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기사

[SBS꼬꼬무] 분노와 슬픔의 역사 ‘군함도’…”강제노역 없었다”는 일본의 두 얼굴

1149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21일 방송된 ‘꼬꼬무-1943 지옥의 문, 콩깻묵과 검은 다이아몬드’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송영규, 이이경, 개그우먼 이은형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전국에서 일어난 연쇄 소년 실종사건

때는 1943년 1월, 전라북도 익산에 살던 15세 최장섭 군. 가난한 농부의 막내아들이었는데, 공부를 열심히 해서 우등상을 놓친 적이 없는 소년이야. 장섭이가 집에 있던 어느 날, 마을 면사무소 직원 윤씨가 찾아왔어. 다짜고짜 따라오라 하는 윤씨의 말에 장섭이는 영문도 모르고 일단 따라나섰어. 장섭이가 군청에서 만난 군수는 장섭이를 훑어보더니 “얘는 너무 어린 거 아닌가?”라고 말했어. 그러자 윤씨는 “거기는 어릴수록 좋다”라며 알 수 없는 말을 했어.

장섭이 외에도, 어떤 아이는 동네 이장님이 불러서, 어떤 아이는 형사가 오라고 해서, 그렇게 아이들은 어른들의 부름에 잡혀 왔어. 아이들을 한 방에 가두고 밖에서 문을 잠갔어. 연쇄적인 소년 납치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거야. 아이들은 이 부름에 거부하면 부모가 괴롭힘을 당하거나, 가족에게 돌아갈 배급을 끊어버린다는 협박에 따라 나설 수밖에 없었어.

다음날, 장섭이는 익산역에서 기차에 올랐어. 그 기차에 탄 같은 처지의 사람들은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몰랐어. 기차가 집 근처 역에 들어섰을 때, 장섭이는 저 멀리 승강장에서 치마저고리를 입고 애타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여인을 발견했어. 아들이 끌려간다는 소식을 듣고 역에 나온 어머니와 여동생이었어. 어머니는 장섭이를 발견하고는 “무사히 돌아오라”면서 가는 길에 배곯지 말라고 인절미를 건넸어. 그 인절미를 손에 들고, 장섭이는 막막한 마음으로 고향을 떠났어.

▲ ‘영광의 문’으로 들어가고, 비극이 시작됐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부산항. 갑자기 일본인 한 명이 나타나서 “이제 너희들은 일본으로 간다”며 일본에 가서 기술도 배우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다고 했어. 그렇게 아이들은 배를 타고 부산항을 출발해 일본에 도착했고, 다시 기차를 타고 배를 타며 며칠이나 이동했어. 그러다 저 멀리 뭔가가 보이기 시작해. 바다 한가운데에 떠있는, 을씨년스러운 섬이었어. 섬은 회색 옹벽으로 전체가 둘러싸여 있고, 안에는 고층 아파트가 빼곡히 세워져 있었어. 이 섬의 이름은 ‘단도’, 일본어로는 ‘하시마’. 선착장 앞에 좁은 입구에는 ‘영광의 문’이라는 네 글자가 적혀 있었어. 이들에게 어떤 ‘영광’이 기다리고 있던 걸까.

섬 내부로 들어가자 난생처음 보는 풍경이 펼쳐졌어. 낮은 건 4층, 높은 건 10층이나 되는 고층 아파트가 즐비했고, 병원, 학교, 경찰서, 극장, 심지어 파친코까지 있었어. 사람도 엄청 많았어. 야구장 두 개 정도의 넓이인 이 작은 섬에 한때 5천명이 넘게 살았다고 해. 인구밀도는 도쿄의 무려 9배나 됐대.

시대를 앞서간 이 최첨단 도시에서, 장섭이를 포함한 조선인들이 안내받은 숙소는, 9층짜리 아파트 제일 아래 위치한 반지하 방이었어. 퀴퀴한 지하 냄새가 풍겼고, 대낮인데도 빛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어. 섬 가장자리에 있는 반지하라, 파도가 높으면 바닷물이 숙소 안으로 들어와 바닥은 질퍽거렸어. 이런 열악한 조건의 방 한 칸을 조선인 40~50명이 같이 쓰는 거야. 그럼 일본인들은 어디 살았냐고? 그 위였지. 일본인 노동자는 아파트 중간층, 일본인 관리자는 아파트 로열층에 살았어. 가장 낮은 곳부터 가장 높은 곳까지, 철저하게 신분에 따라 나눠 놓은 거야.

다음날 아침, 집합하라는 소리에 밖으로 나간 장섭이는 ‘6105번’이라는 번호를 받았어. 앞으로는 이름이 아닌 그 번호로 부르겠대. 그리고 헤드랜턴과 안전모를 착용시키더니 승강기와 수레를 태워 지하 수백 미터 아래로 데려갔어. 허리조차 펼 수 없는, 높이 50~70cm 정도의 낮은 굴에서 사람들이 석탄을 캐고 있었어. 앞서 면사무소 윤씨가 “어릴수록 좋다”고 했던 말이 이제야 이해가 갔어. 비좁은 탄광에서 일하려면 작은 체구의 아이들이 필요했던 거야.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군함같이 생긴 섬. 누구나 한 번쯤 이름을 들어봤을 섬. 일본이 조선인을 강제로 데려가 고된 노역을 시킨 아픈 역사 속 그 섬. 그래, 맞아. 바로 ‘군함도’ 이야기야.

▲ 고된 노역에 죽어나간 사람들, 쥐도 안 먹던 콩깻묵 주먹밥

군함도는 일본 굴지의 기업 미쓰비시가 통째로 사서 탄광사업을 운영했어. 여기 석탄의 질이 좋아서 ‘검은 다이아몬드’라 불렸대. 바다 위로 드러난 군함도는 빙산의 일각이었어. 그 아래 어마어마한 석탄층이 묻혀 있었는데, 그 맨 밑 지하 1000m 아래로 내려가서 가장 위험한 곳에서 가장 힘들게 석탄을 캐야 하는 건 조선인이었어.

갱도의 끝 부분 온도는 40도가 넘었고, 습도도 엄청 높아서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흘렀대. 그래서 속옷 하나만 달랑 입고 일했다고 해. 또 갱도 밖은 바다라, 천장에서 바닷물이 비오 듯 떨어져 그걸 계속 맞으니 소금기 때문에 살이 짓물렀어. 그러다 뭘 잘못 건드리면 가스가 터져 나오기도 하고. 그 위험한 곳에서 장섭이가 맡은 일은 ‘주땡’이라고, 석탄을 캐고 나면 생기는 빈 공간이 안 무너지게 돌이나 나무로 메우는 일이었어. 장섭이는 낙석에 맞아 머리가 깨지기도 했대.

장섭이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모두가 운이 좋았던 건 아니야. 일본의 한 시민단체가 군함도에서 발견한 ‘화장인허증’, 즉 군함도에서 사망한 조선인들을 화장한 기록을 보면 사망 인원이 적혀있는데 태반이 압사, 질식사, 익사, 폭발사고였어. 1925년부터 1945년까지, 이곳 군함도에서만 조선인이 122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돼. 이마저도 전체가 아닌, 일부의 숫자야.

위험을 무릅쓰고 하는 고된 일보다 더 힘든 건 ‘배고픔’이었어. 조선인에게는 하루에 콩깻묵으로 만든 주먹밥 세 덩이가 돌아갔어. 콩깻묵은 콩에서 기름을 짜내고 남은 찌꺼기로, 가축의 사료나 비료 따위로 쓰는 재료야. 거기에 현미를 조금 섞어 주먹밥을 만든 거야. 그 주먹밥은 돌아다니던 쥐도 먹지 않으려 했대. 근데 조선인들은 안 먹으면 죽으니까, 그거라도 먹으며 끼니를 때웠어.

군함도에서 탈출하려다가 잡혀온 조선인은 일본인 감독관에게 가죽 채찍으로 짐승처럼 맞았어. 군함도에서 살아서 나갈 방법은 딱 하나. 다리를 자르는 거야. 그러면 쓸모가 없어지니까 섬에서 쫓겨난대. 그래서 갱도 안에 오가던 수레바퀴 밑에 일부러 다리를 집어넣는 사람들이 있었대. 여기서 일하면서 지내는 것보다 차라리 그렇게 해서라도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간절한 마음. 군함도 입구에 쓰여 있던 ‘영광의 문’을 당시 조선인들은 ‘지옥의 문’이라 불렀대. 이런 지옥은 군함도뿐만이 아니었어. 일본에만 강제노역장이 약 4300곳이 있었고, 그렇게 끌려온 조선인이 무려 102만명에 이르렀다고 해.

▲ 드디어 맞은 해방, 하지만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당시 일본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으로 일본인들이 전쟁터에 나가 일손이 부족하자 국가총동원법을 만들어 조선인을 닥치는 대로 끌고 가 노역을 시켰어. 그럼, 돈은 제대로 줬을까?

홋카이도 탄광에 끌려갔던 한 조선인의 급여명세서가 공개됐어. 급여는 임금과 공제금으로 나뉘어 있는데, 임금이 총 31원 60전인 반면 공제금은 37원 2전이었어. 임금에서 공제금을 빼면 마이너스, 일을 할수록 빚이 더 늘어나는 구조야. 강제노역에 다녀오신 분들 중에 월급을 제대로 받았단 분들이 거의 없어.

지옥 같은 군함도에서 버티던 장섭이는 17세가 됐어. 1945년 어느 날, 번쩍하는 섬광이 하늘을 뒤덮었어. 군함도에서 가까운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거야. 그리고 며칠 후 일본인 관리자가 조선인들을 불러 모아 “일본제국은 전쟁에서 패하고 항복을 선언했다. 이제 여러분 모두는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말했어.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해방을 맞은 거야.

다들 고향에 돌아갈 생각에 들떴어. 그런데 기다리고 기다리던 배를 타고 도착한 곳은 조선이 아닌, 원폭 피해를 입은 나가사키였어. 군함도에서 벗어나자 이번엔 조선인들에게 그곳의 복구작업을 시킨 거야. 아무런 보호장비도 없이 말이야. 조선인들은 복구작업을 하며 먹을 것을 발견하면, 방사능에 오염됐을지도 모르는 그걸 먹었어. 지난 세월 콩깻묵밥만 먹었기에, 굶주림이 방사능을 이긴 거야.

해방 3개월 후, 그제야 일본인들이 배를 내줬는데, 통통배 3척이었어. 통통배로 험한 바다를 건너는 건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지만, 사람들은 주저 없이 그 배에 올랐어. 일본의 한 시민단체가 기록한 내용에 이런 문구가 있대. “1945년 9월, 조선 사람들이 탄 귀국선이 때마침 덮쳐온 태풍의 거친 파도에 전복되어 많은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었다”, “미쓰비시 조선소의 대형 크레인 부근에 엄청난 수의 조선인 익사체가 떠올랐다.”

장섭이는 무사히 귀국을 했어. 무려 3년 만에. 고향집에 도착해 꿈에도 그리던 어머니와 아버지를 만났어. 그런데 아버지 손이 엄지 밖에 안 보여. 나머지 손가락 네 개가 잘렸어. 아버지도 장섭이처럼, 끌려갔다 오신 거야. 아버지는 장섭이가 군함도에 강제징용됐던 시기에, 아오지 탄광에 끌려가서 탄차를 밀다가 손이 끼어서 네 손가락을 잃으셨다고 해. 손가락을 잃은 아버지는 평생 지어오던 농사를 더는 지을 수 없게 됐어.

장섭이네처럼 일본이 강제동원한 조선인은 총 782만명으로 추정돼. 중복 인원을 포함했다고 해도 엄청난 숫자야. 돈이 없고 힘이 없는 사람들이 끌려가서 우리나라, 일본, 사할린, 남태평양, 동남아시아 등에서 고된 노역에 시달렸어. 죽고 다친 사람들도 굉장히 많아. 마땅히 사과하고 책임질 건 책임져야 하는데, 과연 일본은 그랬을까?

▲ 군함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

2015년 일본은 군함도가 자랑스러운 산업화의 유산이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신청했어. 우리나라는 거세게 반발했지. 유네스코도 “군함도의 전체 역사를 알 수 있도록 하라. 강제노역의 역사를 숨기지 마라”는 조건을 걸었어. 당시 일본 대표는 알겠다고 수락했고, 전 세계가 보는 앞에서 처음으로 강제동원, 강제노역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어. 이 약속을 믿은 유네스코는 군함도의 세계유산 등재를 결정했어. 그런데 일본 정부는 단 하루 만에 말을 바꿨어. 자신들이 말한 의미는 ‘강제로 일했다’가 아니라 그냥 ‘일하게 됐다’는 뜻이었대.

그 후 군함도는 유명한 관광지가 됐어. 일본에서 군함도를 소개하는 안내지에는 “누가 역사를 날조하고 있는가”, “군함도는 지옥섬이 아니다”, “강제동원 강제노역 없었다”는 글이 적혀있어. 심지어, “군함도에 살았던 사람들은 의식주를 함께 한 하나의 탄광 커뮤니티였으며 가족처럼 살았다”는 내용도 있어. 한국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거야.

평생의 상처를 인정은 고사하고 부정당한 피해자들은 군함도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직접 나섰어. 14세에 군함도에 끌려갔던 서정우 씨는 수십 년이 지나 다시 군함도를 찾는 장면을 찍은 다큐를 만들었어. 장섭이, 이젠 할아버지가 된 최장섭 씨는 군함도의 경험을 담은 자서록을 쓰기 시작했어. 꺼내기 싫은 기억이지만 잊히지 않기 위해,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썼어. 그리고 최장섭 할아버지는 지난 2018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어.

최장섭 할아버지는 생전에 항상 하시던 말씀이 있었대. “다시는 우리 후대 자손들에게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역사는 옳게 써야 한다. 오직 눈물로써 우리 후손들에게 바라는 것은 역사를 올바르게 잡아달라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마지막 소원이다.”

군함도 같은 사건이 지금 또 일어나고 있어. 최근 일본이 사도광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고 움직이고 있어. 일제강점기 1200여 명의 조선인을 강제징용해 노역을 시킨 곳이야. 수많은 조선인의 아픔이 서려있는 곳, 이곳에서 강제노역이 있었다는 걸 일본은 또 인정하지 않고 있어. 일본은 “한일합병은 합법적으로 이뤄졌고 당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였다. 고로, 조선인을 동원한 건 합법적이다”라고 주장하고 있어.

장두노미(藏頭露尾), ‘머리는 숨어도 꼬리는 드러나 있다’는 사자성어야. 진실은 아무리 숨기려 해도 결국 드러난다는 의미지. 일본은 몸통이 다 드러나 있는데, 머리만 숨긴 채 모르쇠하고 있어. 하지만 분명한 건, 진실은 언젠가 드러난다는 거야. 역사는 거짓말을 못하는 법이니까.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어때?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2022-04-22> SBS연예뉴스

☞기사원문: [꼬꼬무 찐리뷰] 분노와 슬픔의 역사 ‘군함도’…”강제노역 없었다”는 일본의 두 얼굴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