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스스로 메시아가 되어야 할 시대의 유머리스트
연약한 사슴, 붓으로 검에 맞서다.
존경하는 한승헌 변호사님, 구순을 기어이 못 맞으시고 이렇게 황망히 우주 삼라만상의 순회에 드셨습니까.
작년 9월, 산민 한승헌 변호사 기념문집 <산민의 이름으로>(이지출판)를 펴내시면서 생의 마지막 잔치로 출판기념회를 고대하셨지만 코로나로 무산되면서 전화로 인사를 대신하셨지요. 건강 문제로 뵈올 기회가 드물어져 안타까웠지만 ‘두뇌와 입’은 지장이 없다시기에 전화로라도 “제발 그 재담 계속 들을 수 있기를 간절히 빈다”고 저는 썼지요. 문안 전화 때마다 유머를 날리시기에 버나드 쇼를 능가하는 재담으로 이 세상 더 즐겁게 만들다가 가시겠다면 저승사자도 양해할 거라니까, “그 잡귀가 혼자 돌아가기 심심해 꼭 나를 데려갈 거요.” 하신 게 저와의 마지막 통화였습니다.
55킬로그램 밴텀급 육신으로 그 많은 직함에 팔방미인으로 우리 시대의 모든 과업에 투신했지만 ‘한변’이란 애칭으로 통했던 분, 어떤 장중한 모임에서도 반드시 웃음의 명 펀치를 날려 좌중을 즐겁게 해주신 해학가에 휴머니스트, 율사란 본업 못지않게 온갖 잡사에 능하셨던 한승헌 변호사님.
무진장 3개 군 중간인 고향 진안을 ‘무주 구천동 옆 팔천동’으로 소개하시며, 아호 산민이 행여 빨치산이냐면, “변호사라서 운동이라면 석방운동”만 했다며, 한국의 헌법을 어긴다는 본명 때문에 두 번이나 옥고를 치르셨다던 분.
한국전쟁이 일어난 해에 고교생으로 시 창작을 하다가 대학생 때는 신석정 시인에게 격려까지 받았으나 약관 23세에 고시 8회 합격으로 서울지검에 근무 중 1965년부터 변호사를 본업 삼고 민주화에 전념한 생애는 널리 알려져 있지요.
그런데 검사와 변호사 초기였던 1960년대에 5·16 쿠데타 정권의 반역사성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한 두 권의 시집은 지금도 절박하게 다가옵니다. 현직 검사로 시화전과 첫 시집 <인간귀향>(1961)을 낸 데 이어 제2 시집 <노숙>(1967)에서 한승헌 시인은 우리 시대를 “검에 밀리던 붓”의 연대로 규정하고, 자신을 “목 메인 사슴마냥 / 어쩔 수 없이 준령과 맞서야 할” 처지라고 한탄했습니다. 사슴이 살았던 시대는 “주름진 조국의 차가운 겨울 / 빙하 29도 / 역사는 노천”에 떠는 동토의 계절로, “분 바른 식민지의 하늘에 / 태양은 슬프게 뜨고 진다”고 하셨죠.
절박해진 사슴은 “이제 목자는 없다 / 우리 스스로 메시아가 되는 것이다”라며, “그 붓으로 기어이 검 이겨내고자 / 어둠을 쪼개는 안간힘”으로, “제 몸 태워 어둠 밝히는 / 한 자루 촛불”로 승화시키려 합니다. 그래서 “내 땅의 평화와 민주와 / 그리고 하나 됨을 위하여 / 꽃이 꽃으로 피고 / 노래가 노래로 울려 퍼지는 / 그날을 찾아가는 발걸음 / 그대여 / 다시 떠나지 않으려는가. / 이 벅찬 역사의 나그네 길을…”이라고 채근합니다. 시인 한승헌에게 “산다는 것은 하나의 진실을 마련하는 일인가 / 그것은 외로운 작업 / 벅차고 눈물겨운 일”이었습니다.
이런 개탄이 어찌 1960년대만이겠습니까! 그 뒤에도 반복되는 우리 민족사 아닌가요?
엄청난 한변의 업적 중 김삿갓을 능가하는 해학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지요. “8·15해방 후의 대립과 혼란, 남북한의 전쟁, 장기집권, 군사독재, 저항과 투쟁 등 연속된 광풍 속에서 무슨 즐거움, 무슨 기쁨이 있었겠는가. 가난과 절망, 피폐와 탄압 따위의 불운한 팔자 속에 무슨 웃을 일이 있었겠는가”라면서 “대중에게 위로와 즐거움을 주는 것도 지식인의 한 사명”으로 여긴 데서 한변의 유머는 비롯했습니다.
아, 이제 어디서 웃을 일을 찾지요?
저희 민족문제연구소에 주신 소중한 자료 소원하신대로 널리 활용하겠습니다.
한변님, 지극히 사적인 모임으로 언론자유를 맘껏 누렸던 ‘으악새’와 ‘개판모임’의 저승 선배들(리영희, 장을병, 박현채, 윤현, 김상현 등)에게 여기서와 똑같은 유머로 이승의 못다 푼 한을 달래며 편히 쉬시기 빕니다. 안녕히…!
<2022-04-22> 경향신문
☞기사원문: 한승헌 변호사님 영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