저희 모두 정화되어 민족 공동체를 위한 아름다운 제물이 되게 하소서. 노동자들과 청년 학생들을 우뚝 세워주소서. 성령 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함세웅 신부 _ 1968년 천주교 신부가 된 뒤 줄곧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일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1974년)을 주도하는 등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2012년 현역 은퇴 뒤에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연대의 발걸음을 계속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 현대사와 관련해 쓴 글과 붓글씨를 싣는다.
<2022-03-21> 한겨레
☞기사원문: “탄압과 기만의 검은 바람이 불어온다!” 47년 전의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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