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자료 톺아보기]
사진엽서에 새겨진 친일파와 대한제국의 몰락
• 강동민 자료팀장
일본 황태자 한국방문기념엽서 東宮殿下御渡韓紀念
1907년 10월 16일부터 10월 20일까지 일본 황태자(후일다이쇼)가 한국 ‘시찰’을 목적으로 대한제국을 방문하자이를 기념해 발행한 엽서. 이 ‘시찰’은 통감 이토가 한국내의 반일 정서를 완화시키고 황태자 이은李垠의 일본유학을 성사시켜 볼모로 데려가기 위해 기획되었다. 일장기와 태극기를 배경으로 한국통감 이토히로부미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의 사진이 대각으로 배치되어 있다. ‘을사늑약’, ‘정미조약’ 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의 위세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일한합방기념’엽서, 이완용과 역대 통감
‘한국병합’을 기념하기 위해 일제가 발행한 사진엽서. ‘욱일旭日’을 상징하는 배경 그림에 역대 한국통감과 ‘병합’의 일등 공신인 이완용의 사진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이완용은 ‘을사늑약’부터 ‘병합조약’ 체결까지 적극 가담하여 대한제국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특히 ‘병합조약’은 총리대신 이완용이 조약안을 순종에게 보이고 각 조항을 설명한 후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없이 가결되는 형식이었는데, 이 조약안은
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이미 7월 말부터 이완용을 앞세워 내각 전원의 동의를 얻도록 공작을 벌인 결과물이었다.
‘일한합방기념’엽서, 송병준과 데라우치 마사타케 통감
송병준은 친일단체 일진회가 조직될 때 핵심 인물로 총재를 지냈다. 일진회는 대한제국기 대표적인 친일단체로 일본의 조선통치를 적극 지지하고 친일 여론을 환기시키며 나아가 친일정부를 구성하여 일제의 조선지배 정책 수행에 협조할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송병준은 이완용 내각에서 농상공부대신을 지내면서 헤이그특사 사건과 관련하여 고종에게 일본에 사죄하도록 강요하는 한편 고종의 강제 퇴위에 앞장섰다. 또한 1907년 정미조약에 동조하여 일본이 주는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았다.
엽서에서 송병준은 벚꽃을 배경으로 식민지 조선의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와 나란히 배치되어
한국‘병합’에 ‘지대한 공’이 있었음을 가늠하게 해준다
‘일한합방기념’엽서, 메이지와 한국황제
사진엽서는 특정한 정치적 사건이나 경축할 만한 특정한 날을 기념해 주는 상품으로 주로 국가
적 행사나 정책을 선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이 대한제국의 ‘병합’을 선포한 결정적인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각종 기관과 단체에서 다양한 사진엽서를 발행하였다. 일본과 대한제국의 국토를 같은 색으로 새기고 두 나라의 최고 통치자인 메이지 ‘천황’과 순종을 나란히 배치하여 ‘일본과 조선이 하나가 되었다’고 선전하였다.
‘일한합방기념’엽서, 메이지, 고종과 순종
상단에 메이지 ‘천황’을, 하단에 고종과 순종을 배치하여 지배 관계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모습이다. 식민지 조선의 고종 황제는 덕수궁에 유폐되어 ‘덕수궁 이태왕 전하’로, 창덕궁에 유폐된 순종은 ‘창덕
궁 이왕 전하’로, 일본에 볼모로 잡혀 있던 황태자는 ‘왕세자 이은 전하’로 불리게 되었다.
‘조선총독부시정기념’엽서, 영친왕과 일본 황태자
국가 상징도안 속에 영친왕 이은과 일본 황태자 요시히토를 나란히 배치하고, 아래에는 매일전보 제1호외, ‘일한병합조약정문日韓倂合條約正文’을 실었다. ‘1910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시정기념’ 직인이 찍혀 있다. 일본 황태자 요시히토는 메이지 사망 후 다이쇼大正 ‘천황’이 되었고, 영친왕 이은은 순종 사망 후 ‘창덕궁 이왕 전하’가 되어 왕실의 명맥은 유지했지만 조선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