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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경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 단장에게서 동학·천도교 정신의 현재적 의미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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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최인경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 단장에게서

동학·천도교 정신의 현재적 의미를 듣는다

인터뷰 : 이용창 연구실장

 

올해는 손병희 선생이 돌아가신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고, 또 손병희선생의 생애에 대한 역사적인 무게도 있기에 적지 않은 행사들이 여기저기서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3·1혁명으로 옥고를 치르다 병으로 출옥하셨고 곧바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독립운동사 쪽으로 보면 ‘순국’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하고, 천도교단에서는 ‘순도’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어쨌든 교단이 아니라면 좀 더 다른 특정한 용어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또 하나 ‘동학’이 1905년 12월 1일에 ‘천도교’로 개칭했다는 점에 착안하여 관
련 용어를 천도교로 통일하여 사용하였다.
연구소에서는 이와 같은 역사적 의미를 되살려보자는 취지에서 지난 4월 14일,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 최인경 단장을 모시고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연구소가 준비하고 있는 ‘손병희 선생 순국 100주년 특별 전시’와 강연 등을 비롯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나누어볼 수 있었다.

● 100년 전 1922년은 임술년이더라고요. 5월 19일이 천도교 제3세 교조 의암 손병희(1861∼1922) 선생이 돌아가신 날입니다. 100년 후인 올해 2022년은 임인년, ‘검은호랑이 해’라고 합니다. 동양에서는 간지를 써왔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여러 가지 희망을 담아 덕담을 이야기하기도 하는데요. 검은 호랑이는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복을 가져다주는 영험한 동물이라고 합니다. 이런 기운이 천도교단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뻗쳤으면 합니다.
손병희 선생은 3·1혁명으로 ‘보안법·출판법 위반’으로 2년간 옥고를 치르고 석방 후 상춘원에서 요양 중에 돌아가셨습니다. 올해 100주년을 맞이해서 관련 행사가 적지 않을 텐데요. 민족문제연구소가 위탁을 맡아 운영하는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에서도 특별 전시회와 강연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곳 일대는 3·1혁명의 발원지인 봉황각과 손병희 선생을 비롯한 순국선열들의 묘역, 그리고 국립 4·19민주묘지가 있는 독립정신과 민주주의의 성지입니다. 봉황각은 1911년에 손병희 선생이 천도교인의 신앙수련과 독립운동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세운 곳이기도 합니다.
단장님은 천도교 제2세 교주 해월 최시형(1827∼1898) 선생의 고손자이십니다. 또한 최시형 선생의 아들로 독립유공자(건국훈장 애국장)이신 최동희(1890∼1927) 선생의 증손자이기도 합니다. 천도교단의 정통을 잇고 있는 젊은(?) 교역자로서 천도교와 관련해 정말 많은 일을 하고 계십니다. 가계를 좀 더 보면 증조부 최동희 선생이 손병희 선생의 외조카이시고요, 또 최동희 선생의 부인께서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신 홍병기(1869∼1949) 선생의 누이동생이십니다. 또한 최시형 선생의 2남이시자 최동희 선생의 동생인 최동호(1897∼1923) 선생도 독립유공자로 애족장을 받으셨는데, 최동호 선생의 부인은 <동학사(東學史)>의 저자이신 오지영(1868∼1950) 선생의 따님이십니다. 그러니까 당시 천도교단의 원로들과 혈연으로 맺어진 그런 집안으로 알고 있습니다. 손병희 선생에 대해서도 남다른 생각이 드실 텐데요. 순국 100주년을 맞이하는 소회가 어떠신지 말씀해 주시죠.

○ 소회라기보다 어떤, 좀 생각해볼 것 들이랄까요. 전통적으로 100주년, 200주년 이런 것에 상당히 의미 부여를 하고, 그분들의 정신과 생애를 잘 선양하고 또 이어받고자 하는 노력을 할 텐데 마음만큼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저희 교단 차원에서도 여러 가지로 아쉬운 점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도 근현대사기념관이나 민족문제연구소가 손병희 선생에 대해 관심을 가져 주시고, 전시회와 특강을 하신다니 우선 감사를 드리고요.
어쨌든 손병희 선생에 대해서도 조금 덜 알려졌다고 할까요. 독립운동가로서 3·1혁명을 기획하고 준비하셨던 부분뿐만 아니라 동학혁명의 지도자였다는 부분도 우리 일반 시민들에게는 잘 안알려져 있거든요. 1894년부터 3·1혁명까지 20∼30년 정도 되잖아요. 그러니까 거의 동시대 사건일 수 있고. 그런데 묘하게도 독립운동과 동학혁명과의 상호 연관성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점이 조금 아쉽습니다. 그래서 올해 제가 준비하고자 하는 것도 그런 쪽에 초점이 많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 정신 자체가 어떤 시대와 사건에 따라서 단절되는 것이 아니고 계속 이어져오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죠.

● 조금 전에 하신 말씀하고 관련이 있는 이야기를 좀 더 여쭈면, 사실 1894년의 동학과 1919년의 3·1혁명이 결국은 하나의 커다란 줄기가 이어지는 것인데, 말씀하신 것처럼 예컨대 손병희 선생만 하더라도 3·1혁명의 지도자, 독립운동가 이렇게만 알려져 있고, 아시는 분들 외에는 동학과의 관련을 잘 모르잖아요. 그걸 어떻게 보면 교단의 용어가 변경된 그런 것들 때문에 일반인들은 굉장히 헛갈리시거든요. 그때는 아 그런가 하더라도 실제로 ‘동학’ 이야기하고 ‘천도교’ 이야기를 따로 하면 별개로 인식합니다. 동학과 천도교의 역사적인 독특성이 있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 동학은 동학대로 선양하고, 3·1혁명은 3·1혁명대로 별개로 해왔던 게 많잖아요.

○ 여러 상황이 있겠지만 동학이 천도교로 바뀌면서 천도교와 동학은 굉장히 별도의 조직인 것마냥, 제가 판단했을 때는 사회적인 흐름이라든가 하는 측면에서 분리 작업이 진행되어 있지 않았나. 물론 천도교인들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동학이 곧 천도교이고 천도교가 동학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지만, 사회적으로 보면 그랬던 것같지 않아요. 최근에 충남 논산에서 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가 발족했는데 그 과정에서 전봉준(1855∼1895) 장군의 노선을 쫓아가다 보니까 동학과 연관이 있고, 또 지역에서 자료를 찾다 보니까 손병희 선생과 관련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2차 봉기는 최시형 선생이 총 기포를 지시하고 손병희 선생에게 통령기를 주면서 전봉준 장군과 연합하게 하거든요. 그래서 논산에서 전봉준 장군과 손병희 통령이 만납니다. 그리고 서로 간에 전봉준 장군이 형님, 손병희 선생이 동생해서 그 예를 갖추고 또 연합부대 1만여 명을 만들어서 거기에서 우금치로 가는 상황이 나오거든요. 그래서 손병희 선생도 많은 전투를 겪습니다.
실제로 그런 상황들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고 있죠. 그런데 동학혁명에 참여한 독립운동가 중에 3·1혁명 ‘민족대표 33인’의 천도교인 열다섯 분 중에 아홉 분이 동학혁명에 직접 참여한 지도자입니다. 이런 측면에서도 동학혁명과 3·1혁명과의 상호 연관성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상황이거든요. 하지만 제가 3·1혁명 100주년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공동 자료집을 만들 때 총괄 간사로 일을 하는데 많은 분들이 독립운동가와 동학운동의 관련성을 떨어뜨리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건 아닌 것 같다. 자료의 제공이라는 게 관련 연구에 관련된 것들을 하는 것인데, 그래서 많은 논의 끝에 동학혁명에 참여했던 ‘민족대표’들의 자료를 많이 수집해서 언급했습니다. 보통 헌법 전문에 3·1혁명 정정신, 법통을 계승한다…… 대충 이렇게 나오잖아요. 그러면 그 3·1 혁명 정신은 또 무엇을 바탕으로 하고 있느냐. 물론 온 민족의 염원을 담아서 3·1혁명이 이루어졌지만 그 사상적인 배경에는 이제 동학혁명 정신이 있다, 또는 통합 정신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단히 중요한 인식의 전환점이 될 수 있죠. 제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 단장으로서 전국의 동학단체를 찾아가면 정말 의외로 상당히 많은 분들이 동학혁명과 3·1혁명과의 연관성을 모르고 있고…… 실제로 학계에서도 그 연관성에 관한 그렇게 논문이 거의 없다시피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그런 면에서 굉장히 아쉬웠습니다.

● 제가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고조부가 최시형 선생이시고, 증조부가 최동희 선생과 최동호 선생이시고. 이세 분 이야기를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서 소개를 좀 해 주시죠.

○ 저희 증조부이신 소수 최동희 선생은 일제시기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셨던 분이고요. 3·1혁명 이후에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이 국외 지역으로 많이 가서 활동하잖아요. 심지어는 3·1혁명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1920년을 ‘독립전쟁의 해’로 선포하고, 실제로 봉오동과 청산리 등지에서 많은 크고작은 전쟁·전투가 일어났습니다. 최동희 선생도 처음에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천도교 중심인 고려혁명위원회를 조직(1922.7)해서 부위원장 겸 외교부장으로 활동했습니다.
당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 덕창국이라는 한약방이 있었습니다. 이곳은 대한노인동맹단 단장을 했던 김치보(1859∼1941) 선생이 운영하면서 많은 교류가 이뤄지던 곳인데, 그쪽으로 건너가서 많은 분들과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을 하셨고, 결정적으로 레닌과 최초로 접촉해서 논쟁하고 그 이상(理想) 체제라든가 서로 간에 그런 내용들이 맞지 않았죠. 1926년에는 중국 지린이라는 곳에서 고려혁명당을 조직(4.5)하고 중앙위원으로 독립투쟁을 전개하시다가 폐병이 악화돼 1927년에 돌아가십니다. 사실은 이제 의형제라고 제가 들었어요. 김규식 박사 아시죠. 그분 댁에서 치료하다가 마지막에 상하이 적십자병원에서 사망한 것으로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1990년에 건국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요. 동생인 최동호 할아버지는 3·1혁명에 직접 참여하셨습니다. 이러한 행적으로서 포상이 되셨는데, 힘이 굉장히 장사였다고 그래요. 당시에 상춘원에서 무슨 연예가 벌어지고 하면 그 보통 그런 연예장에 큰 돌 석상이 있잖아요. 그런 거한 번에 번쩍 들었을 정도로 힘이 장사하던 분인데. 지금 서대문형무소에 수감기록카드를 보면 아주 말라 있는 상태예요. 옥고를 치르고 나오신 건데 또 폐에 물이 차서 결국 앓다가 돌아가셨습니다.
형님인 최동희 선생을 쫓아서 해외로 가려고도 했었어요. 그래서 장인이었던 오지영 선생이 집안에 돈이 있있으시니까 독립자금을 만들기 위해서 강도로 위장해서 그걸 한번 털어서 가려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옥고도 치르시고. 그래서 그 일화를 보면 부인이 오순순이라는 분이셨는데, 그 오순순 할머니께서 옥살이 한 사람들에게는 사람의 피와 살을 먹여야 된다, 그래서 피를 직접 내 가지고 치료에 임하셨다고도 해요. 하지만 결국은 오래 견디지 못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둘째 최동호 증조부는 최시형 선생께서 돌아가시기 직전, 그러니까 1년 전인 1897년이겠네요. 그해에 태어났습니다. 여주 전거론이라는 곳에서. 굉장히 늦게 본 아드님이어서 많이 귀여워하셨다고 합니다. 그런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 해외와 국내를 오가면서 여러 가지 논의를 하셨을 테고. 손병희 선생은 교주이기는 하지만 독자적으로 교단활동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폭넓은 것을 하기에는 입지가 어려웠을 거고, 항상 일제의 감시를 받기도 했겠지요. 세대가 바뀌면서 교단을 정비하고 개혁하는 것과 관련해서도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고,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셔야 했을 텐데. 손병희 선생은 연세도 많이 드셨고, 거기에 비해서 젊은 조카는 개혁적이고.

○ 돌아가신 최익환 할아버지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들인데, 사실 최동희 증조부는 일본 와세다 대학 법대를 다니면서 사회주의 이론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하셨다고 그래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천도교의 많은 사람들이 일본에 가서, 손병희 선생이 망명했을 때 많이 유학을 시킵니다. 그 당시 일본에서 공부했던 사람들이 아무래도 생각이 좀 달랐겠죠. 손병희 선생이 일본에 망명해 있으면서 세력 분화의 조짐이 있기도 했습니다. 
국내에서 대동회·중립회·진보회 등 민회가 조직되고, 한편에서는 동학의 정신을 지키려는 세력들이 있어서 갈등하는. 그래서 손병희 선생이 일본에서 천도교로 개칭을 했다는 측면도 있었거든요. 권동진·오세창 선생뿐만 아니라 나중에 친일파로 변절하는 최린·정광조(의암의 사위) 등이 천도교회의 주요 직책을 맡게 됩니다. 1910년대를 지나면서 변화를 주도했던 최동희 선생 등은, 천도교가 너무 자본주의에 물들어가고 있고, 적어도 교단은 시천주(侍天主)를 밝히는 곳이어야 하는데 국민들 또는 백성들을 계몽의 대상으로만 보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죠. 그런 면에서도 상당히 반감을 갖게 되었고. 게다가 손병희 선생이 활동하시는 영역에 대해서, 예를 들면 과도하게 비용을 사용하지 않는가 하는, 그런 것에 대해서도 의문점을 갖고 계셨죠. 특히 열렬하게 비판했던 것은 중앙집권화를 지방분권으로 하고, 그다음에 이 교단에 직제를 갖고 있는 사람들도 모두 월급을 다 똑같이하자, 그런 사회주의 이론에 기반한 주장들을 많이 했어요. 최동희라는 분이. 그래서 손병희 선생은 그런 말들이 나오니까 굉장히 불편했겠죠.
그런데 뜻이 조금 다른 사람들이라도 항상 공존하기 마련이고 실제로 그렇게 움직였었는데, 지금 학계에서는 조카인 최동희 선생이 삼촌인 손병희 선생에 대해 비난만 한 것으로 되어 있더라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3·1혁명 이후 손병희 선생의 부인 주옥경 사모님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바라지를 하는 모습을 보고, 또 여러 가지 상황을 겪으면서 국외로 가기 전에 손병희 선생을 찾아가서 이제 스승님이나 외삼촌을 떠나서 교단의 지도자로서 인정을 하겠다, 그리고 이에 대한 소회를 어머니한테 편지로 남기고 만주로 떠나시거든요.

● 네. 학술적으로 논문을 쓸 때는 그런 거를 다 풀어서 쓸 수가 없으니까. 노선이나 이런 걸 하다 보니까 대립하는 구도로만 비춰지기도 하는데. 아시는 분들은 그 뒷얘기들을 대부분이 아시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관계 설정이나 이런 것들이 좀 더 치밀하게 폭넓게 진행되면 좋겠습니다.

○ 지금 최동희 선생에 관련된 것도 사실은, 저희 천도교단 내에서 아주 철저한 반공주의 논리로 몰아가는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신인간사(新人間社) 기자로 있을 때인데, 최동희 선생에 관한 논문이나 이런 것을 싣고자 했을 때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이런 걸 왜 싣느냐 해서 결국은 싣지 못했습니다. 그런 정도로 아직도 대립적인 관계에 있는 세력들도 있고 그런 것이 굉장히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교단 역사에서 최동희 선생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거의 거론되지 않았어요.
감히 조카인 최동희가 삼촌인 손병희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 논리에 의한 것이죠. 그리고 이후에는 반공주의 세력 때문에 오히려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라는 그런 핍박을 받으면서 거론조차 안 했습니다.

● 적어도 이번에 회보 <민족사랑>을 받아보시는 연구소 후원 회원 분들은, 밖에 나가서도 정확하게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겠죠.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이 올해 손병희 선생 순국 100주년을 맞이해서 전시회 준비를 하고 있고, 거기에 단장님께서 자문위원으로 도움을 주고 계십니다. 물론 다른 분들도 계시지만 어쨌든 교단 측과 직접 일을 하고 계시기 때문에 연구소로서는 굉장히 큰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전시회가 풍부해지려면 어떤 점에 중점을 둬야 할까요.

○ 손병희 선생 관련 부분이 중심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이제 손병희 선생이 동학혁명에서 했었던 역할이 덜 알려져 있고, 또 일본에서의 활동도 구체적으로 정리가 많이 안 되어 있어서 여기에 중점을 두는 게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래도 손병희 선생의 유물이라든가 이런 것들은 교단 내에서 많이 보존하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합니다만, 좀 더 풍부해지려면 동학경전 등 저작물을 풍부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동경대전>을 비롯한 <최선생문집도원기서>, <해월선생문집>, 또 <용담유사> 등이 있지 않습니까. 최시형 선생이 최제우 선생으로부터 명을 받아 그 책들을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 출간하고. 그래서 저는 현재까지 발견된 것들과 그다음에 천도교 시대에 경전으로서 발간되었던 것들을 모두 전시해 놓으면 또 하나의 가치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지방에서 어떠한 교재를 가지고 가르쳤는지, 당시 천도교 교리강습소는 교리뿐만 아니라 물리·수학 그런 것들을 다 가르쳤거든요. 그런 것까지 함께 전시하면 내용이 좀 더 풍부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갖고 있습니다.

● 말씀하신 것처럼 손병희 선생은 3·1혁명만 걸려 있는 게 아니라 그 뿌리는 천도교단, 그 앞의 동학혁명과 직접 관련이 있고, 거기다 교주이셨기 때문에 동학·천도교의 핵심적인 것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경전, 거기에 후배 세대들을 가르치기 위한 교육을 위한 교재 이건 굉장히 중요한 전시물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 전시회는 일반인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거고 거기에는 남녀노소가 다 있을 텐데, 처음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동학과 천도교의 관계가 다른 게 아니라 하나다, 이것을 이 전시회를 통해서 좀 쉽고 명확하고 즉자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자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그래서 지난 3·1혁명 100주년 때는 동학 관련 단체에서도 동학혁명에 참여한 독립운동가들 전시회를 별도로 가졌었거든요. 그것과 연관된 하나의 섹션도 좀 있으면 좋겠다 해서 제가 그 명단도 기념관에 알려 드렸습니다. 
그리고 손병희 선생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미시적 연구는 거의 없다고 보이거든요. 예를 들면 오세창 선생에 대해서도 골동품 수집가로서, 전형필 선생의 스승으로서 인식되고 있습니다만. 이런 분들의 사상은 무엇이고 그 배경은 무엇인지, 이런 것들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다고 봅니다. 특히 손병희 선생도 독립운동에 관한 행적이나 연구는 있는데 사상에 대한 연구는 많지않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손병희 선생의 사상은 불교를 기반으로 했다는 등 가벼운 해석들만 있고 실제로 이분이 <준비시대>나 <삼전론>, 또 <무체법경> 등 손병희 선생이 이야기한 사상적인 것들에 대한 부분은 일반인들이 거의 몰라요. 학계에서도 연구가 별로 없고. 이 또한 천도교 관련연구자들의 책임이기도 한데요. 물론 근래에는 손병희 선생의 사상과 철학 이렇게 해서 책이 한두 번 나오긴 하는데 좀 더 연구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 이번에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에서 전시회와 함께 특강도 준비하고 있는데요. 주제 중에 동학·천도교와 손병희 선생의 철학사상을 쉽게 대중 강연식으로 하는 기회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천도교 연구자로서 사상은 굉장히 어렵고요. 특히<천도교회월보>를 보면 글 쓰시는 분들이 모두 유학적인 소양이 있는 지식인들이라 굉장히 난해합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서로 다른 분야의 연구자들이 모여서 공동 연구도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단 차원에서도 여러 가지 관련 사업이 준비 중인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떤 것들이 있나요.

○ 올해 학술대회가 3개 정도 진행이 되는데 주제는 조금씩 다릅니다. 저희 사업단에서 준비하고 있는 주제는 이미 작년부터각 연구자들이 준비하고 있습니다. 의미 있는 것은, 손병희 선생이 마지막으로 거주하셨던 곳이 충남 당진이거든요. 작년에 당진시에서 ‘당진대도소’를 복원했습니다. ‘동학집강소’는 지금 김제에 ‘동학농민혁명 원평집강소’를 복원해 놨습니다. 당시 동록개라고 하는 노비가 김덕명(1845~1895) 장군에게 기증했던 곳인데, 그걸 복원한 것입니다.
제가 ‘당진대도소’ 담당자분들과 논의해서 그곳에서 학술회의를 진행하는 것으로 약속되어 있고요. 5월 19일은 동학학회에서 주관하는 다른 주제의 학술대회가 진행될 것 같습니다. 인내천운동연합이 주관하는 학술대회가 있고요. 이외에 손병희 선생에 대한 문화공연도 진행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작년부터 최시형 선생과 관련한 모든 유적지의 사진 작업을 하고, 또 피체 노정까지 다 작업을 했습니다. 그다음에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나 기존의 연구 자료 목록들을 모아서 <해월 최시형 연구자료집>을 만들었습니다. 작년에는 수운 최제우 선생에 대한 자료집도 냈습니다. 최제우 선생의 모든 유적지와 등록되어 있는 연구 목록이라든가 그런 것들을 소개하는 것이 하나 있고…… 올해는 손병희 선생에 대해서 작업하고 있습니다. 손병희 선생의 서울 지역 활동은 이제 다 정리가 되어가는 중이고요. 앞서 말씀대로 동학 시대의 행적은 현장 사진이라든가 이런 것들은 많지 않거든요. 그런 것도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 특히 수운 최제우, 해월 최시형 선생 두 분에 대해서는 기왕 이야기가 나온 김에 사업단에서 월간으로 <동학집강소>라는 잡지를 내시잖아요. 굉장히 재밌게 보고 감명을 계속 받습니다. 편집위원으로 계시고요. <동학집강소>에 관해 말씀해 주시지요.

○ <동학집강소>는 본래적 의미가 분명합니다. 동학 관련 지역과 단체 사람들의 소통에 관한 네트워크를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 <동학집강소>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저희가 직접 현장에 찾아갔어요. 예를 들면 전북의 정읍동학농민혁명기념관 앞에서 행사를 한다면 저희가 문화행사를 지원하기도 하고 자료 지원도 하고. 그렇게 하다 보니까 경북 영해 같은 곳에서도 동학영해기념사업회가 만들어지고 충남 논산 같은 데도 만들어지고. 이분들을 연결시켜 주고, 또 정부 지원 사업은 어떻게 받을 수 있는지, 어떤 효과적인 것이 있는지 등을 알려주고 지원해줬죠. 그래서 해당 지역에 대한 동학 순례길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만들고 소통할 수 있도록 그런역할을 해주는 일을 했었는데 코로나 상황에서 현장에서 진행되는 모든 행사가 중단됐어요.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그러면 소통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동학 관련 잡지를 만들어 보자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정읍이나 고창에서 발행되는 <사발통문>이나 <녹두꽃> 등의 잡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주로 그 지역 행사에 관련해 소개하는 간단한 소식지에 불과했거든요. 그래서 저희는 동학에 대해 어떻게하면 쉽게 전달해 드릴 수 있을까, 그런 것에 많이 중점을 두었습니다. 월간 <동학집강소>는 대학교 주요 도서관에 다 들어가고 있고요. 또 교도소에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전국의 교도소가 이번에 그 주소를 뽑아보니까 58개 지역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쪽에도 다 보내고 있고요. 그리고 동학 관련자나 문화단체 등으로, 온라인상으로도 상당히 많이 링크를해서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좋아하시더라고요. 현장에서 몰랐던 이야기들도 많았고 실제로 저희가 그 지역을 직접 가서 현장에서 촬영을 하고 그런 내용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또 운이 좋게 여러 능력 있는 집필진들을 만나서 이야기가 구성되고 있고요.

● 조금 다른 얘기일 수도 있지만 최근에 동학혁명 2차 봉기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서훈 문제, 또 여기에 의열단의 김원봉과 대동단의 김가진 이런 분들에 대해서 서훈해야 된다는 운동이 지금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동학과 관련해서는 우선 최시형·전봉준 두 분을 독립유공자로 추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개인이나 단체가 서로 다 조금씩 입장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단장님도 적극적으로 여기 관여하고 계신데요. 현재 경과는 어떤가요?

 

○ 작년 7월 1일부터 1인 시위를 하고 진행해왔는데 결국 저희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죠. 지금 그것 때문에 전국의 동학 유관 단체들이 다 결합했습니다. 결합을 해서 상임대표도 뽑아놓고, 지금의 결론은 역시 법적인 해결밖에는 없다. 그래서 동학혁명 참여자의 예우에 관한 법률부터 개정해야 된다 해서 바로 엊그제 국회에서 발의한 상태입니다. 앞서 작년에도 국회에서 문제를 제기했었고, 이번에 발의한 것입니다. 제가 국가보훈처 담당 국장과 만났을 때 이런 얘기를 했어요. 두 분을 서훈한다고 해서 국가에서 돈이 드는 문제는 하나도 없다. 어차피 독립유공자 예우는 3대까지 받게 되어 있고, 지금 현재 동학 관련 후손들은 이미 4∼5대뿐이므로 명예회복에 관련된 것이라고요. 그리고 서훈 관련해서 항일에 대한 규정이 분명치 않다. 애매하게 규정되어 있어서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기준이나 적용도 다르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제기되고 있잖아요. 어떤 사람은 동학을 탄압했거나 친일행적이 있는데도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사례들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런 것들의 제일 근본적인 해결은 법률 개정을 해야된다. 법률 개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라는 결론에 이른 것입니다.

● 알겠습니다. 경과를 좀더 지켜봐야겠습니다. 1923년 9월 1일에 일본 간토 지역에서 대지진이 발생했지 않습니까. 한국인들이 수천 명 네 많게는 1만 명 이상이라고도 하지만 어쨌든 수천 명이 희생된 사건이고, 여기에 내년이 또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고요. 간토대지진은 천도교와도 직접 관련이 있습니다. 단장님께서 몇 해전부터 교단 차원에서 행사를 또 해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것도 간략하게 소개해 주시죠.

○ 간토대지진으로 천도교 쪽에서도 박사직(1884∼1930) 선생 등 천도교의 청년 등이 직접 피해자들을 조사하기 위해서 일본에 갔죠. 일본의 천도교와 도쿄조선기독교청년회(도쿄조선YMCA) 등이 최초로 추모제를 지내기도 합니다. 이후에 오랫동안 간토대지진 관련한 유족들을 찾아서 인터뷰하고 영화를 촬영했던 분이 있어요. 재일동포 오충공 감독입니다. 한 번은 오충공 감독이 그 영화 상영을 주도하고 있는 친구와 저를 만나고 싶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제가 처음 그 영화를 보고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고 있었는데, 오충공 감독이 그러더라고요. ‘영화 상영은 여기저기에서 하고 있지만 천도교단에서 영화 상영을 한번 하고 싶다. 그리고 추모제를 진행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나의 버킷리스트(Bucket list)다.’ 천도교단에서도 2020년 9월 1일 이후에 한 번 행사를 했는데 그게 지금 진행이 안되고 있어요. 그 뒤로 YMCA하고 연대해서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잘 안 돼서 우리가 다시 이것을 시작해야겠다 했습니다. 지금은 간토대지진에 대해서 준비하고 연구하는 단체가 두어 개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최근 연구소가 발간한 <재일조선인단체사전 1895∼1945>에도 간토대지진 추모 행사의 중심에 천도교단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됩니다. 천도교단이 1920년대부터 일본에 설립한 단체가 11∼12개나 된다는 것도 처음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당시 재일조선인들은 매년 국치일, 3·1혁명, 메이데이와 함께 간토대지진을 4대 기념일 행사로 치렀고, 이념이나 노선이 다르더라도 4대 행사 때는 연합했다는 것이지요. 서로 방향이 다르고 사상과 이념이 다른 단체들, 노동단체와 사상 단체 심지어는 융화 단체들도 함께 한 역사를 꼭 기억해야 할 것같습니다.
모쪼록 100주년이 되는 2023년에는 관련 단체뿐만 아니라 정부도 많은 관심과 함께 행사 지원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6·10독립만세운동도 2021년에 국가기념일로 결정돼서 95주기 만에 처음으로 행사가 진행되었습니다. 저희도 처음으로 대교당에서 6·10독립만세운동 기념식을 가졌습니다. 천도교단과 사회주의 계열이 연대해 거국적인 만세운동을 준비했던 최초의 사건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천도교은 3·1혁명 당시에 버금가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습니다. 한쪽에서는 중앙고가 주도한 것으로만, 학술회의 등에서 대대적인 홍보를 한 것으로 아는데요. 중앙고가 기념탑도 세웠고요. 실제로 중앙고 학생들이 체포되고 구속됐으니까 큰 역할을 한 것은 맞습니다. 다만 이분들을 중심으로 주도적으로 행사하고 있는데, 조금 왜곡되지 않았나 합니다.

● 사회주의 계열이 1926년 6월을 전후해 만세운동을 기획하면서 국내 연합 세력으로 지목한 게 천도교단이잖아요. 물론 구체적인 실행은 안 됐지만 천도교단이 자금과 인력을 제공해 실행 단계까지 간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고, 그것이 결국은 다음해 1927년의 신간회로 이어지는 민족합동전선의 큰 줄기가 되었던 것이지요. 일제시기에 천도교는 부침을 많이 겪었습니다. 친일도 실제로 교단 차원에서 했던 것이 사실이고, 그것이 종교의 사활에 있기 때문이라고도 하더라도 어쨌든 교단 차원에서 적극 나섰습니다. 이로 인해 교단이 해방 이후에 침체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시점에 천도교의 역할들이 적지 않습니다. 종교로서 뿐만이 아니라 운동 차원에서도 그렇고 여러 가지 역사적인 면에서도 중요한데, 교단 차원이나 단장님이 개인적으로 준비하고 계획하고 추진 중인 핵심적인 것이 있다면 끝으로 말씀해 주시지요.

○ 사실 동학 또는 천도교 교단은 3·1혁명을 정점으로 일제의 잔악한 탄압으로 침체하는 상황이 오잖아요. 당시에 운영하거나 재정지원을 하고 있던 단체나 학교뿐만 아니라 현금을 예치하고 있었던 은행의 이런 거 일체를 다 뺏깁니다. 다 뺏기고 또 지도자들이 다 순차적으로 돌아가시거나, 일부는 변절도 했습니다. 총체적으로 침체기였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이북 지역의 천도교인들이 많이 내려와요. 그런데 이분들이 경상도 지역이라든가 여러 지역에 분포되면서 또 한 개의 세력을 이루고. 그래서 제가 개인적으로 보기에는 일제 시기에는 생계도 힘들었고, 또 1950년 전후 천도교는 철저한 반공주의 때문에 정치적인 논쟁에 휩쓸리면서도 그 수혜로 수운회관을 건립하기도 했습니다.
기독교도 해방신학을 중심으로 인해 사회적 참여에 나서고, 천주교도 정의사제구현단을 통해서 긍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 동학·천도교는 동학혁명과 3·1혁명 등 시대마다 역사적인 역할을 할 때 그 폭발적인 힘들이 다 살아난다고 봐요. 그런데 지금은 교인이 많이 줄었고 재정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한 형편에 와 있죠.
한편으로 천도교단이 발전하기 위해서, 저는 무엇보다도 아쉬운 것은 자료의 정리가 너무 안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원불교·불교·기독교와 대종교까지 포함해서 각 종교의 자료를 전수 조사하는 사업을 했는데, 저희는 자료는 많은데 정리가 거의 안 되어 있더라고요. 요즘 세대가 요구하는 데이터베이스화는 엄두도 못 냈고요. 그래서 자료를 조사·수집하고 디지털로 데이터베이스화하는 것부터 영상자료와 유물 보존까지, 해야 될 일은 너무 많습니다. 이러한 작업들이 제가 보기에도 몇 년째 정체되고 있어요. 시도되지도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지금 동학경전은 세로(쓰기) 되어 있어요. 대중화되지 못했다는 얘기죠. 좀 더 대중화될 수 있는 경쟁력을 빨리 갖춰야 하는데, 100년 전의 번역 작업 이래로 진전된 게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어린이 이야기만 해도 그렇습니다. 올해가 100주년이 됐지만 그 중요한 자산이 동학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거의 모릅니다. 방정환 선생은 알아도 방정환과 동학·천도교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모르거든요. 매년 기독교는 크리스마스행사를 하고, 불교도 연등행사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동학이 창건된 다음에는 이런 행사가 없느냐. 그래서 ‘동학역사문화페스타’를 하자, 심지어는 요새 음식문화가 발달돼 가지고 매일 먹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잖아요. 왜 어린이를 위한 음식 개발은 안 하느냐… 어린이날 세계 음식 문화 축제도 한 번 하고 그래서 ‘동학역사화페스타’를 대중화시키는 것도 생각해 봤습니다.
덧붙이자면 천도교단 차원의 봉사행사도 많이 부족하고, 특히 지금이나 향후 가장 중요한 생명·생태에 관련해서도 큰 방향을 가져야 할 것이고, 더 나아가 남북 교류와 통일을 위한 남북 천도교단 차원의 역할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 오늘 해 주신 말씀들이 굳이 천도교인이 아니더라도 모두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처음 말씀 드린대로 올해 임인년 ‘검은 호랑이 해’를 맞이해 단장님과 천도교단, 민족문제연구소와 후원 회원, 더 나아가 우리모두에게 희망을 주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의암 손병희 선생 순국 100주년을 주제로 치러지는 모든 행사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더 듣고 싶은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시간상·지면상 여기까지 말씀을 듣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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