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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친일청산 응원한 조선일보 사주… 기묘한 행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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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3 – 방응모

조선일보사가 모기업인 조선미디어그룹은 조선방송·디지틀조선일보·조선비즈·스포츠조선·조선뉴스프레스·조선교육문화미디어·헬스조선·조선아이에스·방일영문화재단·조선일보미디어연구소를 관계사로 두고 있다.

총수 일가의 재산 규모도 상당하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2020 한국언론연감>에 따르면, 방상훈 조선일보 대표이사의 자사 지분은 2018년에도 30.03%, 2019년에도 30.03%다. 실제로는 이보다 많다는 것이 2017년 4월 4일 자 <미디어오늘> 기사 ‘조선일보 후계자 방준오의 경쟁자가 사라지다’ 등에 보도되기도 했다.

▲ 열린민주당 김의겸 의원이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에서 교육·사회·문화 분야 대정부질문에 나서 조선일보사와 사주 일가의 부동산 현황을 공개하고 있다. 2021.9.16 ⓒ 남소연

김의겸 의원이 2021년 9월 16일 공개한 내용에 따르면, 조선일보 총수 일가가 보유한 부동산 규모는 40만여 평이다. 서울 여의도 면적 45%에 해당하고 당시 기준으로 공시지가 4800억 원, 시가 2조 5천억 원에 달한다.

방씨 일가의 재산이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부터 축적된 게 아니라는 점은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다. 이 재산은 해방 이전과 연속성을 갖고 있다. 그것도 해방 이전의 친일 반민족 행위와 관련돼 있다. 방씨 일가의 재산은 이들의 조상인 친일파 방응모의 재산에 기초를 두고 있다.

김성수와 닮은 듯 다른 방응모

조선일보 방응모의 친일은 동아일보 김성수의 친일에 비해 덜 부각돼 있지만, 방응모 역시 만만치 않은 친일파였다. 김성수는 군국주의 침략 전쟁을 홍보하는 방송 활동과 순회강연을 하고, 국민정신총동원연맹·국민총력조선연맹·흥아보국단·조선임전보국단에 참여하고, 일제의 전쟁 수행을 위한 국방헌금을 기부하고, 징병제와 학도지원병 참여를 독려하는 등의 친일행위를 했다.

방응모의 친일에서도 김성수의 친일 방식이 나타난다. 방응모도 국민총력조선연맹에 가담했다. 또 친일 조직인 조선신궁봉찬회·조선대(大)아세아협회·조선문예회·경성군사후원연맹·조선춘추회·배영동지회에도 가담했다. 일본군을 위한 기관총 구입비도 헌납했다.

▲ 민족문제연구소가 <조선일보>·<동아일보> 창간 100년을 맞아 두 신문의 친일 행적을 비판하는 기획전시회 ‘일제 부역언론의 민낯’을 11일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돌모루홀에서 시작했다.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이 1933년 기관총을 일제에 헌납했다는 내용이 담긴 문서. ⓒ 소중한

또 시국 강연에서 자신과 청중들을 일본 국민으로 전제해놓고 ‘비국민적 행위를 배격하자’라고 발언했다가 봉변을 당했다. 편집국장과 영업국장의 반대를 물리치고 <조선일보>에서 일본군을 아군으로 표기하는 방안도 관철했다.

그 정도였는데도 방응모의 친일은 김성수에 비해 덜 부각돼 있다. 이는 해방 직후에 김성수가 한국민주당(한민당) 지도자로 부각된 것과 무관치 않다. 1947년 7월 30일 자 <동아일보> 1면 좌단에 실린 ‘한민(韓民) 성명’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해방 직후의 한민당은 ‘친일 원흉’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친일파들이 대거 집결한 이 정당의 지도자로 떠오르다 보니, 김성수의 친일이 방응모의 친일보다 좀 더 쉽게 부각된 측면이 있다.

이와 더불어 해방 공간에서 방응모와 조선일보가 김성수 및 동아일보와 정반대 행보를 걸었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김성수가 한민당을 조직해 친일 보수세력의 이익을 적극 옹호한 반면, 방응모는 외형상 그와 상반되는 길을 걸었다.

방응모는 한때 백범 김구와 같은 노선을 걸었다. 1946년 8월 25일 자 <동아일보> 1면 우하단 기사는 김구가 한국독립당 위원장이 되고 조소앙이 부위원장이 되고 방응모가 총 10인(김구·조소앙 포함)의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된 사실을 보도했다.

방응모가 한때 함께한 인물 중에는 김구보다 훨씬 ‘왼쪽’에 있는 사람도 있었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에서는 방응모에 관해 “1945년 8월 말과 9월 초에 조선재외전재(戰災)동포구제회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라고 설명한다. 방응모가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도 참여했던 것이다. 이런 행보는 해방정국 하에서 그의 친일이 덜 부각된 이유 중 하나를 설명한다.

덜 부각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 제정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출범으로 친일 청산 열기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에, 동아일보와 달리 조선일보가 친일 청산을 적극 응원한 사실이 그것이다. 조선일보는 국회의 반민법 제정을 반대하는 이승만 정부를 비판하면서 친일 청산을 옹호하는 기사들을 내보냈다.

2018년에 <한국언론정보학회보> 통권 제88호에 실린 채백 부산대 교수의 논문 ‘반민특위에 대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보도 태도’는 동아일보와 관련해서는 “명시적인 반대는 아니지만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면서 반민법이 갖는 특별법으로서의 문제를 지적하거나 정부의 반대 입장을 간접적으로 뒷받침하는 보도 태도를 보였다”라고 설명하는 한편, 조선일보와 관련해서는 “정부 수립 직후부터 반민법과 반민특위에 대해 매우 적극적으로 보도하였다”라고 설명한다.

▲ 반민특위 재판정. ⓒ wiki commons

논문은 “(1948년) 8월 20일 자 사설에서도 ‘반민족분자 처단과 정부의 책임’이라는 제목으로 반민법의 실시 이전에라도 정부는 ‘각급 정부에서 반민족행위자를 제거하여야 할 것’이라며 이는 ‘우리 민족 피의 독립운동사가 이를 냉엄히 명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라고 설명한다. “피의 독립운동사”를 언급하며 반민법 실시 이전에라도 친일파를 하루빨리 숙청하자고 재촉하는 사설이 조선일보에 실렸던 것이다.

이런 기사들을 내보내는 조선일보의 정점에 방응모가 있었다. 그의 과거 이미지가 퇴색되면 됐지, 더 강해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친일 청산 논조, 적극적인 듯 소극적인

그런데 그런 중에도 조선일보는 ‘이상한’ 기사를 섞어서 내보냈다. 그해 9월 1일 자 사설에서 “중범자에 해당할 자일수록 반성 회개하야 새 국가에서 새 용기로 충성을 다할 것을 생각”하게 되므로 그들에게 관대한 처분을 내릴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일이 있다. 친일 행위를 많이 저지른 사람일수록 관대한 처분을 더 희망하게 되므로 그런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자는 주장도 내보냈던 것이다.

조선일보의 친일 청산 주장이 불충분했다는 점은 정부 수립 이전인 미군정기의 보도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미군정기에는 조선일보나 동아일보나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미군정기의 친일 청산에 대해서도 조선일보가 다소 적극적이기는 하였지만 두 신문 (다) 큰 차이 없이 전반적으로 소극적 입장이었다”라며 “청산을 정부 수립 이후로 미루자는 것이 두 신문의 공통된 입장이었다”라고 위 논문은 설명한다.

패망한 일본을 전범국으로 취급하던 미국은 국공내전에서 중국 국민당이 중국 공산당에 패배할 것이 확실해지자, 국민당 대신 일본과 제휴하는 쪽으로 정책을 수정했다. 이 같은 변화는 1948년 1월 6일 케네스 로이얄 육군장관의 성명을 계기로 본격화됐다. ‘자주적인 일본을 건설해야 한다’라는 이 성명을 계기로 미국은 일본을 동맹국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일본에 대한 미국의 태도가 그렇게 바뀌기 전에 미군정 하에서 한국인 지도자들이 친일 청산을 주도했다면, 이승만이 대통령 권한을 악용해 반민특위를 훼방하는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나기 어려웠을 수도 있다. 일본에 대한 미국의 적대정책이 유효할 동안에 친일 청산이 일어났다면, 이승만 정권 때보다는 좀 더 강도 높게 친일 청산이 진행됐을 수도 있다. 하지만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이에 관한 한 같은 태도였다.

방응모가 이끄는 조선일보는 미군정 하의 친일 청산은 반대했지만, 정부 수립 이후의 친일 청산은 적극 지지했다. 그리고 사주 방응모는 해방정국 하에서 이승만과 다른 길을 걸었다. 동아일보의 김성수에 비해 방응모의 친일이 덜 부각된 이유 중 하나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방응모가 정말로 회개한 상태에서 그런 노선을 걸었다면, 자신의 행적을 참회하는 것은 물론이고 친일 행위를 하면서 벌어들인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친일파 김성수는 친일 청산을 저지했고, 재산을 지켜냈다. 친일파 방응모는 친일 청산을 지지했고, 재산을 지켜냈다. 방응모는 김성수와 다른 길을 걸었지만 김성수와 비슷한 결과에 도달했다. 친일에 대한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점, 참회도 하지 않았다는 점, 친일행위를 하면서 축적한 재산을 지켰다는 점이 그렇다.

조선일보 총수 가족의 재산은 친일 반민족행위자 방응모의 재산에 기초를 두고 있다. 사회에 환원됐어야 할 재산이 그 속에 들어 있다. 조선일보의 존립과 총수 일가의 재산 보유가 과연 정당한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2022-04-02>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친일청산 응원한 조선일보 사주… 기묘한 행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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