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의 히,스토리] 민영휘 묘 관리하는 민성기 가옥에 ‘친일 행위’ 표기해야
친일파 민영휘(1852~1935)의 무덤을 관리하는 ‘춘천 민성기 가옥’에 그의 친일행위를 표기하는 문제가 난관에 부딪혀 있다. 1920년대 건축된 이 가옥이 1985년에 강원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뒤 수억 원의 세금이 투입됐지만 후손들의 반발에 막혀 친일행위 표시가 어려움에 처해 있다.
춘천시 동면 장학리 70번지에 소재한 이 가옥은 건축 목적 자체가 민영휘와 관련돼 있다. 문화재청이 운영하는 국가문화유산포털은 ‘춘천 민성기 가옥’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민영휘의 묘소를 관리하기 위해 묘 가까이에 세운 묘막이다”라고 설명한다. 친일파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주택임을 알 수 있다.
이 가옥에 대한 문화재 지정을 취소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2017년부터 있었다. 그 뒤에는 가옥 안내판에라도 친일행위를 표기하자는 타협적인 목소리가 나왔다. 그 결과 지난해 12월 안내판이 변경됐다. 3월 31일 자 YTN 보도 ‘친일파라 부르지도 못하고… 슬그머니 교체한 안내판’에 따르면 변경된 안내판은 민영휘에 관해 이렇게 서술했다.
춘천 민성기 가옥은 조선 후기 관료이자 정치인인 민영휘의 묘를 관리하기 위해 세워진 묘막이다. 이 가옥은 화천에 있던 민가를 1925년 옮겨 지은 것으로 전해지며, 강원 지역의 전통 가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건축물로 평가된다.
YTN 보도에 등장하는 춘천시 관계자는 “저희가 문안은 만들어서 전문가 자문 받아서 이제 감수 중이에요”라고 말했다. 전문가의 자문을 받은 결과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엉뚱한 안내문이다. 친일파 민영휘와 관련된 가옥에 ‘강원도 전통 가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건축물이다’라는 안내 문구가 들어간 것은 생뚱맞다.
그를 “조선 후기 관료이자 정치인”이라고 평가한 것도 마찬가지다. 그는 1910년 국권 침탈 이후로도 25년을 더 살았다. 만 58세 때 망국을 경험한 그는 나머지 25년을 은퇴자로 생활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도 그의 공적 인생에서 중요한 시기였다.
그의 경우에는 망국(亡國)이 망신(亡身)이 아니었다. 망국과 관계없이 그의 일신은 망하지 않았다. 그는 후반부 25년 역시 활력적으로 살았고 그 활력은 일본제국주의의 한국 지배를 지원하는 데 바쳐졌다. 이런 그의 인생을 ‘조선 후기’에만 국한해 평가하는 안내판을 전문가 감수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완용보다 더 한 매국
민영휘는 명성황후 민씨의 일족인 여흥 민(閔)씨라서 민족(閔族)의 일원으로 불렸다. 이 가문은 1873년에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실각한 뒤 명성황후와 고종 임금의 후원 하에 세도 가문으로 성장했다. 민영휘가 출사한 시점은 민족(閔族)이 전성기를 구가하게 됐을 때였다. 1877년에 과거에 급제한 그는 관직 경력뿐 아니라 친일단체 경력과 기업인 경력도 왕성하게 쌓아나갔다.
그가 구한말 격동기에 일본의 한국 침략에 적극 가담했다는 점은 수상 경력에서도 잘 나타난다. 1907년에는 일본 왕세자(황태자)의 한국 방문에 협조한 공로로 ‘일본 황태자 도한(渡韓) 기념장’을 몸에 차고 다닐 자격을 승인받았다.
1910년에는 일본으로부터 귀족 작위인 자작을 받았다. 1911년에는 은사공채를 받고 1912년에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일본 정부로부터 금배·은배도 받고 조선총독으로부터 표창장도 받았다.
무엇보다 일본의 국책 금융기관으로부터 경제적 특혜를 많이 받았다. 2011년에 나온 변광석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전임연구원의 <우리 역사 속 부정부패 스캔들>은 “민영휘와 그의 아들들이 일제의 국책 금융기관으로부터 경제적 특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조선총독부의 경제정책에 맞추어 시기별로 미간지 개척, 토지 개량과 산미증식, 군수기업 투자 등에 앞장서서 노력한 덕분이었다”라고 설명한다.
1877년 과거급제 이후 민영휘의 경력은 ‘빽빽하다’고 해야 할 정도다.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그가 역임한 각종 경력을 정리해 보니 A4 용지의 절반 정도나 됐다. 관직 명칭만 적어도 그 정도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초반의 혼란기에 ‘빽빽한’ 경력을 유지했다는 것은 그가 시대 흐름 또는 시세에 ‘유연하게’ 적응했음을 의미한다.
구한말 격동기는 일본의 간섭이 가장 심했을 뿐 아니라 청나라나 러시아의 간섭도 가장 심했다. 그런 변화에 잘 적응했기에 ‘빽빽’이란 표현이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역사 속 부정부패 스캔들>에 “1884년에 있은 김옥균 등이 주도한 갑신정변을 진압한 공로로 3년 뒤에 평안감사가 됐다”라는 문장이 있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에는 “같은 해(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5월 조선에 있던 청국의 위안스카이에게 군대 파병을 요청했다”라는 문장이 있다. 청나라의 영향력이 가장 강했던 1882~1894년 시기에는 청나라 편에 서서 김옥균 진압과 동학군 진압에 힘을 실어줬던 것이다.
고종은 인척인 그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1905년에 민영휘의 휘(徽)와 한자가 같은 휘문의숙이라는 교명을 하사했다. 이런 인연으로 그가 만든 교육기관에는 ‘휘문’이란 이름들이 들어갔다.
그렇게 개인적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도 그는 고종을 철저히 배신했다. 친일파나 매국노로서뿐 아니라 탐관오리로서도 그랬다.
일제강점기 후반에는 화신백화점 박흥식이 조선 최고 부자로 불렸지만, 초반에는 민영휘가 그렇게 불렸다. 변광석 책은 “민영휘는 김성수·최창학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조선의 3대 재벌로 꼽힌 인물이었다”라며 “당시 조선에서 첫째 치는 부자가 누구냐 하면 어른 아이 할 것이 없이 이구동성으로 민영휘라 대답을 했다고 한다”라고 설명한다.
전문적인 기업인이나 전문적인 대지주도 아니고 샐러리맨인 공직자가 그만한 재산을 축적한 것은 관직과 가문을 배경으로 부정축재를 지나치게 많이 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백성들의 재산에도 많이 손을 댔다. 전형적인 탐관오리였던 것이다. 위 책에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로 민영휘와 그 일가가 받은 재산반환소송의 목록을 제시하는 대목이 있다. 그 목록만 해도 한 장 반이나 된다.
1905~1910년에 소송이 많이 제기된 것을 보면, 피해자들이 대한제국이 몰락하는 기회를 활용해 민영휘와의 법정 투쟁에 돌입했음을 알 수 있다. 대한제국이 약해지고 있으므로 그 관료인 민영휘를 상대로 싸우기 쉬우리라는 계산이 작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승승장구가 대한제국 몰락 이후에도 계속되리라는 점을 충분히 예측하지 못한 측면도 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상고사> 저자인 신채호의 역사소설 <꿈하늘>에 각 시대의 대표적 매국노를 열거하는 대목이 나온다. 대한제국 부분에서는 “대한 말일의 민영휘·이완용 같은 무리가 이것이다”라는 문장이 있다.
신채호는 독립투사이자 역사학자인 동시에 유학자였다. 성균관 유생 출신이자 성균관 교원인 성균관박사 출신이다. 다른 분야 학자들도 그렇지만 유학자들은 용어나 단어 배치에 특히 민감했다. 이완용보다 민영휘를 먼저 언급한 것은 민영휘의 매국이 이완용에 뒤지지 않는다는 판단에서였다고 볼 수 있다. 친일파로서뿐 아니라 탐관오리로서도 당대 정상급 반열에 들었던 민영휘의 면모를 신채호의 역사소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과오는 이 정도로 그치지 않는다. 단군왕검과 태조 이성계는 물론이고, 일왕의 조상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함께 받드는 신궁봉경회의 고문 역할도 했다. 단군과 일본 신을 함께 모시기까지 했던 것이다. 또 친일 유교 단체인 대동사문회에서도 회장으로 활동했다. 문화·종교 부문에서도 한민족의 얼을 훼손했던 것이다.
이 정도 친일파라면 무덤 묘막에 ‘친일파’ 표기를 해두는 것을 과하다고 하기는 힘들 것이다. 무덤을 훼손하는 것도 아니고 묘막을 훼손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친일행위를 표기해두는 정도의 일이다.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여흥 민씨 가문이 대승적 차원에서 받아들여야 한다.
<2022-04-03>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민성기 가옥 이상한 안내문… 여흥 민씨 가문 이래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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