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소개공지(疎開空地), 미군 공습에 기겁한 일제의 방어수단 결국 패망 직전 서울의 도시공간을 할퀴어 놓다

1665

[식민지 비망록]

소개공지(疎開空地), 미군 공습에 기겁한 일제의 방어수단
결국 패망 직전 서울의 도시공간을 할퀴어 놓다

이순우 책임연구원

 

벌써 40년도 더 넘은 시절의 얘기지만 시골촌놈이 어찌어찌 대학에 붙어 난생 처음 상경하면서 서울 큰고모댁에 신세를 지게 되었는데, 그때 어리숙한 친정조카의 도회지 생활이 많이 걱정되셨는지 신학기 초에 큰고모께서 이런 말씀을 귀띔해주신 기억이 또렷하다. “야야, 서울에서 길을 익힐라카믄 일단 종로가 한가운데 있고, 그 아래로 청계천로―을지로―충무로―퇴계로의 순서대로 있으니까 그것만 잘 기억해도 길찾기에 많이 도움이 될끼다. 그라고 서쪽부터 1가, 2가, 3가, 이렇게 나간데이 ―.” 아니나 다를까 큰고모님의 ‘꿀팁’은 그 이후 서울살이의 실전에 많은 보탬이 되었다. 더구나 세월이 흐르고 흘러 본디 서울내기 근처도 못가는 그 시골촌놈이 되려 서울의 옛길이나 역사공간에 대해 이런저런 글도 곧잘 쓰고 더러 현지답사의 길잡이노릇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모든 것이 기초 오리엔테이션을 잘 받은 덕분이 아닌가도 싶다.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서울도심의 ‘씨줄’을 이루는 동서방향의 대로에 대해서는 일제 때 ‘소화통(昭和通)’으로 뚫린 ‘퇴계로’ 정도를 제외하면 대개 조선시대부터 존재했던 옛길이 확장 개편된 것이므로 그 유래를 확인하는 일이 어렵지는 않는 편이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날줄’을 이루며 남북방향으로 놓인 간선도로의 경우에는 언제 그 길이 생겨났는지를 확인하는 일조차 그리 간단치가 않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의 고지도를 살펴보면 서울 도성 안쪽으로 광통교를 넘나드는 남대문로의 경우라든가 육조앞길이나 동구내(洞口內, 동구안)처럼 각 궁궐 대문 앞으로 연결된 남북방향의 직선도로가 없지 않았으나 보통은 종로와의 접점을 이루는 곳까지만 그러한 길이 이어져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아래로는 불규칙하게 설치된 청계천 돌다리의 자리에 맞춰 그곳을 가로질러 동남쪽 방향으로 비스듬하게 흘러내리는 형태의 통행로만 존재했던 것이다.
실제로 근대시기 이전까지는 서울이라는 도시 전체를 남북으로 관통하거나, 더구나 바둑판처럼 격자(格子) 모양의 일직선으로 개설되어 있던 도로구조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알고 보니 서울 도심에 구축된 세로방향 대로들은 대개 그 유래가 일제의 소행과 맞닿아 있는 것이 압도적이었다.
우선 세종로의 연장선처럼 여기는 태평통(太平通, 지금의 태평로)이 뚫린 것은 1913년의 일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서울의 중심부를 꿰뚫듯이 창덕궁 쪽에서 신설 ‘콘크리트’ 교량인 청계천 관수교(觀水橋)를 지나 남산 아래 필동 경무총감부(警務總監部, 헌병대사령부) 앞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돈화문통(敦化門通, 지금의 돈화문로)이 조성된 것 역시 1918년에 와서야 이뤄진 일이었다.

<조선총독부관보> 1912년 11월 6일자에 수록된 「경성시구개수 예정계획노선도」이다. 이와 같이 일제는 식민지배 초창기부터 기존의 도로망에 크게 구애되지 않고 방사선형과 바둑판형을 섞어 놓은 새로운 가로체계를 진즉에 계획하고 있었다.

 

일찍이 일제가 식민지의 수도인 경성(京城)에 그들 나름의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도로망을 구축하려는 시도를 대외적으로 처음 공표한 것은 <조선총독부관보> 1912년 6월 12일자에 수록된 ‘조선총독부 고시 제78호’ 「경성시구개수예정계획노선표(京城市區改修豫定計劃路線表)」였다. 여기에는 기존의 도로망에 크게 구애되지 않고 서울 도성 안쪽으로 직각형과 방사선 형태를 섞어 완전히 새로운 도로들로 엮어놓은 기본계획이 망라되어 있었다.
이들 계획도로 가운데에 가로 방향은 옛길과 일치하는 곳이 대다수였으므로 지속적으로 개수 또는 확장공사가 이뤄졌으나, 세로 방향의 경우에는 기존의 주거지역들을 수용하여 이를 헐어내고 완전히 새로운 길을 내야 하는 곳이 태반이었으므로 그 사정이 현저히 달랐다. 이 때문에 일제강점기가 다 지나도록 미완성이거나 착공조차 이뤄지지 못한 채로 남겨진 곳도 많았다.
그런데 이것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일제의 패망을 불과 넉 달 앞둔 시점에 경성의 중심부는 물론이고 주변 시가지를 대상으로 공간 구성이 전면적으로 뒤바뀌는 조치가 내려진 흔적이 확연히 눈에 띈다. <조선총독부관보> 1945년 4월 7일자 및 4월 19일자에 잇달아 게재된 조선총독부 고시(제196호와 제225호) 「방공법(防空法) 제5조의 5 제2항의 규정에 의한 소개공지대(疎開空地帶) 지정」이 바로 그것이었다.

경성소개공지대(京城疎開空地帶) 지구 지정 목록

(✽) 자료출처 : <조선총독부관보> 1945년 4월 7일자, 「총독부고시 제196호」 및 <조선총독부관보> 1945년 4월 19일자, 「총독부고시 제225호」에서 ‘경성’ 관련 부분 발췌인용

<매일신보> 1937년 10월 29일자에는 전차(電車)를 비롯한 거의 모든 수송 차량에 대해 방공용(防空用) ‘육군색(陸軍色, 카키색)’으로 일괄 개칠한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총독부관보> 1945년 4월 14일자에 수록된 ‘조선총독부 고시 제208호’ 「방공법 제5조의 5 제1항의 규정에 따라 동법 시행규칙 제5조를 적용하는 구역(건축규제구역)」을 통해 경기도 경성부, 경상남도 부산부, 평안남도 평양부 일대가 대상지역으로 지정되었다. 곧이어 그해 6월 20일에는 대전, 목포, 여수, 대구, 마산, 겸이포, 진남포, 신의주, 함흥, 원산, 흥남, 청진, 성진 등지로 확대 적용되기에 이른다.
일찍이 일제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으로 이어지는 침략전쟁을 가속화하면서 적기(敵機)의 출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나름의 대응책으로 방공연습(防空演習)이라는 훈련을 주기적으로 실시한 바 있고, 건물 외벽의 색깔은 물론이고 전차(電車)와 자동차 등 수송차량에 도색을 방공용(防空用)의 ‘육군색(陸軍色, 카키색)’으로 바꿔 칠하도록 조치한 일도 있었다. 더구나 1937년 4월 2일에는 법률 제47호 「방공법(防空法)」이 제정되어 이와 관련한 대비는 착착 진행되고 있는 상태였다. 참고로, 이 법률에서 말하는 ‘방공’의 개념은 이렇게 정의되었다.

제1조(第一條) 본법(本法)에 있어서 방공(防空)이라는 칭(稱)하는 것은 전시(戰時) 또는 사변(事變)에 당하여항공기(航空機)의 내습(來襲)으로 인해 생기는 위해(危害)를 방지(防止)하고 또는 이로 인한 피해(被害)를 경감(輕減)하기 위해 육해군(陸海軍)이 행(行)하는 방위(防衛)에 즉응(則應)하여 육해군 이외(以外)의 자(者)가 행하는 등화관제(燈火管制), 소방(消防), 방독(防毒), 피난(避難) 및 구호(救護)와 이것들과 관련해 필요한 감시(監視), 통신(通信) 및 경보(警報)를 …… 말한다.

1945년 3월 10일의 도쿄 대공습(東京大空襲) 사실을 알리는 일본 대본영(大本營)의 발표 내용이다. 이를 계기로 패망 직전의 일제는 긴급히 소개정책(疎開政策)의 추진에 박차를 가하였다. (<매일신보> 1945년 3월 11일자)

 

<매일신보> 1943년 4월 13일자에 수록된 광고 한 토막에는 흥미롭게도 “일본 본토 상공에서 공습하리라는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폭언’에 주눅이 들지 말되 그것을 경시하지 말고 잘 대응하자”는 취지의 문안에 담겨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일제가 패망으로 가는 막바지에 이른바 ‘소개공지(疎開空地)’라는 비상조치를 서둘러 취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1945년 3월 10일에 단행된 미군기(美軍機)의 도쿄대공습(東京大空襲)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 일본 대본영(大本營)에서 직접 발표한 내용에는 당시의 상황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금(今) 3월 10일 영시(零時)부터 2시 40분 사이에 B29 약(約) 130기(機)는 주력(主力)으로써 제도(帝都, 도쿄)에 내습(來襲)하여 시가지(市街地)를 맹폭(盲爆)하였다. 우(右) 맹폭(盲爆)에 의(依)하여 도내 각처(都內 各處)에 화재(火災)가 일어났으나 궁내성 주마료(宮內省 主馬寮)는 2시 35분, 기타(其他)는 8시 경(頃)까지에 진화(鎭火)되었다. 현재(現在)까지 판명(判明)된 전과(戰果)는 다음과 같다.
격추(擊追) 15기(機), 손해(損害)를 준 것 약(約) 50기(機).

 

미군의 공습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사흘이 지난 3월 13일 밤 11시 30분부터 약 3시간에 걸쳐 B29 폭격기 약 90대가 동원되어 오사카 지구(大阪地區)에도 거세게 퍼부어졌다. 이에 따라 도쿄와 오사카 지역의 시가지 일대는 잿더미가 되다시피 큰 타격을 입게 되었고, 이러한 일본 본토에 대한 미군기의 직접 공격에 기겁을 한 일제는 부랴부랴 소개정책(疎開政策)을 시행하는 것으로 급선회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매일신보> 1945년 3월 15일자에 수록된 「본토결전(本土決戰)을 각오(覺悟), 요원외(要員外)는 소개(疎開)하라, 공습하(空襲下)의 전투배치강화(戰鬪配置强化)」 제하의 기사는 이러한 본토공습에 대한 대비책으로 소개정책의 긴급성을 이렇게 설파하고 있다.

 

적의 본토공습은 확실히 본격적으로 들어섰는 모양이다. 단기결전을 초려하는 적은 대뜸 내지 본토를 노리고 상륙작전까지 감히 행하려는 눈치가 최근에 보이면서 우리나라의 전력의 파쇠와 전의상실을 목표로 주요도시에 ‘야간맹폭’을 계속하기 시작하였다. 적이 아무리 많은 폭탄과 소이탄을 가지고서 본토 주요지를 초토화한다 하더라도 이로써 전쟁이 곧 어떻게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때를 기다려서는 일격으로서 적을 섬멸시키고 말 준비와 각오를 우리 1억 국민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전력을 증강시키며 최후까지 싸우기 위하여서는 싸우는 준비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조선도 B29의 정찰은 이미 십수 회에 이르렀다. 언제 어떠한 모양으로 그 악마 같은 B29가 우리 머리 위에 맹폭을 할는지 모른다. 과연 우리는 잘 싸울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있는가?
적기의 정찰이 있을 적마다 우리는 방공자재를 챙견하고 또는 방공호를 다시 살피는 등 많은 훈련을 쌓아왔다. 이제 누구의 지시를 기다려서 등화관제를 잘하라든가 방공호를 파야겠다는 것은 너무도 얼빠진 일이라. 아직까지 적이 투탄을 하지 않고서 정찰만으로서 달아났기 때문에 혹은 대수롭게 생각지 않을 수도 없었으며 공습의 처참한 경험을 맛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제라도 주저치 말고서 냉정히 우리의 주위를 살피고 언제든지 한 전투원으로 싸울 수 있는 태세를 갖추어야 하겠다. 이번 제도(帝都) 도쿄(東京)에 대하여 적의 야간맹폭은 우리의 통분을 한층 더 폭발시키고도 남는 바 있거니와 다시 돌이켜 생각하면 좀 더 소개(疎開)를 철저히 하지 않았든가 하는 느낌을 갖게 한다. 소개는 도피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전력을 증강시키는 한 수단이다. (하략).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에서도 불요불급한 학동(學童)들과 부녀자(婦女子)를 비롯하여 필수요원이 아닌 도시인력들을 중심으로 교외지역 또는 농촌 연고지 등으로 서둘러 분산 소개토록 독려하는 한편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경성을 비롯한 주요 대도시에 소개공지(疎開空地)를 지정하는 조치를 내리게 된다. 이것은 적기공습에 따라 도심지가 전소(全燒)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일종의 방화대(防火帶, 방화띠) 역할을 담당하는 공간인 셈이다.

<경성일보> 1945년 8월 11일자에 수록된 ‘남해 망운산 기슭에 추락한 미군 비행기의 잔해’ 사진과 관련보도이다. 이처럼 일제의 패망시점에 이를수록 식민지 조선에도 미군기의 실제 공습 사례가 점차 가시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울 지역의 경우에 이들 가운데 특히 세 군데 구역이 눈에 띄는데, (1) 종로 5정목~서사헌정(西四軒町, 지금의 장충동 2가) 노선, (2) 종묘(宗廟)~대화정(大和町, 지금의 필동) 노선, (3) 경운정(慶雲町, 지금의 경운동)~남산정(南山町, 지금의 남산동) 노선이 그것들이다. 이들 지역에 대해서는 소개공지의 지정과 더불어 신속히 건물철거공사가 개시되었으며, <매일신보> 1945년 5월 13일자에 수록된 「필승(必勝)의 무장(武裝)에 진발(進發), 소개건물제각(疎開建物除却)

 

<매일신보> 1945년 5월 11일자에는 공습에 대비한 소개공지(疎開空地)의 지정에 따라 건물철거공사가 본격개시된 사실을 알리는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패망을 불과 석 달 앞둔 시점이었으나 그만큼 미군기의 공습 가능성은 그 자체가 공포감의 원천으로 받아들여지기에 충분했다

 

<매일신보> 1945년 6월 8일자에는 글자 그대로 ‘공터’로 변한 소개공지가 엉뚱하게도 애국반원들에 의해 푸성귀를 가꾸는 이른바 ‘일평농원(一坪農園)’으로 탈바꿈되고 있는 장면이 소개되어 있다. 뒤에 보이는 대문의 모습으로 보아 이곳은 종묘(宗廟)의 바로 앞쪽인 듯하다.

 

철벽 같은 방위도시를 이룩하기 위한 경성부의 건물소개는 드디어 11일 부내 세 곳 공사구에 집을 허는 공작대의 출동으로 시작되었다. 건설을 앞둔 파괴 …… 오랫동안 정든 이웃을 떠나고 대대로 경영해오던 가게를 싸우는 도시건설을 위하여 깨끗이 내놓고 아무런 미련도 없이 선뜻 집을 헐어내는 것이다. 그간 자기 손으로 헐어낸 집 이외에 제일차 지정이 된 곳으로 아직 헐지 않은 집에 대하여 11일부터 일제히 공작대가 출동한 것이다. 11일 오전 8시 제1구공사사무소에서는 명치정(明治町) 불란서교회에서, 제2구공사사무소에서는 파고다공원에서, 제3공사사무소에서는 남대문(南大門)국민학교에서 각각 집 허는 작업에 동원된 학도를 약 2천 명의 수입식(受入式)을 거행하고 이어서 집을 허는 현장에서는 각 경찰서 별로 특별공작대가 동원되어 우선 빈집부터 질서 있게 헐어내기 시작하였다. 헐어낸 집의 헌 재목 등은 학도들의 수고로 그 자리에서 정리 운반되어 첫날의 집 허는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러한 첫날의 제각공사로 중구에서 종로구(鍾路區)로 뻗치는 〇〇지대는 폭이 40‘메돌’로부터 50‘메돌’의 훤한 방공공지가 생기었다. 이리하여 언제 있을지 모르는 적의 맹폭에 대비하여 부내 곳곳에선 건설을 위한 적전 파괴의 쇠뭉치 소리가 힘 있게 울렸고 한편 학도작업대들의 기운찬 모습이 소개 이삿짐의 구루마와 함께 씩씩하게 적을 격멸할 의기도 드높은 중에 이날의 제각공사는 완전히 끝났다.(사진은 집 헐어내는 현장)

 

그런데 정작 이렇게 서둘러 헐어낸 자리는 애당초 도로개설의 목적도 아니었고 그냥 빈터로 놀려두기는 뭐했는지, 느닷없이 이른바 ‘일평농원(一坪農園)’이라는 이름의 자투리 채소밭으로 활용되곤 했다. 그리고 서울 도처에 방공호(防空壕)가 급조되고, 총독부박물관과 도서관이나 이왕가미술관이 폐쇄되는 한편 이곳에 소장된 보물 문화재와 중요 도서들이 안전지대로 긴급 소개된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또한 백의(白衣, 흰옷)를 입는 경우에 기총소사(機銃掃射)의 표적이 되기쉽다 하여 이를 금지하고 유달리 색의(色衣)를 착용할 것을 독려하기도 했다.

 

적기(敵機, 미군기)의 표적이 되기 쉬우므로 백의(白衣)를 벗을 것을 강조하는 내용이 담긴 <매일신
보> 1945년 7월 21일자의 보도내용이다.

 

또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사실은 이러한 소개정책의 추진과 동시에 도회지의 축견(畜犬)을 완전히 박멸시켰다는 대목이다. 이에 관해서는 <매일신보> 1945년 3월 23일자에 수록된 「도시축견(都市畜犬)을 박살(撲殺), 공습(空襲)에 대비(對備) 각도(各道)로 시달(示達)」 제하의 기사를 통해 그 이유를 엿볼 수 있다.

 

공습이 있을 때는 그 폭격에 놀래어 개(犬)가 발광하여 가지고 일반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구주(歐洲) 각 도시를 비롯하여 최근에는 제도(帝都, 도쿄)와 각 주요도시의 공습에서 경험되었다. 조선도 적기가 반드시 공습을 조만간에 행할 것은 뻔한 일이므로 총독부 농상국장은 20일부로 각 도지사에 통첩을 띄워 주요도시의 각 가정에서 기르는 개를 오는 4월 15일까지 전부 조치할 것을 지시하였다. 종래에도 도시에서는 야견(野犬)을 조치하여 왔지만 이번에는 군용개(軍用犬)만 제외하고는 각 가정에 두고 기르는 개라도 경성, 평양, 부산 등 16개 부(府) 도시에서는 일제히 박살 혹은 늑살하여 그 모피는 군용으로 공출하게 한다. 농촌은 제외하므로 그대로 기를 수 있으나 지정된 16개 도시의 주변 부락민은 야견 축견을 구별치 않고 전부 조치하며 이것은 각도에서 지정한 기관이 맡아서 사전에 개를 기르는 주인에게 이 취지를 잘 알리고 박살 또는 늑살하기로 되었으므로 각 가정에서는 금후 공습이 있는 경우에 개로 하여금 해를 입지 않고 또는 일반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이에 협력할 것이다.

이들과 아울러 창경원 동물원에 있던 맹수(猛獸)의 처지도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전시체제하에서 먹이공급이 원활하지 못하기도 하였거니와 혹여 공습이 벌어지는 와중에 우리를 탈출한다면 큰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이유로 이들 역시 전부 독살 처분되었다고 알려진다.

 

<국사편찬위원회 수집 사진자료 1>(2016)에는 해방 직후 미군정찰기가 담아낸 서울시가지 사진(1945년 9월 8일 촬영)이 수록되어 있는데, 오른쪽 중간 부분에 “종묘 앞~대화정 2정목(지금의 필동 2가) 구간”의 소개공지 일부가 살짝 드러나 있다. 오늘날 세운상가(世運商街, 1967년 개관)가 자리하고 있는 바로 그 지역이다. (ⓒ국사편찬위원회)

 

<동아일보> 1967년 7월 24일자에 게재된 ‘세운상가 아파트’의 개관 안내 광고이다. 해방 이후 한때 무질서한 피난민촌 밀집지역이기도 했던 이곳은 하필이면 일제가 패망을 넉 달 앞두고 미군공습에 기겁하여 긴급하게 조성한 ‘소개공지(疎開空地)’를 터전으로 삼아 건립한 구조물이다.

 

언젠가 어느 대학교 박물관의 소장자료 몇 점을 우연히 구경할 기회가 있었는데, 거기에 일제패망 직후인 1945년 9월 9일에 미군 정찰기에 의해 포착된 서울 시가지 항공사진 하나가 포함되어 있었다. 창덕궁 돈화문 앞에서 명동성당 일대에 이르기까지 서울 중심부의 전경이 두루 포착된 장면 속에서 가만히 보아하니 교동국민학교 남쪽에서 탑골공원 옆을 지나 청계천을 건너고 명동성당 후면의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원 옆으로 불규칙한 폭의 공터가 길게 이어진 것이 퍼뜩 눈에 띄었다.
처음엔 무슨 공사를 벌이다만 듯이 잔뜩 헤집어 놓기 만한 그것이 뭔지 의아했으나 나중에 전시체제기의 막바지에 미군공습에 대비하기 위해 고안했던 소개공지(疎開空地)의 존재를 이해하고 나서야 이 사진의 남다른 사료적 가치에 고스란히 주목할 수 있었다. 좀 더 세월이 흘러 이곳은 남북방향의 간선도로로 변신하였고, 더구나 길 이름마저 ‘삼일로(三一路)’라는 근사한 명칭이 붙게 되었으니 되려 그 바람에 패망 직전 일제가 이 땅에 저질러 놓은 도시공간의 훼손 내력을 읽어낼 여지는 안타깝게도 별로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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