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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일본군 군영 터로 들어가는 대통령 집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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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용산이라는 땅의 역사적 의미

▲ 대통령 집무실 용산 국방부 이전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가운데 7일 오후 서울 용산 국방부 내부에 보안문서 파쇄 차량이 이동하고 있다. ⓒ 연합뉴스

서울 용산 국방부 자리가 대통령 관저로 적절하지 않다는 이의 제기들이 나오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용산 이전을 공식화한 직후인 3월 22일에는 용산구 향토사학자인 김천수씨의 연구 결과가 언론에 소개됐다.

그날 발행된 <한겨레> 기사 ‘윤석열이 찜한 용산 언덕, 원래 공동묘지였다’는 “국방부 부지 자락 언덕은 사방이 무덤 자리”였다고 보도했다. 일본이 군사기지를 조성하면서 공동묘지를 없애버린 지역에 대통령 관저가 들어가게 됐다는 것이다.

국방부 자리는 총독관저 터와 500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이에 대한 황평우 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과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의 이의제기도 있었다.

4월 8일 자 <한겨레 21> ‘일제 총독관저만 찾아다니는 한국 대통령실’은 윤 당선자의 집무실 이전은 나중에 지어진 총독관저 터(지금의 청와대)에서 먼저 지어진 총독관저 터의 인근(지금의 국방부)으로 옮겨가는 식이라면서 “한마디로 몰역사적인 결정이다”(황평우), “용산이 일제의 강점과 관계가 깊다는 점에 대해 고려가 없었다”(이순우)는 등의 지적을 소개했다.

두 개의 총독관저

총독관저는 이원화돼 있었다. 1910년 한국 강점 당시의 관저는 서울지하철 4호선 명동역과 회현역 사이의 왜성대(倭城臺)에 있었다. 지금 이곳은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일대다.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도 조성돼 있다.

왜성대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 주둔지였다고 해서 생긴 명칭이다. 송호열 서원대 교수의 <한국의 지명 변천>에 따르면, 이곳은 조선군 무예 훈련장이 있었다고 해서 예장(藝場)이나 예장골로 불렸던 곳이다. 일본 기업의 조선 진출이 활발할 때인 1885년 이후로 왜성대·왜장터로도 불리다가 1914년부터 일본식 지명인 왜성대정(町)으로 불리게 됐다.

남산 밑의 총독관저가 북악산 밑인 청와대 자리로 옮겨진 것은 1939년이다. 이 이전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1926년에 총독부 신청사가 경복궁 안에 지어진 이후로 ‘관저도 이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다. 또 일본인들로 인해 번영한 남산 밑 진고개 일대가 포화 상태에 도달했다는 점과 더불어 이곳이 남산 남쪽이 아닌 북쪽이라 햇빛이 잘 들지 않는다는 점도 고려됐다.

1935년 5월 5일 자 <동아일보> 2면은 머지않아 총독관저(총감관저)가 경복궁으로 가게 될 것이라면서 “남한 밑 진고개가 각 관청과 관사의 중심지로 되어 찬란한 상가도 거기서 발달되어 왓는데 이제는 거기도 역시 포화 상태에 빠저 발전의 수래바퀴는 다시 북촌으로 자리를 옴기게 되엇다”라고 말한다.

그런 뒤 “남산 밑 일대는 옛날 총감부(總監府) 시대에 활동 지역으로 지금은 여러 가지로 협착함을 느끼게 되고 태양도 잘 들어오지 안는 곳이니 모든 활동의 무대를 북촌으로 옴기는 문제가 나오게 되엇는데 총감은 이에 대하야 그러케 될 것이라는 언명을 하엿다”라고 말한다.

▲ 조선총독부 건물.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로 철거되었다. ⓒ 자료사진

이렇게 해서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세워진 총독관저는 미군정과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에도 사용됐다. 1993년 8월 12일 자 <경향신문> 1면 좌단 기사는 “김영삼 대통령은 11일 일제시대 총독부 총독관사로 지어져 해방 후 초대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13대 노태우 대통령에 이르기까지의 역대 대통령의 집무실과 관저로 사용되어온 청와대 구본관 건물을 철거하라고 박관용 비서실장에게 지시했다”라고 보도했다.

이 보도가 나간 날인 12일 저녁 8시, 김영삼 대통령은 금융실명제 전격 실시에 관한 긴급명령을 발포했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긴급명령 하루 전에 총독관저였던 청와대 옛 본관의 철거를 지시했던 것이다.

총독관저는 남산 밑에서 북악산 밑으로 이동했지만, 이것이 유일한 총독관저는 아니었다.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이후에 일본 군사도시가 형성된 용산 땅에도 총독관저가 있었다. 일명 ‘아방궁’으로 불린 제2의 총독관저다.

위의 이순우 연구원이 쓴 <용산, 빼앗긴 이방인들의 땅> 제1권은 “그 위치는 지금의 용산미군기지 안에 포함된 곳으로 서울 용산역과 국립중앙박물관의 중간쯤이었으며, 일제 때의 지번으로는 한강통 11-43번지에 해당하는 지점이었다”라고 한 뒤 일왕(천황) 생일인 천장절 축하 파티를 포함해 중요 연회들이 여기서 열렸다고 말한다.

‘용산 아방궁’에서 동북쪽 500미터인 국방부 청사로 대통령 집무실이 이전하는 것을 두고 위의 <한겨레 21>은 1939년 총독관저에서 1910년 총독관저로 이사하는 꼴이 됐다고 비판했다. 남산 관저가 있을 때도 용산 관저가 사용됐기 때문에 이런 비판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일제 식민지 청산도 제대로 못한 채

일제강점기인 1927년에 나온 <용산 시가도>를 보면, 서울역 남쪽인 남영역에서 그 아래인 용산역까지 대규모 군영이 조성돼 있었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지금의 국방부가 있는 자리에는 보병 부대와 군인 숙소 등이 있었다. 주변에도 온통 일본군 군사시설이었다. 용산 총독관저와의 거리를 재지 않더라도 이곳 전체가 일본군 군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 관저가 일본군 군영 터로 들어가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를 따져보는 것은 필요하다. 일반적인 정부 청사도 아니고 대한민국의 중심 건물이 하필이면 일본군 군영 터로 들어가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겠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전쟁이 벌어지면 궁궐을 비롯한 적국의 근거지를 파괴하는 일이 잦았다. 이는 그런 장소가 적국의 정신적 구심점이자 상징적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역시 대한제국 궁궐들을 부분적으로 파괴하거나 아니면 동물원으로 개조했다.

총독관저는 이미 사라지고 없지만, 조선총독 지배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것은 지금도 한국 사회를 괴롭히고 있다. 그때 당한 상처와 피해가 치유되지 않아, 위안부와 강제징용에 관한 소송들이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이는 총독관저나 일본군 군영이 외형적으로는 없어졌지만, 우리 한국인들의 마음속에서는 그것들이 여전히 우뚝 서 있음을 의미한다. 일제 지배 및 친일의 청산을 통해 우리 마음속의 총독관저와 일본군 군영을 극복해야 할 이때에 대통령 관저가 그쪽으로 간다고 하니 이의제기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 용산 일대 자리했던 일본 부대 전경 ⓒ 서울기록원

사실, 민족문제의 관점을 적용하지 않더라도 일제의 용산 군사도시 건설에는 문제가 많았다. 그것은 대규모 용산 철거 사태를 수반하면서 한국 민중의 터전을 빼앗는 과정이었다.

<용산, 빼앗긴 이방인들의 땅> 제1권은 “당초 이 지역을 대상으로 일본 측이 징발을 요구한 면적은 무려 300만 평에 달할 정도로 대규모였다”라면서 300만 평 중에서 134만 평은 한국 정부에 반납됐다고 한 뒤, “한국 정부에 되돌려졌다고 알려진 곳 역시 상당수는 일본인들에게 불하 처리되면서 일본 군영지의 배후 공간으로 자리매김되었다”라고 설명한다. 결과적으로 300만 평 전체를 빼앗긴 셈이 된 것이다.

일제가 300만 평을 차지하는 과정은 용산 주민들이 피눈물을 쏟아내는 과정이었다. 이는 그들이 일본의 전쟁기지 구축을 위해 삶의 터전을 내주고 강제이주를 당하는 과정이었다.

위에 소개한 역사학자 김천수씨가 2014년에 <향토 서울> 제87호에 기고한 ‘일제시기 용산기지 형성 과정에 대한 기초 연구’는 “사단 증설 공사와 관련해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일본군이 대규모의 연병장을 만들기 위해 현 국립중앙박물관(용산구 용산동 6가)에 위치했던 둔지리 한인 마을과 그 일대의 토지 전답 등을 강제수용한 것이다”라며 “이로 인해 둔지리 마을 주민들은 1916년에 현재의 보광동으로 강제이주를 해야만 했다”라고 서술한다.

이 논문에 인용된 서울역사박물관의 <이태원 공간과 삶>에 따르면, 둔지리 인근인 보광리에는 1915년과 1916년에 23가구 714명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1917년에는 298가구 1659명으로 급증했다. 그랬다가 1918년에는 209가구 1625명으로 줄어들었다. 용산 둔지리에서 쫓겨나 보광리로 옮겨간 사람들의 숫자를 추정케 하는 자료다.

1917년에 298가구로 급증했다가 1918년에 209가구로 격감한 것은, 1917년에 보광리로 옮겨간 사람들이 그곳에서 안정적인 터전을 잡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임시로 지내다가 다른 데로 떠났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1917년에 비해 1918년의 가구 수가 29.9% 감소한 데 비해 인구는 0.2%만 감소한 것은 보광리에 잠깐 머물다가 다른 데로 떠난 사람들의 상당수가 가족이 없거나 적은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생활 기반이 상대적으로 더 취약한 사람들이 용산 철거 사태로 인해 더욱 큰 피해를 입었으리라는 생각을 품게 하는 대목이다. 김천수 논문은 “불법적으로 일제에 의해 토지와 가옥 등을 수용당한 용산 원주민들의 안타까운 역사는 여전히 묻혀 있을 것이다”라며 안타까움을 표한다.

용산은 주한일군기지가 세워지고 총독관저가 있었던 곳이다. 일제 식민지배의 중심부가 이곳에 있었다. 그에 더해 용산 철거 사태로 인해 수많은 한국인들이 피눈물을 흘린 곳이기도 하다. 민족적으로뿐만 아니라 민중적 차원에서도 한이 쌓이고 쌓인 곳이다.

일제 지배로 인한 부조리가 어느 정도라도 해소된 뒤에 대통령 관저가 그리로 이전한다면, 총독관저가 있었건 없었던 별다른 이의제기가 나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일제 지배로 인한 모순이 제대로 지워지지 않아 아직도 수요일마다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식민지배 청산을 외치는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대통령 관저가 주한일군기지 터로 들어간다고 하니 이의제기가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2022-04-12>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일본군 군영 터로 들어가는 대통령 집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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